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나 버리지 마
“전하, 송구합니다만 무엇을 물으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그대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군요.”
루카비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금으로 된 팔걸이를 톡톡 두들겼다.
“나는 그대에게 지금 기회를 주고 있는 겁니다.”
토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제 무릎을 꾹 부여 잡았다. 안 그러면 달달 떨리는 손가락이 티가 날 것 같았다.
둘만 있던 공간에 무장을 한 기사들이 들어왔다.
뒤에서 스릉, 검을 꺼내는 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들렸다. 보이지 않으니 공포감이 더했다.
“결코 두 번 다시 없을 기회를 말입니다.”
여전히 고운 미소로 웃는 황태자를 보며 토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혹 네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 되면, 버티지 말고 키르아 이야기를 해. 물론 내 정체만 빼고. 이건 명령이니까 명심해.”
‘아아, 라벨라 님. 대체 어디까지 내다 보신 겁니까.’
그녀는 제 그릇이 통하는 상대가 어디까지인지 이미 잘 알고 있었나 보다.
그런데도 자신을 선택해 준 그녀에게 고마우면서도 죄스러움이 앞섰다.
이미 아내의 목숨을 빚졌을 때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다짐했는데.
“상단 운영할 사람을 찾는 것도 귀찮은 일이야. 그러니 네가 쓸데없는 객기 부리다 골로 가면 곤란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전하의 통찰력을 제가 몰라보고 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토라가 서둘러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머리를 바짝 웅크린 채 토라가 싹싹 빌었다.
“보신 대로 상단을 키운 것은 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따로 모시는 주인이 있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흐음.”
“사실, 캄파냐 상단은 길드 키르아와 계약을 맺고 그들의 비호를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냥 전부 키르아에서 일러준 대로 따랐을 뿐입니다.”
키르아.
얼핏 스쳐 지나가며 들었던 이름이었다.
한낱 암살 길드라 그리 깊이 새겨듣지 않았던.
그랬는데, 미천한 암살 길드에서 이토록 비상한 전략을 사용하면서 움직이는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다가 제 계획을 어그러트린 것이 의도적이었다면 더더욱.
“키르아의 수장은 어떤 자지?”
“저도 얼굴을 본 적은 없습니다. 비밀스러운 존재라 늘 서신이나 수하들을 통해서만 전달받았을 뿐입니다.”
‘루비츠.’
루카비는 혈관을 흐르는 피가 들끓는 걸 느꼈다.
“자작.”
“네, 전하.”
“불러들이게.”
“네.”
“그때까지 그대는 잠시 궁에 머물러야겠습니다.”
“!”
“걱정 말아요, 내 손님으로 머무르게 될 테니.”
“……전하…….”
“키르아의 비밀스러운 그 수장에게 그대가 얼마큼 중요한 존재인지 확인할 좋은 기회가 되겠군요.”
“네?”
“모시고 가게.”
“저, 전하.”
무장한 기사들이 토라를 에워쌌다.
* * *
“어떻게 생각해.”
토라가 황궁으로 갔다는 소식에 급히 회의를 파하고 이스카만 따로 불러낸 후였다.
“당신과 같은 생각.”
이스카의 간단명료한 대답에 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가 움직였다.
“생각보다 빠른 건가.”
“아니, 늦은 감이 없진 않지.”
“황태자가 어디까지 알았을까?”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다는 건 확실히 알았을 테니, 나머지는 토라의 이야기를 들어 봐야 알 수 있겠지.”
“흐음.”
“예상하고 미리 준비해뒀잖아?”
“…….”
그건 그렇지만.
생각에 잠긴 라벨라가 눈을 내리깔았다.
문 입구에 선 이스카는 창가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낀 라벨라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그녀와 단 둘뿐인데, 거리가 너무도 멀게 느껴졌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입을 맞추고,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라벨라.”
조용히 울리는 낮은 목소리에 라벨라의 금안이 천천히 정면으로 향했다.
“날 버리기로 했어?”
“…….”
이스카는 빙빙 돌리지 않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응, 서로 충분히 즐겼잖아?”
그래서 라벨라도 확인시켜주었다. 이제 너와 나는 끝이라고.
“당신, 잔인하네.”
이스카가 옅게 웃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적어도 나는 진지하다는 거 알면서.”
“…….”
“그날 내가 당신에게 했던 말들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들었나 봐?”
“…….”
“아니면, 날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도망치는 거겠지.”
“하?”
사나워진 금안으로 이스카를 노려본 라벨라가 곧장 공격할 것처럼 몸을 곧추세웠을 때였다.
“내가 다 잘못했어.”
