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너의 두 손을 잡고
‘그나저나 한 번씩 느껴지던 살기는 역시.’
이스카를 보며 드는 낯선 감정을 곱씹어 보던 라벨라가 내내 하고 있던 팔짱을 풀고 이스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이스카, 그 저주라는 거 말이야. 네게도 해당 하겠네?”
“아…….”
라벨라는 처음으로 이스카의 얼굴에 균열이 생겨나는 걸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계속 태연하게 굴던 그가 망설이듯 손가락 끝으로 이마를 만지작거리다 떼어냈다.
“그래, 나도 예외는 아니야.”
덤덤한 말투였지만 머뭇거리는 게 느껴졌다.
“황위에 오르겠다고 마음을 먹은 순간부터 시작됐어.”
“흐응.”
“라벨라.”
조심스레 눈을 마주쳐 오는 이스카의 눈동자에 설핏 긴장감이 서렸다.
“내가, 끔찍한 괴물 같아?”
“음?”
라벨라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본능적으로 피를 탐하는 거잖아?”
“흐응, 있지.”
라벨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넌 저주 때문이라지만, 내 가족들은 그냥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이들이었어.”
그리고 난 그게 당연한 환경에서 자라왔지.
“나라고 뭐 다른가?”
라벨라가 이스카의 앞에 손을 쫙 펼쳐 보였다.
“이 손으로 죽인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
“나는 그 흔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일을 끝낸 뒤에 악몽 같은 걸 꾼 적도 없어. 네 논리대로라면…….”
손을 내린 라벨라가 재미있다는 듯 혀끝으로 아랫입술을 살짝 쓸었다.
“나도 끔찍한 괴물이네. 그렇지?”
이스카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피어났다.
“네가 괴물이든 저주에 걸렸든 난 상관없어. 네 그 살기가 내게 향하지만 않는다면야.”
이스카를 보는 라벨라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하하, 그럴 리가.”
이스카가 웃음을 터트렸다.
청량한 웃음소리와 함께 이스카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난 이런 말이 듣고 싶었던 건가.’
자신을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두려움도, 경멸도 없었다.
오로지 무심함 뿐이라서, 그 사실이 위안이 됐다.
이 저주를 끊어내지 못하고 언젠가 진짜 괴물이 된다면, 그녀에게 제 명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궁금한 건 다 해소됐어?”
이스카가 라벨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다 털어놓으니 후련한가 봐?”
“생각보다 그러네.”
턱 끝을 까딱이는 이스카는 꽤 편안해 보였다.
이스카에게 약간 남아있던 의뭉스러움을 덜어낸 건 라벨라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당신이 날 궁금해한다는 게 좋은 거지.”
“틈만 나면.”
하여간, 끼 부리는 데는 선수지.
라벨라는 이스카를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혼자 갇혀 살았을 황궁에서 여자를 만나긴 어려웠을 테고, 아마 쿠즈네를 떠난 이후이려나.
곱상하고 순진한 황자님이 길바닥을 전전하면서 고생 꽤나 했겠다 싶었다.
“네 삶도 순탄하진 않네.”
“당신만큼이야 할까. 아예 사는 세상이 뒤바뀌었는데.”
“…….”
차메르. 자신을 임피리아로 데려온 대마법사.
이스카의 말에 자연스레 그가 생각이 났다.
칼리벨의 축제에서 보았던 연극 내용도.
‘대마법사를 물리치고 제국을 건설한 초대 황제라.’
눈을 내리깐 라벨라가 턱을 슥 문질렀다.
‘혹시 황가의 저주라는 게 그와 관련이 있는 걸까?’
“무슨 생각 해?”
“글쎄, 왜 내가 임피리아에 오게 된 걸까 그런 생각이 드네.”
그리고 평범한 암살 길드 대장이 떠돌이 황자를 만날 확률은?
“있지, 내가 널 만난 게 우연일까?”
“운명인 걸로 하고 싶은데.”
이스카가 입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라벨라가 혀를 차면서도 이스카를 날카롭게 살폈다.
‘녀석에게 차메르의 이야기를 해도 될까.’
혹시나 이스카의 저주가 차메르와 연관이 있다면, 차메르와 관련된 제 이야기를 꺼내는 건 썩 좋지 못한 선택이었다.
정확히 결론 내릴 수는 없지만 차메르가 자신을 데려온 흑막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짓을 그냥 벌였을 리는 없겠지.’
만약 그런 거라면, 이스카와는 어떻게 되는 걸까.
그리고 내 미래는?
‘차메르에게 물어야겠지.’
그 고집 센 마법사의 입을 열려면 그의 허를 찌를 만한 게 필요했다.
제게도 무기로 쓸만한 유용한 정보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줄 수 있는 건 역시…….’
라벨라는 이스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가 이 세계로 넘어왔다는 걸 알아챈 유일한 사람.
