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45화 (45/94)

45. 가려진 진실

“슬슬 황궁에 도움을 청해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안 그런가, 자작.”

집무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커다란 강물이 흐르듯 잔잔한 말투였다. 그의 은발 위로 쏟아지는 햇빛만큼이나 따사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전하, 어떤 걸 말씀하시는 건지.”

마른 침을 삼킨 후레이 자작이 한발 다가서자 루카비의 눈동자가 스륵 위로 향했다.

“내 말이 어려웠나, 자작?”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라.”

“…….”

자작이 말끝을 흐리자 루카비가 책상 위로 기울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서류가 툭 책상 위로 떨어졌다. 자작은 마치 제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작을 쳐다보는 루카비의 얼굴이 서늘해졌다.

“계획에 차질이 생긴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전하.”

후레이 자작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마치 그의 머리를 땅에 박으려는 것처럼 성급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지?”

손깍지를 낀 루카비가 의자에 깊이 몸을 묻으며 물었다.

수면 위로 드러나면 안 되기에 오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실행한 계획이었다.

아무리 커다란 나무여도 안에서부터 조금씩 갉아먹어 뿌리를 약하게 만들면 결국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각 영주가 버티다 못해 황궁에 도움을 청하면 그때 자연스레 품어주며 제 편에 서게 할 생각이었다.

귀족들이 전부 제 편에 선다면 크게 피를 보지 않고도 황위에 오를 수 있으니 실로 깔끔하고 훌륭한 전략이었고.

막대한 자금과 시간을 들여 키우고 있는 병력은 물론 무용지물이 될 테지만 말이다.

하지만, 희대의 명군으로 역사에 기록될 수 있다면야 기꺼이 투자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셰바르 경이 내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가 보군.”

지금쯤이면 우는소리를 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서류와 파발들이 황궁으로 쏟아져야 하는 게 맞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죄송합니다.”

부드럽게 입꼬리를 밀어 올리는 루카비의 표정을 본 후레이 자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셰바르를 추천한 것이 바로 자신이었으니 자칫하다가는 제 목이 날아갈까 두려웠다.

“그저 저희의 예상보다 영주들이 버티는 시간이 좀 길어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고귀한 분들이시라 고개를 숙이기에는 아직 목이 뻣뻣하다 이건가.”

루카비가 차게 조소했다.

“자존심만으로 버티기에는 우리도 꽤 많은 공을 들였을 텐데.”

들어간 돈과 시간을 생각하라는 뜻이었다.

“솔직히 말하게, 자작.”

“……최근 각 영지마다 커다란 농장을 운영하기 시작하였는데.”

“농장?”

어떻게든 수습해보려다 실패하고만 자작은 하릴없이 진실을 보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핥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대우가 워낙 좋다 보니 그쪽으로 일손이 몰리고 농장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이가 더 공고해졌다, 이 뜻인가.”

루비츠를 지지하는 세력의 결합을 모래알처럼 무너트릴 참이었다.

그런데 계획이 틀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오히려 루비츠의 지지 세력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된 셈이었다.

“농장이라…… 누구의 생각인가. 나메렌 후작인가?”

“그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농장은 전부 캄파냐 상단에서 운영하는 것이라 합니다.”

“캄파냐? 캄파냐라면 쿠즈네의…….”

‘네, 맞습니다.”

“그저 잠시 자란 잡초인가 했더니, 아니었나 보군.”

쿠즈네의 연락을 받았을 때만 해도 특이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아주 영세한 상단이었다.

카셰이 영감의 변덕인가 싶어 크게 개의치 않고 넘겼더니.

“궁금하군, 잠깐 사이에 그토록 커진 상단이라니. 상단주가 아주 뛰어난 지략가인가.”

“불러들이겠습니다.”

후레이 자작이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그래, 그리고 자작.”

루카비가 굳어버린 자작의 목덜미를 힐끗 내려다봤다.

“앞으로 이렇게 보고가 늦어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어야 할 걸세.”

“네, 명심하겠습니다.”

식은땀이 자작의 옷을 적셨다.

*   *   *

‘왜 망설인 거지?’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몸을 움직인 라벨라가 높은 나무 위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제 손을 펼쳐 가만히 내려 보았다.

찝찝하고 떫은 기분을 떨쳐내려고 한참이나 검을 휘두른 후였다. 꽤 거칠게 움직인 후였는데도 굳은살이 배긴 손은 붉어진 흔적조차 없었다.

그래, 수없이 혹독하게 훈련한 결과였다. 그러니 검을 휘두르면서도 망설임 따위 느낄 리 없었고.

‘그 녀석, 내가 자기를 못 죽일 거라고 확신했지.’

이스카의 여유롭게 웃던 얼굴을 떠올리니 속이 갑갑해졌다. 자신보다 그가 제 마음을 더 잘 아는 모양이었다.

