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38화 (38/94)

38. 넌 내 거니까

역시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영애의 얼굴에 미심쩍은 의구심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귀찮게 됐네.’

이스카에게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지만, 영애의 앞이었다.

라벨라가 경고하듯 이스카를 지그시 노려봐주고는 휙 몸을 돌렸다.

새침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에 이스카의 소리 없는 웃음이 뒤따랐다.

*   *   *

똑똑.

“네.”

무기를 손질하던 라벨라가 고개를 돌렸다.

“라벨라 님. 성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성에서요?”

영주에게 일정이 있는 탓에 모처럼 부지 시찰을 나가지 않는 날이었다.

“네, 피아체 님께서 함께 티 타임을 갖고 싶으시다고요.”

“이스카는요?”

항상 이스카만 부르더니 갑자기 왜?

라벨라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금방 내려갈게요.”

번뜩 전날의 일이 떠올랐다.

영애 앞에서 보란 듯이 저를 안아 옮긴 이스카의 행동.

이유를 짐작한 라벨라가 팍 인상을 쓰려다 말고 가까스로 표정을 관리했다.

소식을 전한 이는 제 수하가 아니라 엄연히 이스카의 수하였으니까.

“왔어?”

빠르게 옷을 바꿔 입고 계단을 내려가자 층계 손잡이에 기대어 서 있던 이스카가 벙글거리며 팔짱을 풀었다.

“……야.”

라벨라가 분노를 억누르며 눈을 치켜뜨자 이스카가 웃으며 몸을 숙여 왔다.

라벨라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이스카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중요한 거래라며? 그러니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며?”

“…….”

제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이스카에 반박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함께해야지. 그래야 성공 확률도 높아지지 않겠어?”

이런 귀찮고 번거로운 일을 혼자 할 수는 없다며 중얼거린 이스카가 싱그럽게 웃었다.

하지만 라벨라의 눈에는 실로 심술 가득한 사악한 미소로 보일 뿐이었다.

그리고 피곤한 하루가 될 거라는 라벨라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두 분은, 굉장히 친밀해 보여요.”

이스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영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영애가 내내 이 질문을 언제 꺼낼까 고민했다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함께 있는 동안 이스카와 라벨라를 번갈아 보며 유심히 관찰해대는 게 빤히 보였으니까.

‘한마디로 무슨 사이인지 확실하게 답하라 이거네.’

“어머, 그런가요.”

라벨라는 영애의 투명하기 짝이 없는 경계심을 짐짓 모르는 체하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루 종일, 이스카가 영애에게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녀석이 일부러 제게 보란 듯이 시위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하여간, 여우 같기는.’

당신 뜻대로 나 혼자 영애의 비위를 맞추느라 힘들었으니 너도 내 심술쯤은 감당하라는 뜻이겠지.

아는데도 솔직히 불쾌했다.

지금도 그랬다.

확인받고 싶어 하는 영애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괜히 짜증이 샘솟았다.

‘저 녀석은 지금 내 것이고, 나는 내 것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거 싫거든.’

그렇게 말하면 끝이거늘, 차마 입 밖으로 뱉을 수가 없었다.

그랬다가는 훗날 녀석의 든든한 뒷배가 돼 줄 영애를 잃게 될 테니.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배려였다.

그러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귀찮은 고민을 하게 만든 이스카에게.

‘멍청하게 자기를 배려해주는 건 줄도 모르고. 두고 보자, 이스카.’

라벨라는 이를 으드득 간 뒤 싱긋 웃어 보였다.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은 동료이지요.”

영애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지는 것과 다르게 문밖에 서서 라벨라의 대답을 기다리던 이스카의 표정은 서늘하게 굳었다.

‘동료라, 허.’

미안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럴지 몰라도 나한테는 아니야.

뭐, 그래도 신뢰가 쌓였다는 말은 나름대로 마음에 드네.

이스카의 입술 끝이 나른하게 올라섰다.

*   *   *

“알겠으니까 이쯤에서 정리하자.”

라벨라의 항복 선언은 영애와 꼬박 사흘 동안 시간을 보낸 후에야 즉각 터져 나왔다.

“고작 사흘이었어.”

“후, 기가 몽땅 빨릴 것 같아.”

이스카의 타박에 라벨라가 미간을 좁혔다.

라벨라가 이스카를 동료라고 단정 지은 이후, 라벨라를 제 편이라고 여겼는지 영애는 부쩍 라벨라에게 치근덕거렸다.

게다가 눈앞에서 이스카에게 달라붙는 꼴을 보는 것도 짜증스러웠다.

“여길 당장 뜰 거야.”

일은 어느 정도 정리됐지만, 영주와 협상할 때 더 많이 얻어내려고 버티고 있었을 뿐이었다.

