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다른 여자 필요 없어
“세츠는 도착했겠지?”
“네, 전하께서 돌아오셨으니 세츠가 더 바빠지겠네요.”
리텔니는 창틀에 걸터앉은 주군을 힐끗 보며 흡족하게 웃었다.
창 너머 먼 곳을 보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지긋지긋한 시꺼먼 옷 대신 새하얀 셔츠에 바지를 입은 주군은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났다.
역시 최고급 옷감으로만 주문하며 부산을 떤 보람이 있었다.
아무렴, 황위에 오를 존귀한 분이신데 저 정도는 되어야지.
“그나저나, 전하.”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리텔니가 퍼뜩 고개를 들어 다시 이스카를 바라봤다.
“라벨라 님을 이 싸움에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새 생각이 바뀌셨나 봅니다.”
“아니, 안 바뀌었어.”
“그런데 네이트랄 공작에게 그런 청을 하셨습니까?”
세츠가 공작에게 전할 내용을 떠올린 리텔니가 미간을 좁혔다.
“싸움에 끌어들이려는 게 아니야. 정확히는 미리 준비해놓는 거지.”
“…….”
“라벨라, 그녀 외에 다른 여인은 필요 없으니까.”
그러니 그는 미래를 준비할 뿐이었다.
혹은 라벨라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을 놓는 것일 수도 있고.
“세츠가 내가 기대했던 답을 들고 오면 좋겠네.”
이스카의 시선이 다시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로 향했다.
“하아, 중증은 중증이야.”
전부 다 라벨라의 예쁜 눈동자처럼 보이니 말이다.
떨어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상사병이 시작되는 듯했다.
* * *
“네? 그게 정말입니까?”
덜커덩, 카셰이가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나무 의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황자가 황궁으로 돌아간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도 없이 임피리아 전역을 방랑하던 루비츠 황자가 드디어.
“그래서 우리도 급히 여기로 온 거예요.”
라벨라가 덧붙인 말에 카셰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거 참,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장로님은, 왜 이스카…… 아니.”
라벨라가 습관처럼 이름을 부르다가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이름 참, 영 입에 안 붙네.
“왜 루비츠 황자의 편에 서는 건가요?”
눈을 찌푸렸다 편 라벨라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
“글쎄요. 시작은 황후 폐하의 눈물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천천히 눈을 감은 카셰이가 기억을 되짚었다.
“다 죽어가는 황자님을 데리고 오셔서는 제게 어려운 선택을 하도록 만드셨지요.”
“꼭 살려야만 해요, 카셰이. 난 임피리아의 저주를 끊을 희망을 황자에게 걸기로 했어요.”
황후는 제 손으로 자기 아들을 내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밀어 넣을 또 다른 아들.
“…….”
루비츠 황자를 살린다는 건 황태자를 바꾸는 데 동의하는 것과 같았다.
황후의 계획은 아주 위험한 생각이었고 그녀의 요구는 반역과도 같은 그 길에 동참해달라는 거였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한 그대잖습니까. 무엇이 정말 황실을 위한 선택인지 생각해줘요, 카셰이.”
“폐하!”
카셰이에게 어려운 선택을 던진 황후는 망설임 없이 무릎을 꿇었다.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몸이 아무렇지도 않게 차가운 흙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마음을 굳힌 건, 황자님이 쿠즈네를 떠나셨을 때인 것 같습니다.”
제 존재가 쿠즈네에 폐가 된다는 걸 알자마자 미련 없이 떠나버린 그 단호한 결정에 카셰이는 황후가 왜 루비츠 황자를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로부터 제국을 지키기 위해 만들었던 검. 그 후로도 제국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온 무기.
카셰이의 이름을 가진 자들은 대대로 번민에 휩싸였다.
황실에 충성을 맹세했음에도, 쿠즈네의 무기가 불필요한 살생에 쓰일 때마다 괴로웠다.
이것이 진정 맞는 것인가. 쿠즈네의 충성이 황제에게 독인가 득인가. 자신들의 손으로 만드는 무기가 피를 더 부르는 것은 아닐까.
그 복잡한 감정을 눈앞의 어린 여인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을 수는 없을 터.
“저는 루비츠 황자님이 꼭 황위를 잇길 바랍니다.”
말을 아낀 카셰이는 라벨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니 라벨라 님께서 그분께 큰 힘이 되어주셨으면 좋겠군요.”
“저런. 높이 평가해주시는 건 감사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랍니다.”
라벨라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휘었다.
“그냥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다 하는 용병일 뿐이죠.”
라벨라의 너스레에 카셰이는 반박하는 대신 미소만 지었다. 차메르와 루비츠 황자의 거래 내용을 아는 그로서는 침묵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루비츠 황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분간은 정신없이 바쁠 거예요.”
