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멍멍, 충견입니다
“왜, 왜 둘이 그러고 있어?”
얼마나 놀랐는지 페시니의 단춧구멍 같은 눈이 동그란 단추 크기만큼 커졌다.
“?”
페시니의 질문에 아직 졸음이 가득한 라벨라의 찌푸린 눈이 이스카에게 향했다.
밤새 제게 긁히고 물려 엉망이 된 상체가 햇빛 아래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부드럽게 웃은 이스카가 부스스하게 일어난 백금발 몇 가닥을 가만히 빗겨주었다.
실로 다정한 행위였다.
“저, 저, 저!”
그 모습에 페시니가 씩씩댄 건 물론이었다.
“아, 뭐, 그렇게 됐어.”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옮긴 라벨라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한 뒤 하품을 했다.
“어쨌든, 시끄러우니까 그만하고 들어와. 나는 좀 더 자야겠으니까.”
라벨라가 명령을 툭 던지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스카는 침대 안으로 꾸물꾸물 기어들어 가는 라벨라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니까, 라벨라는 둘의 사이를 숨길 생각 같은 건 없는 모양이었다.
이 관계를 얼마든지 드러내도 좋다고 행동으로 허락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건 또 예상치 못한 거라 꽤 놀란 이스카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이스카는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이쪽을 보는 눈동자들을 하나하나 마주치며 싱긋 웃었다.
굳어버린 채 고개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칸피덴만 제외였다.
“그런 고로, 적당히, 눈치껏, 잘 부탁해?”
“너, 너, 너!”
게거품을 물고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간 페시니가 결국 뒷목을 잡았다.
‧
“어흐, 시원하다.”
고깃덩이를 뜯어 우물대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페시니가 손등으로 입을 훔쳤다.
“역시 장거리 이동 후에 마시는 술이 꿀맛이지. 주인장, 여기 한 잔 더 주쇼.”
남은 술을 한 번에 들이킨 페시니가 쾅 소리가 나도록 잔을 내려놓았다.
“아, 깜짝이야.”
“하, 그나저나 말이야.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될 줄이야. 아르젠, 너는 알았어?”
페시니가 미간에 주름을 만든 아르젠을 보며 물었다.
“글쎄, 그냥…….”
“가만 생각해 보면, 의외로 괜찮은 조합이란 말이지.”
“아까 게거품 문 건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흥, 우리 대장을 아무 녀석에게나 내줄 수 있나.”
마치 소중한 딸을 지키는 아비와 같은 태도였다.
“그 말, 대장 앞에서도 해보시지 그래.”
“크흠,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라도 태어난다면 굉장한 녀석이겠어.”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뀌셨나? 응?”
“생각해 봐. 강한 부모 밑에서 강한 아이가 태어나지 않겠어? 그럼 키르아는 대대손손 아주 강한 대장을 갖는 거지.”
페시니가 수염을 쓸면서 상상하는데, 맞은편 대각선에 앉아 있던 칸피덴이 슥 몸을 일으켰다.
“어, 더 안 드십니까?”
“편히 먹어.”
무트가 동그란 눈으로 묻자 칸피덴이 짧게 대꾸해준 뒤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이 눈치 없는 자식.”
“내가 뭘?”
아르젠이 목소리를 낮추며 페시니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지만, 페시니는 머리를 긁적거릴 뿐이었다.
“됐다, 내가 너랑 무슨 이야기를 하겠냐.”
“뭐야, 날 바보 취급하는 거야?”
식당에서 들려오는 대화 내용을 못 들은 척하며 계단을 오르던 칸피덴은 하필 계단을 내려오던 이스카와 정면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
“…….”
“쉬어.”
침묵 끝에 이스카가 빙긋 웃었다. 무공해할 정도로 청량한 미소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구는 녀석의 태도에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어차피 둘 다 웃을 수 없는 경쟁이었다. 게다가 라벨라에게 마음을 표현할 시도조차 한 적 없었고.
라벨라의 선택이 그러하다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칸피덴은 고개만 끄덕여주고 마저 걸음을 옮겼고, 이스카는 칸피덴을 지나 식당으로 향했다.
* * *
‘손끝에서부터 긴장을 풀고.’
침대에 편안하게 누운 라벨라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몸속 혈관의 흐름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되려나.’
라벨라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몸의 감각을 일깨워보려 애썼다.
“아, 어렵네.”
몇 번의 시도 끝에 눈을 반짝 뜬 라벨라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마력을 운용하기 위한 훈련을 시도해보는 중이었다.
그동안 이스카가 철썩 붙어 있어 도통 짬이 안 났는데, 이제는 키르아 녀석들이 왔으니 혼자 연습해 볼 기회도 많아질 터였다.
‘흥, 할 수 있어.’
입술을 비죽이며 손바닥을 내려 본 라벨라가 다시 한번 드러누웠다.
분명히 제 몸에 흐르고 있는 거니 스스로 통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고 낯선 개념이라 시간이 좀 걸릴 테지만 어떻게든 해내고 싶었다.
그래야 이곳, 임피리아로 온 보람이 하나 더 늘어날 테니까.
