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53화 (53/94)

53. 어쩌면 사랑일지도

이스카는 순식간에 변한 라벨라의 눈빛을 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역시 화가 나 있어.’

행동을 간파당한 게 그리 불쾌했던 걸까.

순진한 척 굴어서 라벨라의 기분을 풀어보려 했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물론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화가 잔뜩 난 맹수에게 물어뜯기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래, 나한테 할 말이 많을 거야, 그럼, 아무렴 그렇고말고.”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라벨라가 팔짱을 끼면서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자세만큼이나 그녀의 눈빛도 불량하기 그지없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황자님께서 이렇게 오래 자리를 비우셔도?”

“그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당신을 만나는 건데.”

라벨라의 빈정대는 말에 이스카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확실히 분위기가 안 좋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손을 꼽을 수가 없다.

이유를 짐작해보려는 이스카의 머릿속은 핑글핑글 바쁘게 돌아갔다.

이 와중에도 눈앞의 라벨라는 너무 예쁘다.

안고 키스하고, 달콤한 향기를 듬뿍 들이마시고 싶은 욕구가 들끓어 이성을 마비시켰다.

냉철한 판단을 하기에는 뇌가 자꾸 흐려진다.

멍청한 얼간이가 된 것 같은데, 또 그게 싫지는 않으니 문제라면 문제였다.

‘자, 정신 차리자.’

이스카는 겨우 이성을 부여잡았다.

일단은 라벨라의 화를 풀어주는 게 먼저다.

이러다 또 저 여자가 버리겠다고 나오면 곤란했다. 귀찮은 건 질색하는 사람이니까.

‘어쩐담.’

이스카가 라벨라의 눈치만 살살 살필 때였다.

“!”

라벨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스카의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러고는 꾹 힘을 주어 뒤로 밀기 시작했다.

별다른 반항 없이 떠밀리며 뒷걸음질 치던 이스카의 다리가 탁, 어딘가에 부딪혔다.

나무 의자였다.

계속 미는 힘에 풀썩 앉자 눈높이가 바뀌었다. 이스카는 순진한 짐승처럼 라벨라를 얌전히 올려다봤다.

“…….”

마치 취조할 것처럼 이스카를 노려보던 라벨라가 갑자기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나 어때?”

그러더니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잡아 펼치고는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았다.

“음?”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이스카는 어색하게 입꼬리만 끌어올렸다.

“나 어떠냐고. 예뻐?”

그러자 라벨라가 재촉하듯 되묻는다.

“그야…… 당연하지.”

너무 대답이 뻔한 걸 묻는 거 아닌가.

이스카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라벨라를 찬찬히 훑어봤다.

어지간한 귀족은 꿈도 못 꿀 고급 드레스에 값비싼 장신구까지. 역시 네이트랄 가의 명성이 헛되진 않은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숯검정을 묻혀 놔도 예쁠 라벨라였다. 오히려 옷과 온갖 보석이 그녀의 덕을 보는 것 같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솔직히 공작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 심정인데.”

제가 없는 곳에서 라벨라의 사랑스러움을 온 동네에 알릴 작정인가.

참으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양반 같으니.

자신보다 먼저 라벨라에게 드레스와 보석을 선물할 기회를 가져간 것도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할 수만 있다면 라벨라에게 세상의 모든 진귀한 걸 가져다 손에 쥐여주고 싶지만, 아직 때가 아니라며 꾹꾹 참아내고 있었거늘.

“그래, 네 덕분에 고맙게도 이런 치렁치렁한 옷까지 입고 레이디 노릇을 하게 됐지 뭐야?”

‘아하.’

그제야 이스카는 라벨라가 화가 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공작, 이제 보니 입이 아주 가벼운 자였군.

함구하라는 명령까지 내린 건 아니었지만, 눈치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나 보다.

‘그런 자가 제국 제일의 귀족이라니.’

이스카가 못마땅함을 담아 혀를 찼다.

그러다가 라벨라의 서늘한 시선에 언제 그랬냐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지금은 이런 독점욕을 내보일 때가 아니었다.

“음, 그렇지만 라벨라. 내가 공작에게 그런 청을 한 건, 어디까지나 당신의 안전을 위해서였다고?”

대외적으로 공작의 수양딸이라는 입지 정도는 되어야 일이 틀어졌을 때 황태자가 함부로 할 수 없다.

아무리 황권이 강한 임피리아라 해도 대귀족을 함부로 좌지우지할 수는 없을 테니.

“하, 날 걱정해서 그러셨다?”

“그래, 당신이 쿠즈네로 간 것과 같은 이유였어.”

“…….”

허를 찔린 라벨라는 순간 대꾸하지 못했다.

당신도 날 걱정해서 간 거잖아, 아니야?

이스카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도 내 나름대로 마음 놓을 수 있는 안전장치는 만들어 놔야 했으니까.”