라벨라는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으며 화제를 바꿨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 전까지, 방책을 정비하고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방어 체계를 만들어야 할 테니까요.”
“이렇게 도와주시니 저희야 감사할 따름이죠.”
카셰이는 자그마한 여자를 보며 쉽게 고개를 조아렸다.
처음 라벨라를 보며 가졌던 자그마한 의구심조차 사라지고 이제는 신뢰와 믿음만이 남아 있었다.
‧
카셰이와 대화를 끝낸 라벨라는 혼자 마을을 둘러보았다.
‘이쪽은 무조건 보강해야하고.’
어디를 어떻게 건드려야 할까 머릿속으로 계획을 세우던 그녀의 걸음이 대장간 근처에서 멈췄다.
라벨라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해졌다.
“……역시, 한 번 가 봐?”
늦은 시간이었지만 대장간의 굴뚝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대장간에서 쓰러졌던 때를 떠올린 라벨라는 손을 몇 번 쥐었다 폈다.
마치 목구멍에 콕 걸린 가시처럼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느꼈던 통각이 다시금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그동안 계속 훈련하긴 했으니까.’
마음을 정한 라벨라가 대장간으로 걸음을 성큼 옮겼다.
무엇보다 그녀의 품 안에는 이스카가 준 팔찌도 있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
떠나기 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기어코 건네고 간 거였다.
‘어디 훈련의 성과를 확인해볼까.’
라벨라는 사뭇 비장하게 대장간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리고 라벨라의 동그란 눈이 더없이 커졌다.
“!”
울렁거리다 못해 무언가 울컥 토해낼 것 같았던 그때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강제로 각성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제 몸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하릴없이 쓰러졌던 그날과는 다르게 오히려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호라, 훈련한 보람이 있는걸?’
라벨라는 최대한 감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기민해진 감각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마력의 흐름을 읽어냈다.
“……!”
신기하고 뿌듯한 마음에 마력의 흐름을 따라가던 라벨라가 미간을 좁혔다.
‘근원지가 있네.’
모든 강력한 힘은 전부 한곳에서 뻗어져 나오고 있었다.
라벨라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저 땅 아래 어딘 가의 깊은 곳이었다.
* * *
대장간도 멈추고 모두가 잠든 깊은 밤.
고요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라벨라는 한 번 더 가려는 곳의 위치를 가늠해봤다.
아마도 저 웅웅대는 힘이 쿠즈네의 무기가 강한 이유일터.
카셰이나 무트를 붙잡고 캔다 한들 원하는 답을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팔과 다리를 길게 늘여 몸을 푼 라벨라는 망설임 없이 지붕 위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힘의 원천을 마주할 수 있었다.
“……차메르?”
아는 얼굴을 보게 된 라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차갑고 오만한 얼굴이 눈을 감은 채 투명한 수정구 안에 갇혀 있었다.
“이게 대체.”
허, 헛숨을 뱉어낸 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제 목에 걸린 초커를 만지작거렸다.
일단 놀라움을 수습한 그녀는 거대한 수정구 주변을 천천히 돌아봤다.
몸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마력의 양이 대장간에서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전기 고문을 당할 때처럼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못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라벨라는 눈을 감은 차메르를 물끄러미 보다가 조심스레 수정구로 손을 뻗었다.
“기어코 여기를 찾아냈구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여느 때처럼 불투명한 모습의 차메르가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불투명한 차메르와 그의 본체를 번갈아 본 라벨라는 왜 그토록 차메르의 얼굴을 보기 힘들었는지 알 것 같았다.
“영감님. 왜 요 모양 요 꼴이야?”
눈썹을 찌푸린 라벨라가 엄지손가락만 들어 수정구를 가리켰다.
“하아, 여전히 건방지구나.”
“그 이야기 때문이야? 뭐더라, 임피리아의 초대 황제랑 싸워서?”
“…….”
답이 없는 걸 보니 진짜인가 보다.
“정말? 아주 유치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대단한 마법사라며, 이거 못 빠져나와?”
코웃음 친 라벨라가 굵은 쇠사슬을 잡아당겼다. 절그럭 소리가 나긴 했지만 단단하게 감긴 쇠사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을 꺼내든 라벨라가 검 끝으로 쇠사슬을 톡톡 두들겨 봤다. 확실히 쉽게 끊어질 것 같지는 않았다.
“영감님, 날 임피리아로 데려온 이유가 있는 모양이네.”
라벨라는 빙빙 돌리지 않고 본론을 꺼냈다.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올 만한 힘이 있으면서도 갇혀서 꼼짝도 못 하는 마법사. 당연히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
팔짱을 낀 채 오만하게 턱을 들고 있는 마법사는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럼 질문을 바꿔볼까.”
