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안 버리려고
“…….”
미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동생을 찾아오라.
라벨라는 황태자의 말을 곱씹었다.
‘하.’
검을 쥔 손에 힘이 빠득 들어갔다.
이미 예상했던 요구이지만 막상 직접 들으니 기분이 바닥으로 메다 꽂히는 것 같았다.
“저희 길드의 무엇이 전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을까요.”
검을 고쳐 쥔 라벨라가 여유롭게 물었다. 공손한 말투였지만 다분히 조소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황태자의 의심을 곧바로 풀어줄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루카비는 불투명한 장막 너머의 실루엣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의뢰가 그리 어려운 것인가. 키르아의 명성은 헛것이었나 보군.”
“……황궁에 있는 분을 찾아내라 하시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루카비가 하하 소리 내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
“순진한 말장난은 그만하지.”
언제 웃었냐는 듯 루카비의 말투가 서늘해졌다.
키르아고 캄파냐고, 그따위 하찮은 것들엔 아무 관심도 없었다. 그 뒤에 루비츠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루비츠가 있다면 이렇게 들쑤시면 될 일이고, 연관이 없다 해도 상관없었다. 만약 녀석들이 루비츠의 흔적이라도 찾아온다면 훌륭한 성과였다.
루카비는 이 하찮은 종자들이 제 쓸모를 증명한다면 거두어줄 아량도 있었다. 그러니 그는 이 건방진 암살자와의 거래에서 손해 볼 것이 전혀 없었다.
“……황자님을 데려오면 그 대가는 무엇으로 주시려 합니까.”
깔끔하고 노골적인 요구에 루카비는 미소 지었다. 원하는 게 분명한 상대일수록 다루기에는 쉬운 법이니.
“무엇이든.”
“무엇이든…… 말입니까.”
“몸이 아픈, 나의 하나뿐인 소중한 동생을 찾는 일인데 아끼려 들면 되겠나.”
“제국의 미래이실 전하께서 무엇을 주실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요.”
“그래, 나도 모쪼록 즐거운 거래가 되길 기대하지.”
“그럼 거래의 증표로 데리고 계신 손님은 그만 풀어주시겠습니까? 그가 없으면 일하기가 영 불편해서 말입니다.”
“그러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도 루카비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기묘한 말투였다. 여인의 말투와 사내의 말투가 교묘하게 섞인.
“아, 중요한 걸 잊었군. 거래에는 기한이 있어야지.”
“…….”
“곧 있을 연회에서 선물로 받고 싶은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장막 너머로 너울거리는 그림자가 멀어지는 걸 보며 루카비는 베개 밑에 두었던 단검을 살며시 쥐었다.
늘 곁에 두던 장검이 상대의 손에 넘어간 건 아쉬웠지만, 저 정체불명의 침입자를 시험해보기에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목표까지의 거리를 가늠한 루카비가 장막을 걷어 젖힌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
가림막이 사라짐과 동시에 루카비의 손에서 날아간 단검은 칸피덴이 휘두른 검에 맞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아슬아슬하게 칸피덴의 귀 옆을 지나간 단검이 길을 잃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
검은 천이 찢어지며 사내의 얼굴이 드러났다. 어두웠지만 얼굴을 식별하기에는 충분했다.
“흐응, 그래도 거래할 상대의 얼굴은 확인해야 하지 않겠나.”
루카비는 뒤를 공격한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사파이어색 눈동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
사내는 별다른 말 없이 성큼 뒤로 몸을 움직여 창가로 다가갔다. 느른하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태도였다.
그림자처럼 들어 온 이는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조용히 연기처럼 사라졌다.
“……어느 틈에 바뀐 거지.”
틈을 주지 않고 공격했다 여겼는데.
루카비는 방금 제가 본 사내가 자신과 대화를 나눴던 이가 아닐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혼자 남은 루카비는 침실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전하.”
침실 입구를 지키던 병사가 곧장 머리를 조아렸다. 순진무구한 얼굴은 침실 안에 침입자가 들어왔다는 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쩌면 진짜 루비츠를 데려올지도 모르겠군.’
생각보다 뛰어난 녀석들의 실력이 루카비의 흥미를 끌어냈다.
“하하.”
눈동자가 진득하게 어두워진 루카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
“뭐야.”
라벨라는 칸피덴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검에서 손을 뗐다.
진즉 빠져나갔다가 안에서 풍기는 살기에 다시 뛰어들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얼굴을 보였어.”
“뭐?”
“그냥 호기심이었던 것 같아. 그래도 서둘러 빠져나가는 게 좋겠어.”
미간을 좁히는 라벨라에 칸피덴이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
라벨라는 캐묻는 걸 미루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황궁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뒤를 쫓지 못하도록 흔적을 지우며 돌아오느라 꽤 오랜 시간이 소모됐다.
여관으로 돌아오고 나서야 라벨라는 칸피덴의 귀에 살짝 긁힌 자국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도 황태자다 이건가.”