황자니까, 아마도 일반인들은 모를만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터.
“이스카.”
“음?”
“너, 마법에 대해 좀 알아?”
질문을 듣자마자 이스카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팼다.
“또 마법을 사용하고 싶다 뭐 다 그런 소리를 하는 거라면……”
“아니.”
라벨라가 이스카의 잔소리를 단번에 차단했다.
“난 정보가 필요해. 그냥 마법사든 마법이든 네가 아는 건 뭐든 듣고 싶은데. 이건 내 몸, 그러니까 목숨과도 직결되는 일이잖아?”
라벨라로서도 이토록 솔직하게 속내를 털어놓는 건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빙빙 돌리며 서로 간만 보던 그간의 대화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만큼 라벨라로선 이스카와의 대화에 공을 들이는 셈이었다.
“그렇지. 아는 선에서는 다 말해 줄게.”
그런 마음을 모르지 않았는지 이스카도 협조적인 태도로 돌아섰다.
“흐음.”
뭐부터 물어봐야 할까.
라벨라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제일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나도 마법사일까?”
이스카는 티 나지 않게 마른 침을 삼켰다.
조금이라도 거짓말에 티가 나면 대번에 눈치챌 그녀였다.
그러니 이스카는 거짓말은 아니되 라벨라에게 위험하지 않을 진실만을 전하기로 했다.
“글쎄. 당신에게 마력이 있는 건 맞아. 하지만, 마력이 있다고 해서 모두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난 사용했잖아? 그랬다는 건 또 가능하다는 뜻이겠지.”
“……상당히 바라는 눈치네.”
“당연한 거 아닌가? 마법을 쓸 수 있다는데 싫을 이유가 없잖아?”
“어째서? 당신은 이미 충분히 강하잖아.”
“충분히로 되겠어? 최고로 강해야지.”
뭘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 라벨라가 코웃음 쳤다.
“최고라. 그 말은, 어떻게든 날 없앨 거라는 경고로 들리는데.”
이스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눈썹을 끌어 올렸다.
“그 반대지. 네가 계속 강한 채로 머물러줘야 내가 성장하는 걸 느낄 수 있지 않겠어? 그러니까 노력하시라고.”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그쯤하고, 하던 이야기나 계속해 볼까.”
라벨라가 품속에서 이스카가 선물한 팔찌를 꺼냈다.
“나한테 이걸 준 건, 역시 내게 마력이 있다는 걸 알아서였겠지? 쿠즈네에서 쓰러졌던 이유도. 넌 전부 알았던 거지?”
“맞아. 절벽에서 당신이 다쳤을 때, 상처를 보고 알았어.”
“넌 그게 마력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황궁에 고립된 어린 애가 할 게 뭐가 있겠어. 이것저것 공부하다 보니.”
라벨라는 이스카의 속내를 꿰뚫을 것처럼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황궁 사람들도 너처럼 모든 걸 다 알아?”
“글쎄, 아마도 아닐 거야.”
마력에 관한 건 오히려 쿠즈네의 카셰이가 더 많이 알테지만.
이스카는 끝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그럼 이 마력석의 역할은?”
“당신 몸에 흐르는 마력을 안정화하는 거야. 강제로 통제하는 거지. 당신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팔찌, 마력, 마법.
라벨라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갔다.
“좋아, 궁금한 건 다 해결됐어.”
“그래?”
이유 모를 찝찝함에 이스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반면 이스카를 곁에 두고 간을 보던 라벨라의 마음엔 이제 확신이 섰다.
적어도 가는 길이 겹치는 동안만큼은 그와 함께하기로.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선택이었다.
“우리 이렇게 오래, 진지하고 정직하게 대화를 나눠 본 건 처음이네?”
질문과 동시에 턱을 괸 라벨라가 이스카를 보며 예쁘게 웃어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친해진 것 같으니까.”
“조금 더 친…… 고작 그 정도였어, 우리?”
아무리 계약 때문이라지만, 나름대로 연인 사이까지 됐는데?
이스카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시끄럽고.”
테이블 위에 양팔을 내린 라벨라가 이스카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우리의 미래 이야기를 좀 해볼까.”
“아아, 미래. 그래, 미래 좋지. 참 아름다운 단어네.”
빈정이 상해 이죽거리는 이스카를 깔끔하게 무시한 라벨라가 테이블 위의 지도를 집어 들었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스카의 부름을 받고 온 리텔니는 라벨라를 보고 짐짓 놀랐다가 곧 예의 바른 미소를 지었다.
“이리 와 앉아요.”
적당히 손을 흔들어 응한 라벨라가 눈웃음을 치며 이스카와 제 사이에 놓인 의자를 권했다.
“같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으응, 두 사람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제안을 하려고 왔거든.”
“제안이요?”
리텔니가 이스카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의자에 앉았다.
“그대의 주군은 아무래도 본인을 지지하는 귀족들을 돕고 싶은 모양이라서.”
