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위험한 발언
“역시 밥은 양념이 좀 들어가 줘야 한다고. 며칠 내내 불에 구운 고기만 먹었더니 질리려던 차였거든.”
어마어마한 식사량을 보여 준 페시니가 만족스럽게 배를 퉁퉁 두들겼다.
길에서 먹고 자는 건 키르아에게 당연한 일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도 맛있는 식사와 편안한 잠자리가 있는 여관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래도 요즘은 다벨이 있어서 그런가, 야영지의 식사도 꽤 먹을 만한데?”
칭찬에 인색한 아르젠이 웬일로 다벨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웃었다.
“이거, 요리 연습을 좀 해야 하는 건가요?”
“하겠다면 말리진 않을게. 자, 다벨. 네 방은 저쪽.”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일행이 2층 복도에 이르자 아르젠이 익숙하게 각자의 방 위치를 일러주었다.
“대장은 저기 안쪽 방으로 가면 돼.”
“고생했어. 다들 쉬어.”
짧게 작별을 고한 라벨라가 몸을 돌렸을 때였다.
“이스카 너도 대장과 같은 방.”
칸피덴이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아르젠이 편안하게 말을 덧붙였다.
“뭐?”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라벨라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우리가 그렇게 눈치 없는 사람들은 아니잖아. 일부러 제일 먼 방으로 잡았어.”
아르젠이 걱정 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노골적인 아르젠의 배려에 라벨라의 얼굴은 떫은 감을 씹은 것처럼 변했고, 의외의 감동을 받은 이스카는 입가를 가려야 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라벨라에게 보였다가는 따가운 눈총을 받을 게 분명했다.
세심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을 것 같은 녀석들이 이렇게까지 생각해 줄 줄이야.
이스카는 후에 따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리라 다짐했다.
“싫어, 쟤 방 따로 잡아. 그리고 아르젠, 앞으로 이런 쓸데없는 짓 하지 마.”
“정말?”
단호한 명령에 아르젠이 의아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럼 가짜겠어?”
저절로 뾰족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저 녀석과 같은 방을 쓰라고? 편안한 잠자리를 포기해야 할 미래가 훤히 그려졌다.
저 순진한 얼굴로 또 얼마나 사람을 귀찮게 할지 뻔히 보이는데.
라벨라의 서늘한 눈동자가 이스카에게로 옮겨졌다.
“쟤랑 같이 자면 계속 달려들…… 읍!”
“하하,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황급히 라벨라의 입을 막은 이스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내 방은 내가 알아서 잡을게. 신경 쓰지 마.”
“…….”
아르젠이 이스카와 그의 품에 갇힌 라벨라를 번갈아 봤다.
“읍읍.”
라벨라가 당장 이 손을 치우지 않으면 물어뜯겠다는 눈빛으로 노려봤지만 이스카는 꿋꿋하게 버텼다.
저런 대장과 연애라니, 이스카 녀석의 용기가 가상했다.
“그럼 알아서들 해.”
그래, 연인 사이의 일에 괜히 끼어드는 게 아니지. 피곤한 건 질색이었다.
관심을 끈 아르젠이 방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이스카는 라벨라의 입을 막았던 손을 떼어냈다.
“윽.”
라벨라에게 옆구리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건 당연지사였다.
“뭐 하는 짓이야?”
“당신이 너무 위험한 발언을 하려고 하니까 그렇지.”
“하?”
라벨라가 아무리 숨기는 게 없다 한들, 두 사람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키르아 녀석들에게 알리고 싶진 않았다.
연인이 됐다는 걸 밝힌 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녀석들에게 라벨라는 그저 키르아의 대장, 그 존재로만 보였으면 했다.
누군가의 연인이 된 라벨라를 상상하게 하는 것도 싫었다. 라벨라의 사랑스러움은 혼자만 알고 싶었으니까.
아, 이 지독한 독점욕이라니. 이스카는 저 자신에게 혀를 내둘러야 했다.
“난 키르아 대장의 위신을 지켜주고 싶거든.”
이스카는 본심 대신 뻔뻔한 핑계를 꺼내 들었다.
“위신?”
팔짱을 낀 라벨라가 비스듬히 섰다. 그녀의 눈빛도 덩달아 삐딱해졌다.
“너.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내가 누구와 무얼 하든, 그런 걸로 내 위치가 흔들릴 것 같아?”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지.
이스카는 대답 대신 눈만 끔뻑였다.
정말이지, 제 위치와 매력을 너무 잘 아는 여자였다. 그래서 참 곤란했다.
질투하느라 바빠질 제 미래가 뻔히 그려지는 것 같아서 한숨이 절로 나오려 했다.
* * *
“주인장, 이 마을은 어디 용병 구하는 상단 없소?”
