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너도? 야, 나도
“페시니, 넌 여기서 대기해. 이스카만 잠깐 만나고 올 거니까.”
돌고 돌아 이스카가 있는 나메렌 후작의 영지에 도착한 직후였다.
마을 외곽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숙소를 잡은 라벨라가 짧게 명령했다.
“알겠어, 대장.”
페시니는 따라가고 싶은 기색을 잔뜩 드러내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카는 인신매매 사건 해결을 돕기 위해 온 네이트랄 영주의 사병들과 함께 있을 터.
가뜩이나 그냥 돌아다녀도 눈에 띄는 덩치니 마냥 고집을 부릴 수도 없었다.
“다녀올게.”
페시니의 배웅을 받으며 라벨라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으슥한 길목만 골라 이스카가 묵고 있는 숙소를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숙소 입구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보이는 게 문제였을 뿐.
‘괜히 얌전한 척은 해가지고.’
물론 그랬으니 공자에게서 이것저것 정보를 얻어낸 거긴 하지만.
투덜거린 라벨라는 네이트랄 영주의 사병을 피해 건물 지붕 위로 움직였다.
‘음?’
이스카의 방을 찾아간 라벨라는 곧장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움직임을 멈췄다.
“하아.”
이스카의 커다란 한숨 소리를 들은 탓이었다.
안을 힐끗 보니 지친 기색이 만연한 얼굴을 커다란 손으로 쓸어내리는 이스카가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나?’
라벨라가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어쩐지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질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였다.
입술을 질끈 깨물고 눈을 감고 있던 이스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창가로 다가왔다.
‘엥, 나 왜 숨었지?’
본능적으로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라벨라가 헛웃음을 뱉었다.
저 녀석이 우울해 보이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괜히 신경이 쓰이는…….
신경이 쓰여? 왜?
‘뭐라는 건지.’
고개를 빠르게 내저은 라벨라가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이스카의 커다란 등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뭐야, 왜 짜증이 나지.’
평소와 달리 처진 것 같은 어깨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대체.’
기척을 내니 곧장 알아챈 이스카가 몸을 돌렸다.
“이제 그만 들어와.”
‘그렇게 좋냐.’
“실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서히 미소가 번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세상 끝날 것처럼 온갖 폼은 다 잡고 있더니만.
안아줄 거냐고 묻는 이스카에게 입을 맞춰준 건, 굳이 따지자면 일종의 적선이었다.
게다가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입을 맞추고 나니 역시나 예상대로 녀석의 눈이 예쁘게 휘었으니까.
‘웃는 얼굴만큼은 꽤 마음에 든다니까.’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조금은 반가운 것 같기도 하고?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이스카를 놓아준 라벨라가 픽 웃었다.
“너랑 의논할 게 있어.”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평하게 테이블 앞의 의자로 가 앉았다.
“?”
멀뚱하니 선 이스카를 보며 라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오고 뭐 해?”
왜 그러고 멍청하게 서 있냐는 듯 비난 섞인 눈빛이었다.
“역시 난, 그냥 안아주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
“욕심부리다 이도 저도 못 가지고 다 놓치는 수가 있다?”
헛소리 그만하고 앉으라는 듯 라벨라가 턱 끝으로 명령을 내렸다.
“의논할 게 뭔데?”
이스카가 불퉁한 표정으로 라벨라의 앞에 풀썩 앉았다.
조금 더 재회의 기쁨을 즐기고 싶었는데 이 여자는 그럴 의향이 조금도 없는 모양이었다.
“농장 부지를 보러 갔다가 재미있는 걸 알게 됐지 뭐야?”
라벨라가 품에서 꺼내 건넨 것은 한 장의 지도였다.
“이게 뭐지?”
이스카가 종이 위를 빠르게 훑어내렸다. 영지마다 각각 다른 기호가 표시되어 있었다.
“동그라미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곳. 세모는 한 번씩 불안하긴 하지만 아직은 안전한 곳, 가위 표시는 최근 들어 급격히 안 좋아지기 시작한 곳.”
설명을 들은 이스카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라벨라가 전하려는 내용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그래, 가위 표시는 전부 널 지지하는 귀족들의 영지야.”
두툼한 종이가 이스카의 손아귀에서 와락 구겨졌다.
“냄새가 나지? 시간이 없어서 임피리아 전체를 돌아볼 수는 없었지만 내 생각을 뒷받침할 수준은 돼. 내 소중한 시간을 투자해가며 확인한 거라고?”
라벨라의 통찰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곁에서 지켜보며 알았다.
그러니 라벨라의 이야기에 작은 의구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
다시 지도를 확인하는 이스카의 눈빛에 언뜻 분노가 어렸다.