라벨라는 픽 웃으며 한쪽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날 데려온 게 이스카, 아니. 루비츠 황자와 관련 있어?”
“…….”
그제야 차메르의 눈빛이 조금 바뀌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제 정체를 알고 접근해 온 이스카였다.
라벨라는 정곡을 찌른 탓에 차메르가 반응했다 여겼지만 차메르가 놀란 건 그 때문이 아니었다.
‘마력이…….’
루비츠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라벨라의 몸속에 흐르는 제 마력의 파동이 달라졌다.
“루비츠 황자라.”
또다.
그의 이름에 제 마력이 감응하고 있다. 마치 제 주인을 언급한 것처럼 유하고 부드럽게, 따뜻한 빛을 띠고서.
‘어째서.’
차메르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럴 수는 없다. 비스메르트를 증오하는 만큼 피를 쏟아내며 뼈에 새긴 저주였다.
아무리 라벨라의 몸에 나눠주었다 한들, 근본은 제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마력이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증오해야 할 상대에게 감응한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유가 뭐지? 무엇 때문이지?
라벨라를 보는 차메르의 시선이 더없이 복잡해질 무렵.
“그러니 그녀를 수단으로 나와 거래하려 들지 마.”
불현듯, 그저 재미있다 여겼던 녀석의 말이 떠올랐다.
녀석이 진심이라서?
‘설마.’
차메르는 제 가정을 비웃었다.
비스메르트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태생이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피였다.
자신 외에는 누구도 중요치 않은 자들. 그들이 사랑하는 것은 피와 권력뿐이었다.
그래도 그 건방진 녀석이 진심이라면. 진심으로 저 망아지 같은 녀석을 마음에 담았다면.
차메르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섰다.
그렇다 해도 녀석을 쉽게 저주에서 놓아 줄 수는 없었다.
“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고 싶다고.”
거래를 했어도 차메르는 비스메르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라벨라도 데려온 것이었다.
그가 이용해야 할 패를 녀석의 손에 넘길 수는 없었다.
차메르는 눈을 새초롬하게 뜬 라벨라를 보며 웃었다.
“내가 그 녀석과 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
라벨라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 * *
차메르와의 강렬한 만남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라벨라는 숙소로 가다 말고 방향을 틀었다. 마을을 벗어난 그녀는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적당한 장소가 됐다 싶을 때쯤, 라벨라는 우뚝 멈춰 섰다.
“그만 나와요.”
팔짱을 낀 라벨라가 한 점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
그러자 온통 새까매서 배경에 스며든 것 같은 작은 체구의 사내가 스륵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우리 구면이죠?”
이미 알고 있는 기척이었다. 꽤 오래전, 바로 이 쿠즈네에서 눈치챘던 그림자.
“물론 소개받지는 못했지만.”
라벨라의 확고한 말에 그림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을 끌어 내리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여기까지 날 찾아온 이유가 뭐죠?”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이스카가?”
무언가 문제가 생긴 걸까.
눈빛이 변한 라벨라가 팔짱을 풀자 세츠는 말없이 다가와 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밀봉된 편지였다.
라벨라는 손바닥보다도 작은 봉투를 찢듯이 열었다.
“…….”
꺼내든 작은 종이에는 딱 한 마디가 적혀 있었다.
[보고 싶어.]
종이를 든 라벨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고작 이딴 소리를 하려고…….
“……후.”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넘긴 라벨라가 사내를 직시했다.
“이름이 뭐죠?”
“세츠입니다.”
“그래요, 세츠. 내가 진지하게 묻는 건데, 꼭 이 녀석 밑에서 일해야겠어요? 키르아로 올래요? 대우는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널 보면 분명히 자기 밑으로 데려가려 할 거야. 넘어가면 화낼 거야, 세츠.”
“…….”
세츠는 말없이 주인이 했던 말을 되새김질했다.
제 주인은 그녀를 상당히 잘 아는 모양이었다.
“……내가 쿠즈네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전하께서 쿠즈네로 가라 하셨습니다.”
라벨라의 입꼬리가 삐뚜름해졌다.
전부 예상했다는 뜻이네.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는 게 자신인지 이스카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요.”
종이를 구기려던 라벨라는 세츠를 힐끗 보고는 얌전히 품에 넣었다.
볼 일 다 봤으면 가보라는 듯 시선을 주었는데도 세츠는 못이 박힌 듯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답장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왜 그러냐는 듯 쳐다보자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세츠.”
라벨라는 허리춤에 한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대 주군에게 전할래요?”
“…….”
“내가 이다음에 어디로 갈지도 잘 알 테니 보고 싶으면 직접 오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