식당에 자리한 페시니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는 사내를 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상단? 글쎄?”
식당 주인이 페시니의 거대한 몸을 힐끔 본 뒤에 턱을 문질렀다.
“여기는 상단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는 곳인데.”
“아니 이렇게 큰 마을에 상단도 없단 말인가.”
“구석진 곳이니까, 상단이 거점으로 하기에는 위치상 별로잖소. 뭐 가끔 거래하러 오는 상단이 있는 정도지. 일자리를 찾나 보오?”
페시니를 딱하게 본 주인장이 혀를 끌끌 찼다.
“저 아래 지역으로 가보시오. 농장이 새로 생겼는데 사람을 많이 구한다더군.”
“아아, 고맙소.”
페시니가 머리를 긁적이고는 고깃덩이를 집어 들었다.
‧
“유령 상단이라더니, 진짜 흔적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오즈벳 상단에 대해 아는 자도 없고.”
“마을에 가끔 들어오는 상단도 거래라기보다는 물물교환에 가까운 수준이고.”
각기 흩어져 각자의 방식대로 정보를 수집한 일행들이 물어 온 것들을 공유했다.
“대장, 거짓 정보에 낚인 거 아니야?”
“그건 아니…….”
아르젠의 질문에 고개를 내저으려던 라벨라가 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손길에 긴장감이 섞인 게 느껴졌다. 일행들은 제각기 무기로 손을 뻗었다.
“그, 성에서 사람을 찾는다고 해서요, 여행객 전부 조사 중이랍니다.”
다벨이 문을 열어주자 굳은 얼굴의 주인장이 양해를 구해왔다. 일행은 일단 태연한 척 무기에서 손을 뗐다.
“잠시 실례 좀 하겠소.”
주인장의 뒤로 완벽히 무장한 기사 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저 그런 사병이 아니라는 건 체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설마 상단을 조사한 것 때문에?”
꼬리를 잡힌 걸까.
마을을 헤집고 다닌 건 맞지만, 키르아의 그 누구도 제 흔적을 허투루 흘리고 다닐 녀석은 없었다.
아직 어리숙한 무트라면 모를까. 하지만 무트는 오늘 얌전히 아르젠을 따라다닌 참이었다.
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다들 다음에 벌어질 일을 예상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단 한 사람, 이스카만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는 칸피덴을 지켜봤다.
“여기 있군.”
기사들의 시선이 일행을 주르륵 훑다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기사들의 시선을 따라 일행의 고개도 함께 돌아갔다.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저희를 따르시는 게 조용히 끝날 거라는 거 아실 겁니다.”
공손한 듯 보이는 말투지만 고압적인 자세였다. 칸피덴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로 그러는 거죠?”
“괜찮아, 다녀올게.”
칸피덴이 팔을 뻗어 제 앞으로 끼어들려는 아르젠을 막았다. 그리고 그가 라벨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라벨라의 손끝이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았다.
라벨라의 눈을 보며 칸피덴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다녀올게.”
평소처럼 묵묵하게 말한 그가 기사들과 함께 사라졌다.
“뭐야?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건데?”
아르젠이 어이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칸피덴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보자.”
라벨라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자리를 정리했다.
‧
창밖으로 조용히 빠져나온 라벨라가 지붕 위로 막 올라갔을 때였다.
“이럴 줄 알았지.”
라벨라는 머리 위로 떨어지는 목소리에 휙 고개를 틀었다.
“왜 여기 있어?”
라벨라는 방글거리는 이스카를 보며 헛숨을 뱉었다.
“당신이 나올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
회의를 파하는 라벨라의 표정을 보면서 그녀의 다음 행동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다.
“흥.”
이스카에게 생각을 읽힌 게 불쾌하면서도 묘하게 나쁘지 않았다.
“칸피덴에게 가려는 거지?”
“뭐, 그냥.”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하, 윽.”
“적당히 해.”
놀리듯 말끝을 늘이는 이스카의 옆구리를 퍽 때린 라벨라가 눈을 흘겼다.
“그냥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게 어때?”
옆구리를 부여잡은 이스카가 웃음을 흘리다가 금방 진지해진 얼굴로 물었다.
“네가 녀석의 편을 드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음.”
이스카가 입술을 말아 물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가서 보고 판단할게.”
“알았어.”
라벨라가 걸음을 옮기자 이스카도 슥 그 뒤를 따랐다.
“뭐야?”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거지.”
“흥.”
이스카의 뻔뻔한 말에 라벨라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았다. 어차피 산책 삼아 가보는 거니 이스카가 함께 간다 해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 * *
“성으로 가는 게 아니군.”