눈에 보이지 않으니 불안한 마음은 시시때때로 덮쳐 왔다.

강한 그녀를 잘 알면서도 한 번씩 루카비가 라벨라의 목숨을 앗아가는 꿈을 꾸었다.

그럴 때면 가슴에 새겨진 흉터가 그날처럼 미친 듯이 욱신거렸다.

“불안한 내 마음을 이해해주면 안 될까?”

“그러니까, 어쨌든 날 황위 싸움에 끌어들일 의도는 아니었다?”

“그래, 그것도 내가 황위를 차지한 후에 해달라 청한 거였어. 지금 바로가 아니라. 말했잖아. 난 더이상 이 일에 당신이 관여하는 건 원치 않는다고.”

라벨라의 기분이 좀 나아졌을까.

기대하면서 이스카는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데 라벨라의 표정은 영 나아진 게 없어 보였다.

“후,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 안 들어?”

허리춤에 손을 올린 라벨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날 여기까지 끌고 와 놓고 말이야.”

“나도 후회하고 있어. 내 각오가 어설펐던 탓에 이 지경이 됐으니까.”

이스카는 마른 입술을 슬쩍 핥았다.

라벨라는 유일하게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여자였다. 그만큼 그녀를 향한 마음은 맹목적이었다.

처음엔 도움을 받고자 손을 내밀었는데 이제는 그 도움이 받기 싫어 배제시키고 있으니.

이스카 자신도 제 모순을 잘 알았다.

“어쨌든, 내게 또 할 말 없어?”

“?”

이스카의 보랏빛 눈동자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끝까지 차메르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으려나 보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먼저 꺼내는 수밖에.

“내가 쿠즈네에서 누굴 만났을 것 같아?”

“…….”

찬찬히 라벨라의 눈을 들여다보던 이스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날 두고 거래를 하셨다고?”

“라벨라.”

전부 다 알게 됐구나.

이스카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자와 내가 거래한 건,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야.”

이스카의 표정이 곧장 서늘해졌다.

“상관이 있었지, 네가 날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야.”

차가워진 얼굴에 냉기가 서리는 걸 보며 라벨라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

무언가 말하려는 듯 이스카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어떤 변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숲을 때리는 바람에 요란하게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만 크게 울렸다.

“……좋은 자세야. 또 얼렁뚱땅 말로 때우면서 넘기려 들면 진짜 화내려고 했거든.”

느리게 눈을 깜빡인 라벨라가 먼저 침묵을 깼다.

뭐, 이스카의 설명이 없어도 그가 차메르와의 거래를 제게 숨긴 이유는 충분히 짐작됐다.

처음에야 차메르의 수족일까 아닐까 확인하느라 그랬을 테고, 그 후에는 제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했을 터.

지금도 버림받을까 두려운 강아지처럼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게 훤히 보였다.

저렇게 온몸으로 감정을 드러내니, 라벨라에겐 이제 이스카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더 이상할 정도였다.

“말하지 못한 건 미안해. 그래도 당신을 어떻게 이용해야겠다, 그런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어.”

심란해진 이스카가 이마를 문질렀다.

“어차피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막연히 찾던 거였으니까.”

그러다 피하지 않고 라벨라를 조심스레 쳐다봤다.

“그리고 지금은, 이미 당신에게 도움을 충분히 받았어.”

“글쎄, 어떤 도움을 받으셨을까, 우리 황자님께서.”

“당신이 곁에 있으면…… 저주가 약해지거든.”

말해도 되나 확신이 없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이스카가 한숨처럼 말했다.

“……그래?”

아하, 그러니까.

차메르 그 양반의 눈이 뒤집힌 이유가 이거였군.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것 같았다.

저주가 사라지면, 차메르와 이스카의 거래도 의미가 없어진다.

한마디로 차메르를 풀어줄 이유가 없어지는 거였다.

차메르도 이스카도 예상하지 못했던 변수.

그건 바로 자신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녀 자신이 이스카와 차메르, 두 사람의 약점이 된 셈이었다.

모든 패를 손에 쥐게 된 라벨라는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조만간 차메르를 한 번 더 만나야겠네?’

충격받은 척, 배신감에 몸서리치는 척 일단 자리를 뜨는 걸로 녀석과의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한 후였다.

역시 휘둘리는 것보다는 휘두르는 게 적성에 맞지. 손에 쥔 패를 가지고 제대로 딜을 걸어 볼 심산이었다.

라벨라가 차메르에게서 얻어내고 싶은 건 명확했다.

‘마법. 제대로 쓸 수 있으면 최고의 무기지.’

하지만 이건 이스카에게 아직 비밀.

라벨라는 웃음기를 감추며 사뭇 진지한 얼굴을 했다.

이 싸움에 참전할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그녀는 이스카를 잃을 생각도 없고, 두 사람의 거래를 이용해 마법도 얻어낼 것이다.