“……!”
뜬금없는 사과에 라벨라의 한쪽 눈썹이 삐뚤게 올라섰다 제자리를 찾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나 버리지 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가듯 라벨라와의 거리를 좁힌 이스카가 그녀의 앞에 섰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 나도 이런 내가 낯설 만큼.”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금안을 직시하며 이스카는 처음으로 진지한 마음을 고백했다.
“…….”
말을 멈춘 탓에 살짝 벌어져 있던 라벨라의 붉은 입술이 다물어졌다.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 봐도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결국 그거 하나뿐이야.”
라벨라의 고개가 모로 기울었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건, 당신이 더 잘 알잖아?”
“……그래서?”
“난 당신을 놓아주고 싶지 않아. 당신이 내 곁에서 평생 살았으면 좋겠어.”
라벨라의 미간이 다시 좁아졌다.
“하지만, 선택하는 건 결국 당신이잖아.”
“황후가 되든가 널 죽이든가 둘 중 하나라며?”
라벨라가 코웃음 쳤다.
“당신이 언제부터 내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고. 그리고 내가 당신에게 강요할 수 없다는 거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
“아직 난 황위에 오른 게 아니야.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 당신이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면 미래의 이야기지, 지금은 아니야.”
라벨라는 묘하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이어가는 이스카를 가만히 지켜봤다.
“황위 싸움에서 패하면, 어차피 난 죽게 될 거야.”
이스카가 덤덤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 싸움의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날 외면하지 말아줘.”
시간이 필요했다.
라벨라가 두 번 다시 제 손을 뿌리칠 수 없도록 그녀의 마음에 단단히 자리잡을 때까지.
조금 더 그녀의 곁에서 연인으로 머무를 수 있는 권리.
“당신이 날 모르는 체하는 그 며칠 동안 미치는 줄 알았어.”
이스카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섰다.
“적어도 숨은 쉴 수 있게 해주라. 부탁이야.”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마주치려 애쓰는 녀석의 모습에 라벨라는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쳐내면 되는데, 왜 안 되는 거지.
만지고 싶어서 손을 뻗다가 어쩌지 못하고 제 옆의 벽을 짚는 걸 보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녀석이 지금 여우처럼 내숭 부린다는 것도 잘 알았다.
물론 이 말들이 녀석의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고.
“……확실히.”
라벨라가 몸의 힘을 풀었다.
“네가 꽤 마음에 들긴 해.”
그녀는 제게 꽂힌 보랏빛 구슬 같은 눈동자를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넌 나보다 강한 유일한 사람이지.”
“…….”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이스카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황위에 오른다면 강한 권력까지 생길 테고.”
라벨라는 이스카의 단단한 가슴 위로 가볍게 손을 얹었다.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 하나쯤 네 입맛대로 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
라벨라가 안기듯 이스카의 몸에 기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그런데 난, 어느 누구도 날 휘두르도록 내버려 둘 마음이 없거든.”
라벨라의 손가락 끝이 이스카의 목을 타고 그의 턱 끝으로 미끄러져 올라갔다.
“그게 제국의 황제라 해도.”
입술 끝에 멈춘 라벨라의 손가락에 이스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목울대가 느리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이스카는 라벨라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웃었다.
“내게, 무슨 힘이 있어서.”
“…….”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나는 당신 앞에서 늘 약자인걸.”
이스카는 라벨라의 손가락 끝에 조심스레 입을 맞췄다.
“잊지 마. 나를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라벨라 당신 하나야.”
속삭이는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말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나는 당신에게 내 전부를 내줄 생각이니까.”
“…….”
제게 꽂힌 타는 듯한 눈동자에 라벨라는 마치 온몸의 신경이 조여드는 것 같아 숨을 멈췄다.
* * *
“화해하셨나 봅니다?”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풀린 덕에 칼리벨로 돌아오는 길은 평온했다.
“무릎 꿇고 빌었어.”
“잘하셨습니다.”
“…….”
“그럼 왜 그러셨냐고 따질까요?”
“아니, 나도 잘했다고 생각해.”
이스카가 픽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글쎄, 생각 좀 해보고.”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날 이후, 라벨라는 전처럼 자신을 곁에 두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않았다.
제 목숨 줄까지 쥐여 줄 태세로 바짝 엎드린 것 치고는 불분명한 결론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라벨라에게 잠시간의 유예를 얻어냈으니 나름의 성과는 있었던 셈이었다.
“저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다벨이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황태자가 움직인 마당에 언제까지 키르아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리텔니에게 연락이 오는 걸 보고 판단할…….”