“이미 다 알고 따라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칸피덴의 혼잣말에 곁에 선 기사 하나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말투만 예의를 차렸을 뿐, 바라보는 눈빛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굳이 멸시를 숨기려조차 하지 않는 태도였다.
‘총 열, 아니 열다섯이군.’
저를 에워싸고 있는 기사의 수를 확인한 칸피덴이 비소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여차하면 달려들 기세로 따라오는 인원들도 있으니 자신 하나를 데려가기 위한 것 치고는 과했다.
기사 무리가 칸피덴을 데려간 곳은 커다란 저택이었다. 영주의 성에 비한다면 초라하지만, 축적된 부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한 규모였다.
“오셨군요. 들어가시죠.”
화려한 오브제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 2층 복도 끝으로 가니 수염이 하얗게 센 낯익은 얼굴이 허리를 숙였다.
꽤 늙어버린 얼굴을 힐끔 본 칸피덴은 그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퍽 음산하게 들렸다.
“용감하구나. 제 발로 뛰쳐나갈 때는 언제고 이곳에 다시 기어들어 올 생각을 하다니.”
책상에 앉은 남자가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조소했다.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끌고 오신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활개 치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있나.”
“그래서 저리 많은 인원을 보내셨습니까? 고작 저 하나 잡자고.”
“마을이 시끄러워지는 건 질색이다.”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칸피덴의 대꾸에 처음으로 남자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야 도망친 것이 후회되는 모양이지?”
사내가 오만하게 웃었다.
칸피덴은 제 것과 똑같은 남자의 눈동자 색을 보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 남자의 것은 무엇 하나 물려받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리가요. 그저 확인하고 싶었던 게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
“오즈벳 상단.”
칸피덴이 내뱉은 단어에 사내가 몸을 뒤로 기울이며 두 손을 모았다.
“맞군요.”
칸피덴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토록 잔인한 인신매매도, 평범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도적 떼도. 모두 제 아버지의 손에서 이루어진 거였다.
“배후가 누구입니까?”
변방의 한미한 기사 집안에서 독단적으로 꾸밀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그만 네 자리로 돌아와. 이번 일은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다.”
가진 거라고는 기사 작위뿐인 최하위 귀족. 그는 늘 상급 귀족으로 발돋움하길 꿈꾸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미천한 피를 가진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아비가 천한 여인을 탐해 가진 서자.
셰바르의 유일한 적자인 그의 이복형은 안타깝게도 셰바르의 피와는 거리가 먼 병약하고 유약한 이였다.
그리고 칸피덴은 대대로 기사 집안인 셰바르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타인의 시선과 체면을 중시하는 셰바르가 제 아들이라 내세울 수 없는 존재인데도.
“네 형의 그림자로 살아야지, 그게 네 운명이다.”
“…….”
칸피덴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운명을 거부하려고 이 집안을 떠난 거였다.
* * *
“너, 뭘 알고 있는 거야?”
“안다기보다는 그냥 눈치가 빠른 걸로.”
칸피덴이 향한 곳을 확인한 라벨라는 저택 안으로 잠입하는 대신 물러나는 걸 선택했다.
영주의 성으로 간 게 아니었으니 키르아와 관련된 문제는 아닌 듯했다. 이스카가 기다리라며 말렸던 것도 생각이 났고.
“마음에 걸려?”
고개를 숙인 이스카가 라벨라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심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는 건 질색이야.”
“당신도 알잖아, 녀석이 당신을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거.”
라벨라가 그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알면서도 자신의 입으로 콕 집어 이야기하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왜?”
이스카는 가만히 멈춰 서서 제 얼굴을 빤히 보는 라벨라에 눈썹을 들어 올렸다.
“상당히 여유롭네? 칸피덴의 편을 다 들어주고 말이야.”
“하, 나 지금 주먹 쥔 거 안 보여?”
“보여.”
“알면 그냥 모르는 체 넘겨주지 그래. 꼴사나운 모습은 나도 보여주기 싫거든?”
라벨라가 투덜거리는 이스카의 목을 부드럽게 휘어 감았다.
“솔직히 말해 봐.”
라벨라의 입술이 이스카의 볼에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너, 뭘 알고 있어?”
제가 모르는 칸피덴의 무언가를, 이스카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
이스카의 턱 아래를 슬쩍 문지르려는 찰나, 순식간에 품에서 빠져나간 이스카가 저만치 멀어졌다.
“하아?”
미간을 찌푸리고 노려보자 이스카가 빙긋 웃었다.
“궁금하면 그 녀석에게 직접 듣도록.”
이스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며 손을 흔들었다.
“이래 봬도 내가 입은 무거운 남자라서.”
약 올라하는 라벨라를 보며 손 키스를 날린 이스카가 윙크를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