라벨라가 결심하자마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야지요.”

라벨라는 계약서에 찍힌 영주의 인장을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남은 일은 리텔니의 주도하에 정리될 터.

그녀는 네이트랄 공작과 나메렌 후작의 편지를 들고 다른 영지로 떠나기만 하면 됐다.

“그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지요.”

“네, 감사합니다.”

라벨라와 이스카가 작별을 고하며 몸을 일으킬 때였다.

“아, 경. 나와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요.”

영주가 이스카를 막아 세웠다.

“잠시 괜찮겠지요?”

“네, 그럼요.”

그러면서 라벨라에게 양해를 구해왔다.

“먼저 가 있을게요.”

“아뇨, 기다리고 계세요.”

영주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충분히 예상이 갔다.

라벨라가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려 하자 이스카가 단호하게 명령 아닌 명령을 내렸다.

“……그럴게요.”

잠자코 고개를 끄덕여 보인 라벨라는 영주에게도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앉으시죠.”

이스카에게 자리를 권한 후작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요. 내 딸, 피아체와 결혼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스카는 짐짓 놀라고 말았다.

강요도 아닌 권유였다. 그를 어느 상단에 소속된 일꾼으로 알고 있는 후작이기에 그의 예의가 더욱 놀라웠다.

‘다정한 구석이 있군.’

이스카는 속으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자신을 지지하는 귀족 중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될 이였다.

그런 후작의 인간적인 면모를 확인하게 돼 안도한 것도 사실이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내 딸이 경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더군요. 당분간 성에 머무르면서 교육을 좀 받았으면 싶은데.”

영주는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작위를 물려받을 아들도 있고, 다른 딸 아이들은 모두 그럴듯한 귀족 집안에 시집을 갔다.

막내딸 하나쯤이야 제 소원대로 결혼시켜 성에 끼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출신이 아쉬울 뿐, 눈앞의 사내는 여러모로 보아도 잘난 남자였다.

“미천한 제게 그런 말씀을 해주신 것은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다음 말을 예상한 후작의 얼굴에 묘한 안도감이 들면서 동시에 걱정이 떠올랐다.

“저는 결혼을 약속한 여인이 따로 있습니다.”

물론 약속한 적도 없고,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지만.

그 사실을 영주에게 곧이곧대로 알릴 필요는 없겠지.

“아!”

그제야 제 실책을 깨달은 영주가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내가 미처 예의를 갖추지 못했군요.”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당연히 제 권유를 받아들일 거라고 여겼던 오만함이었다.

이스카는 순순히 제 오만을 인정하는 후작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라벨라 양과 함께 떠날 건가요?”

“네.”

“조용히 떠나는 게 좋겠군요, 딸아이 눈에 띄면 쉽게 떠날 수 없을 테니.”

마지막에 그가 내보인 건 곤란한 상황을 겪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이스카는 빈말이라도 영애에 대한 걱정을 표할 수 없었다.

솔직히 정말 관심 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라벨라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그녀와 어울리는 일 따위도 없었을 거였다.

*   *   *

라벨라와 이스카가 영지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메렌 후작은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게 됐다.

“어서 오세요, 공자.”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후작님.”

“무슨 말씀을, 자네라면 언제든 환영이지.”

“그런데…… 좀 지쳐 보이십니다.”

“하, 말도 말게. 부모인 게 죄지.”

피아체는 이스카가 떠났다는 걸 알자마자 온 성이 뒤집혀질 정도로 난리를 쳤다.

그는 눈물바다가 된 딸을 달래느라 진이 다 빠진 후였다.

“무슨 일이 있으셨나 봅니다.”

“뭐 다시 언급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니네.”

“그렇습니까, 으흠, 혹시 캄파냐 상단 일행은 성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공자가 참지 못하고 가장 궁금한 걸 물었다.

“캄파냐 상단? 아니, 마을 외곽의 숙소에서 머물렀네만?”

“아, 그렇군요.”

공자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켰다.

후작과 대충 인사를 나누고 어서 라벨라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오전에 영지를 떠났어.”

“네?”

공자가 처음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이런.

라벨라가 후작령에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만나고 싶어 서둘렀는데.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십니까?”

온 김에 얼굴이라도 꼭 보고 갈 생각이었다.

“무슨 일이 있나?”

“사실, 라벨라 양 얼굴을 보려고 왔습니다.”

“라벨라 양? 공자와 무슨 관계라도?”

제 딸과 같은 상황이라고 받아들인 후작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하하, 그런 쪽은 아니니 오해 마십시오. 그저 여동생 같아서 말입니다. 워낙 순수하고 어린 아가씨라 자꾸 마음이 가지 뭡니까.”

“음? 라벨라 양 말인가?”

후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네, 라벨라 양이요. 캄파냐 상단주의 여동생 말입니다.”