이스카가 다벨에게 한마디 하려는 찰나, 길드 건물로 황급히 들어오는 사내가 보였다.
“저자는, 캄파냐 상단의 직원 아닙니까?”
“맞는 것 같네.”
얼굴에 웃음기를 지운 이스카가 창밖을 노려보다 몸을 돌렸다.
‧
“진짜 주인을 데려오라 했다고?”
“네.”
사내의 대답에 일행 전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로지 이미 이런 상황이 오리라 예상한 라벨라만이 덤덤했다.
“토라는?”
“아직 황궁에 있습니다. 함께 간 일행 모두 잡혀 있고 저 하나만 소식을 전하라며 내보낸 겁니다.”
“…….”
“토라 님과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고, 궁의 사람이 키르아로 가서 이렇게 전하라 명령했습니다.”
“가야겠네.”
“안 돼, 라벨라.”
“대장!”
이스카를 필두로 모두가 라벨라를 만류했다.
“비켜, 이스카.”
라벨라가 앞을 막아선 이스카를 밀어냈지만 이스카는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꼭 가야겠어?”
이스카는 마음이 조급했다. 제가 황궁으로 함께 갈 수 없기에 더더욱.
“토라가 잡혀 있잖아.”
“당신 혼자 보낼 수는 없어.”
“한 번만 더 막아서면, 네가 날 못 믿는다는 걸로 받아들일 거야.”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경고에 이스카가 결국 어깨를 늘어트렸다.
“후, 이스카.”
축 처진 이스카를 보며 라벨라가 한숨을 쉬었다.
“네가 날 위해 해 줬으면 하는 게 있어.”
* * *
“칸피덴, 도착하기 전까지 전부 외워.”
“?”
황궁으로 가는 길, 라벨라가 둘둘 말아놓았던 종이를 내밀었다.
“황궁 지도야.”
“!”
이스카를 시켜 그리게 한 거였다. 별궁 안에 갇혀 지내던 그가 황궁의 모든 지리를 파악하고 있으리란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어떻게 구했는지는 묻지 말고.”
“…….”
일행은 며칠 밤낮을 제대로 쉬지도 않고 말을 바꿔 가며 달려 황성에 도착했다.
하루를 내리 쉬고 새까만 밤이 됐을 때, 라벨라는 칸피덴과 단둘이 여관을 나섰다.
“크다고 잘난 체하더니 구멍도 많잖아?”
이스카가 알려준 비밀 통로 덕분에 쉽게 성안으로 잠입한 라벨라가 입을 비죽였다.
이스카의 말마따나 어마어마한 규모이긴 했다. 최종 목적지인 황태자의 침실까지 가는 데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터였다.
‘어쨌든 네이트랄 공자 앞에서 연기한 보람이 있네.’
프롬쉘 성의 구석구석까지 구경하며 본 것이 큰 도움이 된 건 분명했다.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둔 채 어둠 속을 움직인 두 사람은 결국 황태자의 침실 안으로 조용히 스며들 수 있었다.
입구에 칸피덴을 세워두고 라벨라가 황태자의 침대로 다가갔을 때였다.
“누구지.”
침대에 얌전히 누워 있던 황태자가 눈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황태자의 머리맡에 있던 장검은 이미 라벨라의 손에 들린 후였다. 뾰족한 검 끝이 황태자의 목을 겨눈 채였다.
“부르셨기에 왔습니다.”
라벨라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위로 고정되어 있던 장막의 끈을 쳐냈다.
순식간에 내려 온 천이 황태자와 라벨라 사이를 막았다.
“하, 이곳으로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대담하다고 칭찬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실력을 확인시켜드릴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니 용서하시길.”
모험이었다.
자신을 찾는 황태자의 의도를 예상하고 던져 본 승부수.
그리고 그의 태연한 반응을 보아하니 라벨라는 제 짐작이 맞았다는 걸 확신했다.
“어차피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 아니었습니까.”
라벨라는 제 본디 목소리를 숨기고 대화를 이어갔다.
절대 그에게 제 본 모습을 들킬 생각은 없었다.
루카비는 장막 너머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침실로 들어온 침입자에게선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도 여유를 지킬 수 있던 거였다.
하지만 여긴 황궁이었다. 그것도 황제의 침실 다음으로 가장 안전한 곳. 보통의 실력은 아니었다.
사내? 여인? 사내라고 하기에는 가느다란 목소리였지만 여인이라 하기에는 거칠었다.
얼굴이 궁금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들이 루비츠와 연관이 있는가.
“내 생각을 읽다니 제법이군.”
“부르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의뢰를 하나 넣으려 하네.”
“…….”
“내 동생을 찾아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