흥, 코웃음 친 라벨라가 잡고 있던 칸피덴의 턱을 놓아 주었다.
뛰어난 실력자인 건 분명했지만 이스카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듯했다.
“미안.”
평소였다면 이런 실수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을 텐데. 잡생각에 사로잡힌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괜찮아, 네 얼굴을 봤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
“여차하면 없애지 뭐. 황태자라고 해도 예외는 없어.”
라벨라는 칸피덴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누군가 들었다면 기함할 말이었지만 칸피덴은 픽 웃고 말았다.
제가 어떠한 책임감도 느끼지 않도록 신경 써 주는 그녀만의 살벌한 농담일 테니까. 그리고 칸피덴은 라벨라의 그런 자유로움을 사랑했다.
“적당히 살핀 후에 돌아가자. 지금 성을 바로 빠져나가면 의심을 살 테니.”
“어쩔 생각이야?”
“뭐가?”
“루비츠 황자. 그쪽과도 거래했다며.”
“글쎄. 넌 어느 쪽 줄을 타는 게 더 이득일 것 같은데?”
오히려 되묻는 질문에 칸피덴이 입을 다물었다.
“이번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대장.”
“응.”
라벨라가 눈썹 한쪽을 꿈틀거렸다.
오늘따라 칸피덴은 그답지 않게 말이 많았다.
“오즈벳 상단.”
“…….”
“배후가 둘 중 어느 쪽이야?”
제 아비가 손을 잡은 자. 그자가 곧 제 적과 다름없었다.
라벨라의 시선이 핏줄 선 칸피덴의 손등으로 향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곧 알게 될 거야.”
‧
칸피덴을 두고 제 방으로 돌아온 라벨라는 얼굴을 가렸던 천을 거칠게 집어 던졌다.
기분이 아주 더럽고 찝찝했다. 황태자는 키르아가 루비츠 황자와 연관이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터.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려다가 자칫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멍청한 자는 아니었지.’
라벨라는 황태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장막으로 가리기 전에 본 황태자의 얼굴은 마치 천사 같았다. 가끔 장난기를 숨기지 못하는 이스카와는 다르게 막연히 선한 인상이었다.
“소중한 하나뿐인 동생? 하.”
라벨라는 코웃음 쳤다.
“웃기고 있네.”
죽일 거다. 그는 이스카를 어떻게든 죽일 거다.
이스카의 가슴에 남아 있던, 볼 때마다 신경을 건드리던 흉터. 그 자상을 만든 자.
그의 손에 이스카가 사라진다는 상상을 하자 아랫배 어딘가가 부글부글 끓는 느낌이었다.
“황위 싸움에서 패하면, 어차피 난 죽게 될 거야.”
이스카는 그런 각오로 임하는 거다.
만약…… 이스카가 사라진다면?
“…….”
여우처럼 굴면서 장난스레 씩 웃는 미소도. 조르듯 슥 허리를 감싸 오던 커다란 손의 온도도. 제 어깨에 묻으며 토해내던 달콤한 숨소리도.
전부 볼 수 없게 된다.
그 모든 것을 두 번 다시 접하지 못하리라. 그건 녀석을 버리고 말고의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거였다.
라벨라는 침대에 풀썩 걸터앉아 머리를 불만스레 쓸어 넘겼다.
명치 부근이 선득거렸다. 서늘함이 왼쪽 가슴을 치고 지나간 탓에 꽉 조여들었다.
그러니까, 심장이었다.
라벨라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카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는 걸 원치 않는다. 특히 제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손에서는 절대로.
* * *
“오랜만이야.”
“잘 못지내신 분치고는 얼굴이 괜찮으시네요.”
“…….”
리텔니의 능글거리는 대답에 이스카의 서늘한 눈동자가 다벨에게 향했다.
네가 내 감시자냐?
쓸데없는 것까지 리텔니에게 전한 범인인 다벨은 알아서 시선을 피했다.
“누가 누구의 주군인지 모르겠군.”
“다른 것도 아니고 황후 자리가 걸린 문제잖습니까. 당연히 저도 상황을 알아야지요. 그래야 대비할 테고요.”
이스카가 헛숨을 터트리자 리텔니가 빙글거렸다.
“됐고, 보고나 해.”
발목을 다른 쪽 무릎에 걸쳐 앉은 이스카가 삐딱하게 팔을 의자 등받이에 걸었다.
“네.”
리텔니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입을 열었다. 눈치 빠른 그는 심기 불편한 주군을 건드리지 않는 법을 잘 알았다.
“일단 영지를 건드리던 도적 떼는 거두어들이기로 한 모양입니다. 습격 횟수가 확연히 줄어들었습니다. 인신매매가 수그러든 건 당연하고, 시중에 유통되던 약도 모습을 감췄습니다.”
“증거 인멸인가.”
“다른 일을 꾸미는 걸 수도 있고요. 그 예로 라벨라 님이 황궁에 가셨잖습니까.”
“상황은 지켜봐. 상단의 몸체까지 알았으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네. 황궁에서 라벨라 님을 부른 것은…….”