보랏빛 눈동자에 맴도는 냉기를 본 라벨라는 목덜미가 살짝 오싹해지는 걸 느꼈다.
이스카가 뿜어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지독한 살기였다.
라벨라는 팔을 문지르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아냈다.
“내가 여기에 온 지 1년이 조금 넘었을 뿐이긴 하지만.”
대신에 팔짱을 낀 라벨라가 이스카를 건너다보며 말을 이었다.
“인신매매, 약물, 도적 떼.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사건이 일어날 만큼 치안이 어지럽진 않았던 것 같거든.”
라벨라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으악, 사, 살려주세요! 저는 그저 용병 모집하는 데 지원했을 뿐입니다!”
“용병 지원을 해놓고 도적질을 한다? 그걸 믿으라?”
“지, 진짜입니다! 돈도 미리 주던걸요! 오가는 상인이고 농민이고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습격해서 얻은 물품을 어딘가로 보내는 것도 아니야. 자금을 위한 목적도 아니란 뜻이지.”
라벨라는 페시니와 함께 붙잡아 심문했던 녀석의 말을 이스카에게도 전해주었다.
“프롬쉘처럼 중립적인 곳은 간 보듯이 적당히 건드려대고.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잖아?”
“…….”
이스카의 그늘진 얼굴을 보면서도 라벨라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인 목적이 빤했다.
이스카를 지지하는 자들의 힘을 빼놓아 이스카의 손발을 꽁꽁 묶어 둘 셈이었겠지.
황궁에 돌아오겠다는, 감히 그런 생각 같은 건 꿈에도 할 수 없도록. 날개를 꺾어 의지조차 갖지 못하도록.
프롬쉘처럼 중립을 유지하는 곳은 훗날 포섭을 쉽게 하기 위해 초석을 까는 것일 테고.
“어쩔 생각이야?”
덤덤하게 묻자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여 라벨라에게 닿았다.
침묵하는 그는 생각이 복잡한 듯 보였다.
“흐응.”
라벨라의 금안이 이스카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느른하게 훑었다.
처음 생각했던 목적대로 상단을 키우면서도 이스카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이미 오는 동안 계획은 전부 세워놓았고.
솔직히 이스카와 손을 잡고 협력한다면 키르아에게도 득이 되면 됐지, 손해는 아니었다. 지름길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니 사실 답은 나와 있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어느새 냉정함을 되찾은 이스카가 픽 웃으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래, 한번은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지.’
마음을 굳힌 라벨라가 입술을 열었다.
“나 궁금한 게 있어.”
이스카가 말하라는 듯 눈꼬리를 접었다.
“너도 적통인 황자잖아, 그렇지?”
제가 알고 있기로는 이스카도 황태자와 마찬가지로 황제와 황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그래.”
“그럼 너도 황궁에서 살았겠네?”
“그랬지.”
“그런데 왜 네 얼굴을 본 귀족이 없어?”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었어?”
이스카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헛웃음을 뱉었다.
“글쎄, 나름대로 정보원이 있어서.”
“……네이트랄 공자로군.”
알 만하다는 듯 실소한 이스카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눈치 빠르긴.
딱히 부정하지 않은 라벨라는 결 좋은 까만 머리칼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흐트러지는 걸 말없이 바라봤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해졌을까?”
정체를 몰랐을 때도, 황자라는 걸 들켰을 때에도 아무 것도 묻지 않던 그녀였다.
충분히 물을 법한데도, 관심조차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그러게, 갑자기 궁금하네.”
진심이었다.
처음 이스카에게 가졌던 호기심은 그가 황자라는 걸 알게 되자 자연스레 해소되었다.
그 후 라벨라의 주요 관심사는 이스카가 지금 자신과 키르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는 거였다.
그랬는데 조금 전 힘들어 보이는 녀석의 모습을 봐서 그런 걸까.
이상하게 문득 궁금해졌다.
이스카가, 아니 루비츠 황자의 과거가.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제 선택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알고 싶어졌다.
이건 그저 작은 호기심일까. 라벨라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라벨라를 물끄러미 보던 이스카가 곧 작게 웃음을 흘리고는 몸을 숙여 손 위에 턱을 괬다.
“흐음, 이런 이야기는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는데 말이지.”
이스카의 입꼬리가 짓궂게 올라섰다.
“……됐어,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
장난칠 것처럼 말끝을 흘리는 이스카를 본 라벨라가 짧게 혀를 찼다.
녀석과 밀당하면서까지 듣고 싶은 건 아니었다.
“왜, 난 당신이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
“뭐, 딱히 즐거운 이유는 아니야.”
다시 상체를 세운 이스카의 긴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들겼다.
“난 원래 태어나면 안 되는 존재였거든.”
“왜?”
권력자들은 원래 자식을 많이 두려고 하지 않나?