갖고 싶은 건 갖는다.

그러니 이스카에게도 노선을 확실히 정하게끔 해야겠지.

매번 이스카가 제 앞을 막아서면 곤란했다.

“어쨌든 난 이 싸움에서 빠질 수 없어.”

“라벨라.”

“황태자가 칼리벨을 감시하고 있어.”

짙은 한숨을 내쉰 이스카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가 황위에 오르면 깔끔하게 해결될 일이야.”

“네가 실패하면?”

“……키르아의 이름을 버려. 당신이 새로운 길드를 만들고, 상단을 키울 수 있도록 지원할 거니까.”

네이트랄 가의 수양딸로 입적하도록 손을 쓴 건 그런 이유도 있기 때문이었다.

“글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라벨…….”

“이스카.”

“…….”

“넌 내 유일한 약점이야.”

생각지 못한 말을 들은 이스카의 눈동자가 조금 커졌다.

“그러니 기꺼이 널 위한 도구가 되어볼까 하고.”

라벨라는 이스카의 턱을 손가락으로 받쳐 들었다.

“알지? 이런 건 내 인생에서 처음이고, 다시 없을 선택이라는 거.”

라벨라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음,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지.”

감상하듯 느리게 얼굴을 훑으며 읊조리자 이스카의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그렇게 놀랄 정도인가.

“물론 도구라 해도, 내 뜻대로 움직일 거지만.”

“……라벨라.”

꾹 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스카의 표정이 묘했다. 웃는 것도 같고 꼭 울 것도 같고.

뻗어오는 이스카의 손끝이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라벨라는 제 볼을 감싸는 손을 굳이 뿌리치지 않았다.

딱히 뿌리칠 생각도 없었고.

“날 사랑하지, 이스카?”

“…….”

“그럼 내 결정에 토 달지 않기로 해.”

이스카는 무력하게 라벨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이 악랄한 여자 같으니라고.

이런 때에 사랑이란 단어를 언급하다니.

사랑한다도 아니고, 사랑일지도 모른단다.

그래도 그 어설픈 고백에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그녀의 영악함이 괘씸한데도,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이스카, 우리 순진한 황자님.”

라벨라의 가느다란 손이 이스카의 은발을 문지르듯 부드럽게 빗어 내렸다.

“잘 생각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확인할  좋은 기회야.”

내가 널 위해서 어디까지 할지 궁금하지 않아?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그리고 제가 넘어가고 말리라는 것도 자명한 사실이었고.

“대신, 위험한 일을 자처하지 않는다고 약속해.”

“좋아.”

“하아.”

이스카의 한숨이 꼭 이래야 하는지 묻는 것 같았다.

“훌륭한 선택이야.”

“놀리지 마, 난 지금 자괴감에 죽을 것 같으니까.”

“어차피 정해진 결론이었다는 걸 잘 알잖아?”

“위로 퍽 고맙네.”

툴툴거리는 이스카의 머리 위로 라벨라의 작은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그럼 이야기도 끝났고.”

한 걸음 떨어진 라벨라가 다시 이스카와 눈을 마주쳤다.

싱긋 웃는 라벨라의 눈꼬리가 요염하게 휘어졌다.

“이제 미뤄뒀던 걸 할 차례네.”

라벨라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스카의 입술을 꾹 눌렀다.

다음을 허락하는 신호였다.

“후, 이 와중에도 설레는 걸 보면 난 확실히 미친 게 틀림없어.”

고개를 잠시 내저은 이스카가 곧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낚아채듯 잡았다.

“어차피 사양할 생각도 없으면서.”

강제로 들려 커다란 테이블 위에 걸터앉게 된 라벨라가 키득거리며 이스카의 양 뺨에 손을 얹었다.

오랜만에 본 눈동자가 자꾸만 라벨라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드리우는 정염이 기꺼웠다.

그래, 넌 그렇게 날 계속 원하고 욕망해야 해.

이 눈동자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지독한 감정들이 어지럽게 뒤섞이며 눈빛이 더욱 진득해졌다.

라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던 이스카의 눈동자가 긴 속눈썹에 서서히 가려졌다.

쪽.

입술이 부드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당장이라도 집어삼키고 싶은 얼굴을 한 것치고는 꽤 점잖은 태도였다.

“…….”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다음의 입맞춤은 결코 지금처럼 귀엽지만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아.”

무언갈 깨달은 듯 탄식한 라벨라가 풍성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왜?”

“잠깐.”

“…….”

라벨라의 행동을 지켜보던 이스카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라벨라가 움켜쥔 드레스자락을 끌어올리자 하얀 다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려 봐, 네게 줄 선물이 있거든.”

타는 듯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면서 라벨라가 싱긋 웃었다.

실로 잔인하고 짓궂은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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