‘근육을 쥐어짜는 느낌이려나.’
온몸에 힘을 주다가, 다시 몸 안의 혈관을 세어 보는 느낌으로 집중을 하다가.
라벨라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며 몸 안의 마력을 느껴보려 애썼다.
‘아, 전의 그 울렁거리던 느낌!’
새로운 방법을 찾아낸 라벨라가 품에 지니고 있던 팔찌를 빼내 멀찌감치 두고 침대로 돌아왔다.
팔찌를 빼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몸 전부가 뒤틀리는 듯, 내장이 꼬이는 것 같은 울렁거림이 시작됐다.
‘좀 이상하긴 해.’
쿠즈네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심한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었다.
라벨라는 의아해하면서도 몸 안의 감각에 집중했다.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게 몸 안에서 탁구공처럼 튀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걸 잡아본다고 생각하면…….’
라벨라의 모든 집중력이 한 곳으로 응집되던 찰나,
“라벨라, 아직도 자?”
벌컥 문이 열렸다.
“…….”
“음?”
문가에 선 이스카는 죽일 듯 노려보는 사나운 눈길에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방어 태세를 갖췄다.
“뭐야, 뭐 하고 있는 건데?”
“……아무것도 아니야. 녀석들은?”
미심쩍은 눈빛에 라벨라가 화제를 돌렸다.
“술판을 벌이는 중. 안 내려가 볼 거야?”
“뭐하러, 또 취해서 귀찮게 들러붙을 텐데.”
머리를 쓸어 넘긴 라벨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팔찌를 집어 들었다.
“왜?”
제게로 고정되어 따라다니는 시선에 라벨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당신과 내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뭐?”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데.”
“한가하니까 별 시답잖은 소리를.”
쯧, 혀를 찬 라벨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왜? 솔직히 나도 궁금한데.”
설렘이 묻어나는 이스카의 목소리에 제 배를 내려다 본 라벨라가 픽 비소를 흘렸다.
‘임신이라.’
지금까지 먹어댄 독이 얼마인데. 강한 내성을 얻은 대신 잃은 것도 분명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에게 필요한 능력은 아니었으니 잃었다고 하기엔 안 맞는 표현이었지만.
“꿈 깨.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니까.”
이스카를 정면으로 마주 본 라벨라가 생긋 웃었다.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이리 와.”
하얀 손가락 끝이 까딱까딱, 느리게 움직였다.
* * *
슬슬 날이 밝아오는 새벽녘.
창가에서 뽀로롱 우는 새 소리가 들렸다.
“응?”
몸속의 마력을 잡아보려 애쓰던 라벨라가 창문을 열자 작은 새 한 마리가 날아 들어왔다.
라벨라의 손가락 위에 내려앉은 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라벨라를 보다가 다시 침대 위의 이스카에게로 파드득 날아갔다.
“흐음.”
총총거리는 움직임에 날카로운 발톱이 맨 어깨를 쿡쿡 밟아대자 통증에 꿈틀하던 이스카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새의 머리를 손가락 끝으로 쓰다듬어 준 이스카가 빠르게 전달된 소식을 확인했다.
“리텔니가 보낸 거지?”
궁금해진 라벨라가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왔을 때, 이스카의 눈동자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나 또렷해진 상태였다.
“라벨라.”
“왜, 뭐라는데?”
“배후의 꼬리를 잡았다는데.”
느긋하게 몸을 늘어트리고 있던 라벨라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래?”
투명한 금안에 반짝하고 이채가 돌았다.
‧
“아, 대장. 아직 해도 안 떴어.”
“밝아졌잖아, 그럼 아침이지.”
“어제는 하루 종일 놀게 두더니 이러기야?”
“어제 놀았으니까 오늘부터는 움직여야지.”
“독재자, 심술쟁이.”
“……아르젠.”
“마지막 말은 취소.”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깬 아르젠이 입을 앙다문 채 라벨라의 뒤를 따랐다.
“다 모였지?”
일행이 묵는 방에서 제일 큰 곳으로 향한 라벨라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을 차례로 훑었다.
농장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할 때라 길드의 의뢰 수도 대폭 줄이고 주요 인원들을 다 불러 모은 참이었다.
“농장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겼어.”
라벨라가 닫힌 문에 기대어 선 채 팔짱을 꼈다.
“프롬쉘에서부터 우리가 쫓던 녀석들, 흔적을 잡아냈어.”
“뭐야? 난 그 놈들 당장 족치러 가야겠어!”
페시니가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이며 도끼 손잡이를 부러트릴 것처럼 움켜쥐었다.
“일단 정체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야.”
건드려도 될지 말지, 판도라의 상자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가서 확인해보면 알 일이었다.
“그런데 대장, 우리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아르젠이 영 찝찝하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사실, 인신매매든 도적떼든 우리는 우리 농장만 지키면 되는 거 아닌가?”
“그 말도 일리가 있긴 한데.”
라벨라가 충분히 예상한 지적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내가 거래를 했거든. 좀 더 먼 미래에 키르아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라벨라가 턱을 문지르며 사랑스럽게 웃었다.
“거래? 누구와?”