“그래, 나 때문이겠지.”
“라벨라 님은 어떤 선택을 하실까요?”
이스카의 청혼을 받아들였다면야 걱정할 필요도 없었겠지만 거절한 그녀가 이스카의 편에 무조건 서 준다는 보장이 없었다.
오히려 제 주군을 통째로 황태자의 앞에 갖다 바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글쎄, 라벨라라면 둘 다 손에 쥐려 할지도 모르지.”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더 큰 이득이 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황위 싸움에 휘말려 등이 터지는 쪽이 아니라, 그 틈에서 제대로 한몫을 챙길 사람이니까.
“음…… 그분께 주군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지가 변수이겠군요.”
적으로 돌린다면 꽤 힘들어질 상대였다.
“그런 건 상관없어. 어떤 선택을 하든 따를 생각이니까.”
“…….”
“그리고 이 싸움에 그녀를 끌어들이지 않을 거야.”
“전하!”
리텔니의 미소가 사라지고 당혹스러운 기색이 들어찼다.
처음부터 황위 싸움의 열쇠가 될 것 같아 찾아다닌 거였다. 그리고 직접 만나 본 라벨라는 상당히 든든한 존재였다.
그녀가 나서준다면 수월해질 일이 여럿이었다. 그런데,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사랑에 빠진 제 주군은 이성적인 판단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미 내게 충분히 큰 도움을 줬어.”
들끓는 피의 충동을 가라앉혀 준 것. 그것만으로도 이스카는 이성적이고 냉정해질 수 있었다.
저주의 늪에 빠진 황제들은 대대로 피를 보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루카비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벨라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테고.
그게 자신과 루카비의 가장 큰 차이점이었다.
“괜찮아. 찾지 못할 것을 대비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노력해 왔잖아.”
“그건 그렇지만…….”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할 테니까.”
웃음기를 지운 이스카가 리텔니와 다벨, 그리고 여전히 구석에 그림자처럼 머물러 있는 세츠를 차례로 바라봤다.
“날 믿어. 늘 그랬듯이.”
* * *
칸피덴을 먼저 떠나보낸 라벨라는 홀로 수도에 머무르며 분위기를 살폈다. 칸피덴이 얼굴을 들킨 이상 그와 함께 움직이는 건 어려울 터였다.
라벨라의 관심사는 황태자의 정보였다. 몇 달만 있으면 임피리아에 온 지도 2년이 되지만, 황궁이 있는 수도에 온 건 처음이었다.
키르아의 정보망으로 알게 된 것 말고, 그녀가 직접 판단할 생각이었다. 칼리벨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는 정보가 와전되어 전해질 확률이 있었으니까.
“훌륭하신 황태자님이시다 이건가.”
라벨라는 보육원을 지나치며 픽 웃었다.
여기저기서 황태자를 칭송하는 이야기를 주워듣고 난 후라 그런지 속이 더부룩했다.
선행을 베풀고, 제국민들을 생각하며 바닥까지 굽어보는 미래의 황제. 잔혹하고 공포심을 심어주던 과거의 황제들과는 퍽 다른 행보였다.
‘상당히 똑똑한 전략을 썼잖아?’
이스카의 여우 같은 행동은 역시 집안 내력인가 싶었다.
이런 식이라면, 귀족들이 이스카의 편으로 돌아선다 한들 제국민들이 용납하지 않을 테지. 민심을 조종한다는 건 꽤 강력한 힘을 갖게 해주는 거였다.
라벨라는 몸으로 느꼈던 황태자의 살기를 되짚었다. 그건 타고나길 피를 보길 좋아하는 자의 것이었다.
이스카가 말한 저주라는 게 그런 걸까. 무혈입성을 꿈꾸는 이스카가 그런 제 형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생각에 잠긴 라벨라가 골목 어귀를 지나갈 때였다.
“!”
뒤를 덮쳐오는 인기척에 급히 몸을 틀고 검을 뽑아내는데 손목이 턱 잡혔다.
“나야.”
“?”
익숙한 향기와 인기척을 느낀 라벨라가 한숨을 쉬며 후드를 벗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반가움을 숨기지 않고 싱글싱글 웃는 얼굴은 내내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던 이스카였다.
“마중 나왔어.”
“뭐?”
“걱정돼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거든.”
“흥, 내가 황태자와 손잡을까 불안했던 거 아니고?”
괜히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데도 이스카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다.
“당신이 그렇게 결론 내렸다면야 뭐. 나는 따를 수밖에.”
“하?”
“원망하지 않을 거야.”
“…….”
라벨라는 그대로 이스카에게 다가가 그를 벽으로 밀어냈다. 이스카의 등이 벽에 닿자 그에게 바짝 몸을 밀착시켰다.
라벨라는 이스카의 보랏빛 눈동자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눈동자. 그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아아, 역시 버리긴 힘들 것 같아.”
중얼거린 라벨라가 픽 웃고는 그대로 이스카의 입술을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