라벨라는 펼쳤던 손을 꾹 말아쥐었다.

언젠가 무척 아끼던 무기 창고 하나가 형제의 손에 넘어가 그 빌미로 협박을 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떻게 했더라? 아, 제 손으로 직접 창고에 폭탄을 던져 넣었다. 몇 년간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모았던 것들이 한순간에 터져 버렸지.

아무리 아끼는 거라 해도, 방해된다면 없애는 게 당연했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스카.’

라벨라의 금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녀석은 모처럼 찾아낸 재미였다.

갈수록 꽤 마음에 들었고, 녀석이 주는 이런저런 즐거움도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언제든 쉽게 놓을 수 있는 거라 여겼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는 관계였으니까.

그랬는데, 망설임이라니.

확신에 찬 녀석의 목소리는 혼자 착각해서 그런 게 아니었다. 제가 그 확신을 심어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하.”

라벨라는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런 건 위험하다. 스스로 약점을 만들 필요는 없지.

임피리아라는 낯선 땅이 주는 평온함에, 잠시 제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나 보다.

라벨라의 시선이 먼 곳으로 올라섰다.

슬슬 놀이는 끝낼 시간이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 그녀의 머리칼을 흐트러트렸다.

*   *   *

“혹시 두 분, 싸우셨습니까?”

이스카의 방을 찾아온 다벨이 우물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아니, 두 분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부니까요. 이러다 얼어 죽겠습니다.”

며칠 내내 냉랭한 두 사람의 분위기에 눈치만 보던 길드원들은 누가 먼저 말을 꺼낼 것인지 내기를 벌였다.

내기에서 진 다벨이 총대를 멘 거였다.

“아아.”

이스카가 픽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청혼했거든.”

“아, 그러셨구나, 청혼하셨…… 네? 청혼이요?”

되묻는 말끝이 높아지다 못해 쨍하고 갈라졌다.

“다벨. 목소리가 너무 큰데.”

“앗, 죄송합니다.”

다벨이 급히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런데, 이스카 님. 지금 농담하신 거죠?”

설마 하며 되묻던 다벨은 차가워지는 이스카의 표정을 보고 금방 하하 웃어버렸다.

“아, 네, 진심이시군요. 그리고 당연히 차이셨겠고요.”

“알면 그 입 좀 다물래?”

“세상에. 정말 지르셨습니까? 뻔히 결과가 보이는 일인데요.”

라벨라는 누가 봐도 한 마리의 야생 동물 같은 사람이었다.

강하고 아름답고 홀로 빛나는 존재.

그런 라벨라가 이스카와 잠시 연애를 즐긴다 한들, 결혼한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을 제 주군이 모를 리 없었다.

“글쎄, 마음이 좀 급했어.”

이스카의 결정에 놀라는 건 똑같았지만 다벨의 반응은 리텔니와 조금 달랐다.

귀족과 황실의 입장에서 라벨라를 바라보는 리텔니와 다르게 라벨라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점이 그랬다.

이게 바로 라벨라의 마력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제 사람으로 끌어들이는 힘.

다벨뿐만이 아니었다. 라벨라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네이트랄 공자는 또 어떻고.

“일단은 옆자리만 사수하면서 버티려고 했는데.”

그러다 보면 언젠가 진심으로 라벨라의 마음속에 박힐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녀가 뽑아내려 해도 쉽게 뽑아낼 수 없을 때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스카가 짜증 섞인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라벨라의 입에서 이별이 너무도 쉽게 나온 탓에 불쑥 내지른 셈이었다.

흔들리는 라벨라를 확인했으니 성공적인 승부수였다 여겼는데, 그 충동적인 선택은 제 인생에서 다시없을 최악의 한 수가 됐다.

그 밤 이후, 라벨라는 자신을 버리기로 한 것 같았다.

평소처럼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어주지도 않았고, 불필요한 대화 외에는 말도 섞지 않았다.

“차이신 것 같은, 윽!”

태연하게 상황을 결론지은 다벨이 정강이를 움켜쥐었다.

“아직 그런 말은 한마디도 못 들었거든.”

“꼭 말로 해야 아는 겁, 윽!”

“리텔니에게 안 좋은 것만 골라 배웠구나.”

허리춤에 손을 얹은 이스카가 서늘하게 읊조렸다.

“리텔니가 그렇게 입을 놀렸을 때 어떻게 되는지는 말 안 해준 모양이야.”

“괜히 저한테 화풀이하지 마시고 가서 싹싹 빌어 보시든가요.”

두 번이나 얻어맞은 탓에 눈물이 고인 다벨이 투덜거리며 입을 비죽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야.”

“…….”