“루비츠 황자.”
“!”
길드원들의 놀란 눈이 모두 라벨라에게 날아와 고정됐다.
그 안에는 물론 이스카도 포함이었다.
“미래의 황제에게 미리 연줄을 만들어 놓는 거라고 해야 할까?”
“뭐?”
황실이고 뭐고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지만, 라벨라가 상당히 위험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임피리아 제국은 황실에 대한 충성도가 높은 곳이니까.
“그러니까, 황태자가 아니라 루비츠 황자라고?”
아르젠이 재차 확인했다.
“후, 그냥 날 믿고 따라오면 안 되겠어? 어차피 자세히 알려 줄 마음도 없거든.”
“아니, 대장…….”
아르젠이 이마를 짚으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이의 있어?”
아무리 못된 말을 해도 그녀는 라벨라였다.
키르아 모두가 아끼고 믿고 따르는 유일무이한 대장.
“아니, 없어.”
이구동성의 대답이 떨어졌다.
“그럼 대장, 우리 이제 어디로 가는 거야?”
깔끔하게 받아들인 아르젠이 다음을 물었다.
“바랍스.”
“…….”
지명을 들은 칸피덴의 손이 움찔 떨렸다.
* * *
“라벨라, 공기가 차니까 걸쳐.”
“조금만 더 먹는 게 어때?”
“아, 씻고 싶다고?”
모닥불 주변에 한데 모여 앉은 키르아 일행의 고개가 이스카의 움직임을 따라 왔다 갔다 했다.
이스카는 마치 수발을 드는 사람처럼 한시도 라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개다.”
“개군.”
“개 같죠?”
“…….”
페시니, 아르젠, 다벨이 돌림노래처럼 결론을 내렸다.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었던 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아무리 봐도 졸졸 쫓아다니는 꼴이 주인에게서 잠시도 떨어지려 하지 않는 커다란 개였다.
“이스카 녀석도 대장 앞에서는 어쩔 수 없구만.”
페시니 흡족하게 웃으며 배를 퉁퉁 두드렸다. 조금 마음에 차지 않는 녀석이어도 원래 내 딸을 아끼면 또 달리 보이는 법이었다.
‘리텔니 님이 본다면…… 어휴.’
다벨은 혼자 보기에 아까운 광경이라 안타까워했다.
“!”
제각기 다른 마음으로 이스카를 바라보는데 문득 시선을 느낀 이스카가 고개를 휙 돌렸다.
라벨라 앞에서 꼬리를 내린 강아지 같던 눈빛이 날카로운 산짐승의 것으로 바뀌는 과정이 또렷이 보였다.
“뭘 봐?”
“그냥, 행복해 보이신다고요. 네, 마치 충견 같고요.”
구경났냐고 묻는 눈빛에 다벨이 자기도 모르게 변명했다.
“이스카, 뭐 해.”
형형하던 눈빛이 금세 사르르 녹더니 성큼 라벨라를 뒤따른다.
“밸도 없는 녀석.”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태세네요.”
“아주 잘하고 있어, 이스카.”
혼자만 다른 의견을 내는 페시니에게 나머지 일행의 시선이 몰렸다.
뒤에서 제 얘기를 뭐라고 하고 있든, 이스카의 관심은 온통 라벨라에게 향해 있었다.
이스카는 근처의 샘을 찾아가는 라벨라를 따라 성큼성큼 걸었다.
“라벨라.”
“응?”
“칸피덴 녀석, 어느 지역 출신인지 알아?”
“글쎄? 용병들끼리는 보통 그런 거 묻지 않잖아?”
“그렇지.”
“왜?”
“그냥.”
이스카는 어깨를 으쓱이고 말았다.
사실, 바랍스 이야기가 나올 때 칸피덴의 표정이 어두워지던 게 좀 마음에 걸렸다.
이동하는 내내도 유독 말이 없어졌고.
그저 라벨라와 제 사이 때문이라고 보기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다.
“흠, 라벨라. 리텔니도 불러들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은데.”
“아하, 키르아 녀석들은 못 믿겠다?”
“왜 이래. 나도 키르아 소속인 거 잊었어?”
발끈하는 이스카에 라벨라가 픽 웃었다.
“네 지지 세력의 규합을 공고히 하는 게 리텔니의 주 임무잖아. 귀족 나리는 귀족 나리대로 할 일이 있는 법이고.”
“…….”
“이런 지저분한 뒤처리야말로 키르아의 일이지.”
“라벨라.”
이스카가 불쾌함을 드러내려 하자 라벨라가 곧장 이스카에게 입을 맞췄다.
음미하듯 꾹 눌러 안까지 훔치고 떨어진 라벨라가 키득거리자 이스카는 그만 헛숨을 토해내고 말았다.
“하, 사람을 아주 가지고 놀지?”
“그래 보여? 그럼 앞으로 하지 말까?”
“당신을 어떻게 이기겠어.”
복수하듯 손을 뻗어 양 볼을 꾹 누른 이스카가 다시금 입을 맞춘 뒤 웃었다.
사실, 평생 못 이긴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옆에서 웃는 걸 볼 수만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