라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황위를 물려받을 아들이 있었으니까. 당신도 황가의 역사쯤은 대략 알지?”
“아.”
권력 싸움을 피하게 하고 싶었나 보네.
상황을 이해한 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임피리아의 황제가 바뀔 때마다 많은 피가 흘렀다는 것쯤은 들어 알고 있었다.
“불행인지 행운인지, 원치 않는 둘째를 갖게 된 어머니는 내가 차라리 딸이길 간절히 비셨다고 하더군.”
“딸이면 뭐가 달라?”
“황가의 저주는 아들에게만 해당하거든.”
초대 황제가 남자였기 때문일지도.
이스카가 어깨를 으쓱였다.
“흐응, 저주?”
“그래. 황위에 오르는 자는 본능적으로 살육에 끌려. 특히, 같은 피를 가진 형제들에게.”
잠깐 망설이던 이스카가 씁쓸한 미소와 함께 툭 진실을 뱉어냈다.
“물론 저주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건 황가의 사람들뿐이야. 대부분의 귀족조차 저주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
그러니 루카비도 귀족들 앞에서 품성이 선한 황태자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고.
‘살육이라.’
라벨라의 시선이 자연스레 이스카의 가슴팍으로 향했다.
“맞아. 내 형님께서 남기신 흔적이지.”
옅게 웃은 이스카가 제 흉터 부근을 손으로 덮었다.
라벨라는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하지 않았다.
사실 형제들끼리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일은, 라벨라에겐 일상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놀라울 것도 없었다.
저 예쁜 몸에 상처가 생긴 건 좀 안타깝지만.
“마음 졸이며 낳았는데 하필, 아주 건강한 사내아이였던 거지.”
“흐응.”
“형님, 그러니까 황태자가 그때 다섯 살이었는데, 나를 보자마자 목을 졸랐다더군.”
이스카에겐 기억조차 없는 일이었다.
“놀란 어머니는 병약하다는 핑계를 대고 날 황궁 깊숙한 곳에 숨겨서 키우셨어. 황태자의 눈에 띄지 않도록.”
“그게 가능해? 같은 황궁 내에서?”
“황궁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고? 언젠가 당신도 보게 되겠지만.”
흥, 재수 없기는.
오만하게 들리는 말에 라벨라가 입술을 비죽였다.
“시중을 드는 어머니의 최측근 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본 적이 없어.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없었지.”
그래서 소문만 무성한 거였구나.
라벨라는 이제야 모든 퍼즐이 들어맞는 느낌이었다.
“병약한 황자라기엔 너무 건강하게 자랐네.”
라벨라가 뻔뻔하다 싶을 만큼 이스카의 몸을 노골적으로 훑었다.
“그렇지? 그래서 그랬으려나. 가까이에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내 존재가 형님의 심기를 꽤 불편하게 했던 모양이야. 아마도.”
어느 날 제 공간에 불현듯 들이닥친 은빛 머리를 본 순간, 루비츠는 곧 다가올 죽음을 직감했다.
그것이 언젠가 어차피 맞이했을 제 운명이라는 것도.
“그래서 이렇게 됐지. 어머님이 조금만 늦게 나타나셨더라면, 아마 난 지금쯤 저기에 있었을걸.”
이스카의 기다란 손가락이 제 가슴팍을 향했다가 곧 하늘을 콕 짚어 가리켰다.
“별궁으로 옮겨지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쿠즈네로 보내졌어. 대외적으로 난 여전히 별궁에서 투병 생활을 하는 병약한 황자이고. 황태자에게는 죽은 사람이어야 하지.”
‘황후는 이스카의 편에 선 건가.’
라벨라는 상황을 어렵지 않게 파악했다.
대외적으로도 루비츠 황자가 죽었다고 공표해 버리면 황태자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졌을 테니 투병생활로 포장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황태자는 네가 죽었다는 걸 믿지 않았을 테고.”
“맞아.”
“그래서 쿠즈네에서도 네 이름을 판 거고.”
내막을 모르는 귀족들과 제국민들에게 루비츠 황자의 평판을 떨어트릴 목적.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는 네 처지를 이용해서.”
“정확해. 그게 다야. 뭐, 별거 없지?”
“그래, 별거 없네.”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 라벨라가 잠자코 볼 안쪽 여린 살을 혀로 쓸었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았지만 이스카와 자신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거니까. 살기 위해서라도 강해져야만 했던 자신과 살기 위해 약한 척, 모든 힘을 빼고 웅크려야 했던 이스카.
정확히 반대의 상황이었는데도 희한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재미있네.’
이스카도 삶과 죽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살아 온 거다. 라벨라 자신이 그랬듯이.
이 기묘하고 낯선 동질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스카를 보는 라벨라의 눈빛이 한층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