싱긋 웃어주더니 밖으로 휙 나가버리는 주군의 뒷모습을 보며 다벨은 욕설을 삼켜야 했다.

“이스카. 일찍 좀 다녀.”

뒤늦게 회의 장소에 모습을 드러낸 이스카에 아르젠이 인상을 찌푸렸다.

“미안.”

“다벨은?”

“내려올 거야.”

일행이 라벨라와 이스카를 번갈아 보며 분위기를 살피는 게 느껴졌다.

어깨를 으쓱한 이스카가 창가에 선 라벨라에게 시선을 옮기자 그녀는 표정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역시나 웃어주지도 않는다.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리면서 눈을 가늘게 뜨던 라벨라 특유의 미소를 떠올리니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이스카가 씁쓸함을 삼키며 자리를 잡을 때였다.

입을 열려던 라벨라가 창문을 톡톡 두들기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창문을 열어주니 기다렸다는 듯 새 한 마리가 방 안으로 날아가 아르젠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토라에게서 온 거야.”

“토라?”

“황궁으로 가게 됐다는데.”

“!”

라벨라의 팔짱이 스르르 풀렸다.

그녀의 시선이 이스카에게 흘러갔다.

며칠 만에 마주하는 금안에 이스카가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   *   *

상상보다도 훨씬 거대하고 큰 황궁의 앞에 선 토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토라, 언젠가 황궁에서 상단을 불러들일지도 몰라.”

“예에? 황실이요?”

“황궁이 아니어도 상관없어. 의아할 정도로 높은 신분의 사람이 상단을 찾거나, 혹은 특이하게 만남을 청한다 싶은 그런 상황이 오게 되면 꼭 내게 알려.”

‘대체 라벨라 님은 어디까지 내다보신 걸까.’

솔직히 반쯤은 흘려들었던 것 같다.

라벨라에게 은혜를 갚고 싶은 마음에 깜냥도 안 되지만 상단주의 역할을 맡은 그였다.

제가 평생에 황궁에 들어가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도 없었다. 막상 현실로 닥치니 심장이 쿵쾅대다 못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황궁에서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구일까.

‘나는 캄파냐 상단의 상단주다. 똑똑하고 현명하고 과감한 상단주야.’

라벨라가 제게 주입한 대로 다시 한번 주문을 외며 마음을 다독인 토라가 눈을 부릅떴다.

이미 네이트랄 공작처럼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귀족도 만난 그였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열심히 다 잡은 토라의 자신감은 오래 지나지 않아 나락으로 떨어졌다.

‘세, 세상에…….’

“그대가 캄파냐 상단의 주인이라고?”

황궁의 어느 고위 귀족이 불렀을까 했는데, 부른 이가 황태자일 줄이야.

“네, 그렇습니다.”

공손하게 허리를 숙인 토라는 목소리가 떨리진 않았는지 되짚어야 했다.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요즘 그대의 상단 이름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에 궁금해서 한번 보고 싶었을 뿐. 앉으시죠.”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루카비가 먼저 소파에 앉은 뒤 토라에게 자리를 권했다.

황태자와 독대라니. 심지어 자신을 대하는 황태자의 태도는 무척 정중했다.

토라는 화려한 집무실의 광경에 압도되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했다.

토라가 자리를 잡으니 그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이 놓였다.

낯설고 좋은 향기에 토라는 제가 평생 가도 구매할 수 없는 고가의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흐응, 의외군요.”

“…….”

다리를 꼬아 앉은 루카비가 순박한 얼굴을 지켜보다 빙그레 웃었다.

“공격적인 전략을 취하기에 어떤 이인가 궁금했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다르지 않나.

“카셰이 영감의 마음을 얻다니.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요.”

“그저 운이 좋게 인연이 닿았을 뿐입니다.”

“아하, 그 ‘쿠즈네’의 무기를 그저 운으로 얻으셨다?”

루카비가 놀리듯 토라의 말꼬리를 잡았다.

“아, 그것이.”

“농담입니다.”

루카비가 소리 내 웃으며 분위기를 유순하게 풀었다.

“제국의 모든 대장간을 손에 쥐었다 들었는데.”

“하하, 신생 상단이 가장 빠르게 큰돈을 벌 방법이 그뿐이라…….”

토라는 라벨라가 가르쳐 준 대로 대답했다.

“장인들을 설득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본디 철을 다루는 이들이란 고집이 세기 마련이니.”

“설득하는 데 애 좀 먹었습니다.”

“하긴, 설득한 사람은 따로 있었을 테니.”

“…….”

토라는 황태자의 말의 뜻을 생각하느라 눈을 끔벅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까요?”

루카비가 토라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그대의 진짜 주인은 어디에 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캄파냐의 진짜 주인은 누구냐 묻는 겁니다.”

황태자는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토라는 어쩐지 등허리가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