“네?”
라벨라는 의아해하는 리텔니 앞에 지도를 펼쳤다.
“그리고 난 상단에서 관리할 농장 부지가 필요하고.”
라벨라의 검지 끝이 가위 표시가 있는 지역을 차례차례 짚었다.
“그러니까 손을 잡는 게 어때요?”
지도와 이스카, 라벨라를 번갈아 보던 리텔니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두 분, 무얼 어쩌실 생각이신 겁니까?”
“이 지역들 위주로 농장을 매입해서 키우려고 해요. 아주 대규모의.”
“…….”
“큰 농장을 운영하려면 많은 관리인이 필요하겠죠. 하지만 키르아는 소수정예로 운영된 터라 쿠즈네에 인력을 보낸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예요.”
잠자코 라벨라의 말을 경청하는 이스카를 따라 리텔니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증명되지 않는 녀석들을 마구잡이로 키르아에 들일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 난 그쪽 병사들을 농장의 관리인으로 보냈으면 해요.”
“……아!”
“그래요,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레 임피리아 전역을 그대들의 병사로 장악하게 되는 거죠. 그것도 이스카를 지지하는 세력에 거점을 둔.”
“…….”
반박할 여지가 없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이참에 배후를 잡아내죠. 그것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동그랗게 커진 리텔니의 눈을 보며 라벨라가 미소를 머금었다.
“자, 최근에 용병모집이랑 무기 매매가 비정상적으로 높아진 길드 목록이에요. 지역도 같이 적혀 있고. 이쪽 위주로 파 봐요. 아마 금방 잡을 수 있을 테니까.”
“!”
이번엔 이스카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그럼 내가 할 일 없이 무기 거래 독점권을 얻으러 다니는 줄 알았어?”
“돈 때문이라고 생각은 했어.”
이스카의 농담에 라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소리 없는 웃음을 흘렸다.
“자, 그럼 우리 이야기는 다 정리된 거지?”
라벨라가 양 손바닥을 찰싹 맞부딪쳤다.
“손잡기로 한 이상 잘해보자고, 황자님.”
“아아, 난 그보다 연애에 더 집중하고 싶은데.”
“…….”
라벨라보다도 리텔니의 싸늘한 시선이 먼저 날아들었다.
말이 없어도 눈과 표정으로 리텔니가 욕하는 게 뻔히 보였다.
“양쪽 다 잘 부탁하는 걸로.”
이스카가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그럼 또 봐.”
“이쪽으로 가시면……!”
리텔니가 배웅의 말을 마치기도 전, 라벨라는 미련 없이 창밖으로 떠나 버렸다.
“정말 뵐 때마다 신기한 분입니다.”
창틀을 짚고 바깥을 살펴보던 리텔니가 혀를 내둘렀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스카가 리텔니의 곁으로 다가오자 리텔니가 옆으로 비켜서며 자리를 내주었다.
창가에 비스듬히 선 이스카가 창틀에 머리를 대고는 리텔니를 보며 픽 웃었다.
“너까지 반하면 곤란한데, 리텔니.”
“에휴.”
징하다 징해, 리텔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라벨라 어때?”
“라벨라 님이요? 아, 네…… 뭐, 아름다우시고 또…….”
이스카가 뭘 묻는 건지 몰라 리텔니는 더듬더듬 감상을 이어갔다.
“정말 훌륭한 제왕 감이지 않아?”
“아, 그렇지요. 정말 그렇습니다.”
리텔니가 빠르게 동의했다.
“카리스마도 엄청나시고 사람을 휘어잡는 능력이 탁월하신 분이지요.”
“그렇지?”
창틀에 걸터앉은 이스카가 리텔니를 정면으로 마주 봤다.
“라벨라가 황위에 오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네?”
“저주와도 상관없는 사람이고, 능력도 충분하잖아?”
“나 참. 뭐 그런 재미없는 농담을 하십니까.”
리텔니가 웃음도 안 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무리 라벨라 님이 뛰어나신 분이라 한들, 귀족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자들이라면 차라리 황위를 두고 형제가 싸우는 걸 지켜볼걸요?”
저도 귀족이지만 말입니다.
“그런가.”
리텔니의 말에 이스카가 턱을 슥 문지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럼요. 황제보다는, 차라리 황후에 오르시는 게 더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겠…….”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내던 리텔니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휙 이스카를 쳐다봤다.
제 주군은 아무 말 없이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주 여유롭고 또 여유롭게.
“설마…….”
주군의 의도를 읽은 리텔니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러다 땅에 닿겠는데.”
이스카는 손가락으로 리텔니의 턱을 꾹 눌러 닫아주었다.
“이스카 님.”
“음?”
이스카의 눈은 여전히 장난꾸러기처럼 방글거렸다.
주군의 천진한 웃음이 심히 음흉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리텔니는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