순수하고 어려?

후작이 본 여자는 상당히 똑똑하고 다부진 아가씨였다.

뭐, 사람의 평가는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거니까.

후작이 곧 의구심을 떨쳐 버렸다.

*   *   *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말에서 내리던 라벨라가 귀를 잡고 슥슥 문질렀다.

두 사람만 움직이는 탓에 이동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평범한 이들이었다면 하루 반이 걸렸을 거리를 반나절 만에 이동한 후였다.

“마을까지 안 갈 거야? 괜찮겠어?”

“얘네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라벨라가 거친 숨을 푸르릉 내쉬는 말의 콧잔등을 쓸어주었다.

사람보다 말이 먼저 지친 상황이 황당할 법하지만, 키르아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흐응. 단둘이 조용한 산속에서, 나쁘지 않네.”

이스카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면서 말 고삐를 나무에 맸다.

불을 피울 만한 자리를 찾아 발로 슥슥 미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던 라벨라가 곧 주변의 지형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적당히 촘촘한 나무 사이 안으로 둥그렇게 공간이 나 있었다.

바로 근처에는 깨끗한 물이 흘렀고.

몸을 움직이기에 괜찮은 조건이었다.

“이스카.”

“응?”

저녁거리로 어떤 짐승을 잡아야 하나 고민하던 이스카가 무심코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어때?”

라벨라가 단검을 손에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지금?”

하필, 모처럼 단둘이 있을 수 있는 이 시간에?

이스카가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그는 어차피 라벨라의 말에 응할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가뜩이나 성안에서 꼼짝 않고 있던 탓에 좀이 쑤셨을 그녀였다.

이스카는 빠르게 검을 뽑아 들었다.

‘그새 또 늘었군.’

훈련할 틈이 있기는 했나. 아니면 타고난 건가.

파고드는 라벨라의 몸놀림이 더욱 예리해졌다.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처음에는 라벨라와 대련하는 게 걸쩍지근했는데, 지금은 묘한 찌릿함이 연신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때만큼은 라벨라의 금안이 정확히 제게만 꽂혀 있으니까.

타깃을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는 거겠지만, 그녀의 모든 신경이 제게 쏠려 있다는 증거였다.

제 움직임, 숨결, 손짓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게 보였다.

‘색다르고 괜찮은 데이트일지도.’

몸의 대화만큼 또 긴밀하게 가까워질 수 있는 것도 없긴 하지.

이스카가 눈을 빛내며 라벨라의 검을 쳐낸 뒤 몸을 바짝 붙였다.

“라벨라.”

“하, 여유 만만하다 이거지?”

“나 청혼받았어.”

“…….”

이스카는 순간이지만 라벨라의 검 끝이 멈칫하는 걸 느꼈다.

거봐, 몸의 대화만큼 솔직한 게 없다니까.

이스카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뭘?”

챙, 검이 날카롭게 부딪치는 소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짧은 대화가 섞였다.

“후작의 딸과 결혼하는 거 말이야.”

“뭘 어떻게 생각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진심이야?”

이번엔 정신적 타격을 받은 이스카의 몸짓이 느슨해졌다.

라벨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센 공격을 시도했다.

‘아차.’

라벨라에게 허점을 내보인 이스카가 서둘러 몸을 뒤로 물렸다.

이스카의 균형이 흐트러진 틈을 타 라벨라가 힘껏 검을 내리쳤다.

“그래, 해.”

기어코 이스카의 손에서 검을 떨어뜨리게 만든 라벨라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짧게 일갈했다.

“…….”

굳은 이스카의 얼굴을 본 라벨라가 그대로 이스카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었다.

첨벙.

약한 힘에도 쉽게 밀려난 이스카의 몸이 그대로 물가에 빠졌다.

얕은 물이었지만 온몸으로 빠진 탓에 머리끝까지 물이 튀었다.

“뭐 하는 거야.”

무릎을 세운 채 허망하게 앉아 있던 이스카가 한숨을 쉬며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밀당 작전은 역시 실패인가.

“대신.”

머리 위로 떨어진 라벨라의 목소리에 이스카가 진득한 아쉬움을 드러내며 고개를 들어 올릴 때였다.

“네가 키르아에 남아 있는 동안은 곤란해.”

툭, 툭, 그녀의 손아귀에서 검집과 벨트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

혼란스러워 보이는 이스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라벨라가 제 셔츠 단추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가느다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작은 단추가 힘없이 구멍을 빠져나왔다.

셔츠가 반쯤 풀린 탓에 뽀얀 속살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라벨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물 안으로 성큼 발을 들인 그녀가 이스카의 턱을 들어 올렸다.

“키르아에 있는 한, 넌 내 거니까.”

“!”

젖은 입술이 빠르게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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