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31화 (31/94)

31. 먼저 반한 게 죄

“라벨라, 당신 지금…… 그거…….”

이스카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지금 뭘 볼 건가 싶었다.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이스카가 헛웃음을 뱉었다.

바로 눈앞에서 치솟은 시뻘건 불기둥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바닥에 앉아 있던 라벨라도 멍하니 제 손끝을 바라보았다.

“…….”

마법.

단어 하나가 라벨라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마법을 쓴 건가?

“임피리아에서 당신 같은 백금발과 투명한 금안은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마법사만 그런 외형을 갖지.”

이스카가 했던 말도 연달아 생각났다.

제국의 유일한 마법사라는 차메르는 지금 보석 속에 갇혀 있다고 했고.

어라, 이렇게 되면…… 그러면…….

‘내가 제일 강해지는 건가.’

샘솟는 기대감에 라벨라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섰다.

임피리아에 오게 된 게 이토록 만족스러운 적이 또 있을까 싶었다.

“라벨라, 몸은?”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스카가 무릎을 꿇고 라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라벨라는 보랏빛 눈동자가 황급히 자신의 몸을 살피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어디 이상한 곳은? 괜찮은 거야?”

이스카가 조급하게 물었다. 쿠즈네에서처럼 마력의 영향으로 라벨라의 몸에 무리가 가진 않았을까 불안했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은데?”

씩 웃은 라벨라가 일어난 뒤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이스카, 이게 네가 말했던 그 마법이라는 거지?”

“…….”

그리 묻는 목소리에 즐거움이 가득해서 이스카는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쪽은 걱정스러워 죽겠는데 신이 난 건 물론이요, 심지어 동그란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흐응, 또 되려나?”

라벨라가 허공에 손을 몇 번 휘둘렀지만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 되네.”

아쉬워 보이는 라벨라에 한숨을 삼킨 이스카가 미간을 짚었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라벨라, 일단…… 숙소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이스카가 걱정스레 말했지만 제 손끝에 집중하기 시작한 라벨라의 귀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

‘괜찮은 건가.’

이스카는 라벨라의 방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갑자기 마법이라니.’

이스카는 선득거리는 불안감을 애써 눌렀다.

라벨라가 차메르의 마력에 영향을 받는 몸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더욱 걱정스러웠다.

‘쿠즈네에 다녀와야 하려나.’

마력을 가지고 있다 해서 모두가 마법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이 기이한 현상의 답을 아는 이도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이스카의 생각이 복잡해지려는 그때였다.

‘……나타났군.’

이스카는 기운의 흐름이 바뀌는 라벨라의 방을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야?”

라벨라가 제 눈앞에 나타난 차메르를 보며 비아냥댔다.

“하도 안 나타나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여전히 건방지구나.”

오랜만에 봐도 변한 게 없는 태도에 차메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때문에 온 거지?”

입꼬리를 끌어올린 라벨라가 불을 쏟아냈던 손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내가 대단한 일을 하긴 했나 봐. 있지, 나도 이제 당신처럼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야?”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이였다. 라벨라는 단도직입적으로 궁금한 걸 물었다.

“……아니, 우연이다.”

기대감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던 차메르가 고개를 내저었다.

“우연?”

라벨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래, 전부 네가 지닌 그 돌덩이 때문에 생긴 우연이다.”

“돌덩이? 이거?”

라벨라가 품 안에 넣어두었던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것만 들고 있으면 마법을 쓸 수 있어?”

라벨라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아직 희망을 내려놓고 싶지 않았다.

“네 몸은 내 마력을 잠시 담고 있는 그릇일 뿐이다.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네 명을 재촉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 건 상관없으니까 복잡하게 빙빙 돌리지 말고 결론만 말해. 그래서 내가 당신처럼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없다는 뜻이다.”

“…….”

좋다 말았네.

크게 실망한 라벨라가 침대에 풀썩 걸터앉으며 입을 비죽였다.

“괜한 짓 해서 명줄을 당기지 말거라,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거다.”

“뭐야, 벌써 가?”

그럼 그렇지. 조금씩 흐려지는 인영에 라벨라가 혀를 찼다.

“흥, 기껏 나타나서는 안 좋은 소식만 잔뜩 이야기하고 가다니.”

작별 인사도 없이 사라져버린 빈자리를 보며 라벨라가 불만스레 투덜거릴 때.

“내게도 들를 줄은 몰랐는데.”

바로 옆 방의 이스카는 뜻밖의 손님을 맞이했다.

“마법사라는 게 좋긴 하군. 이렇게 남의 방에 불쑥 침입하는 것도 가능하니 말이야.”

창가에 기대어 선 이스카가 팔짱을 낀 채 눈앞의 불투명한 형체를 느른하게 훑었다.

비록 사람의 몸은 아니었지만 차메르가 깨어 움직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볼수록 라벨라와 비슷한 외향에 기분이 묘했다.

“그녀에게 마력석을 채워뒀더군. 의도한 건가.”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거든.”

이스카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를 제대로 활용할 작정이군.”

차메르가 비싯 비웃음을 흘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스카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녀가 품고 있는 마력은 이 몸의 것이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지.”

“그 말은…… 라벨라가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래. 물론 그녀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네가 채워놓은 마력석의 도움이 컸지. 마력이 잠잠해진 탓에 라벨라가 본능적으로 운용할 수 있게 된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이스카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법이라니, 네게는 아주 유용한 도구이고 무기가 될 테지. 물론 사용할 때마다 그녀의 목숨줄은 짧아질 테지만.”

“뭐?”

차메르의 말을 이해한 이스카의 눈동자에 조금씩 분노가 섞이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표정이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든 차메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네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지 않나. 그녀가 자신의 생명을 깎아먹는다 하더라도, 네게는 그저 훌륭한 ‘도구’가 되면 그만일 뿐 아닌가.”

“하.”

이스카가 헛숨을 토해냈다.

“내가, 그녀를 그렇게 써먹으리라고 여기는 건가.”

차가운 냉기에 젖은 눈동자가 마치 눈앞의 사내를 씹어먹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너도 비스메르트이니까.”

“비스메르트? 그게 뭐? 난 그녀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그런 힘을 가질 생각 따위 없어. 내가 황위에 오르는데도 그런 힘 따위는 필요도 없고.”

“…….”

진위를 가늠하려는 듯 차메르가 이스카의 눈을 꿰뚫을 것처럼 바라봤다.

“잊었나? 애당초 내가 당신에게 요구한 건 비스메르트를 저주에서 놓아달란 것 하나뿐이었어.”

그런 내게 라벨라를 보낸 건 오로지 당신의 의지였지.

“날 시험하려고 그녀를 위험한 상황에 빠뜨리는 짓을 하려는 거라면, 쓸데없는 짓이라고 말해두지.”

“…….”

“그러니 그녀를 수단으로 나와 거래하려 들지 마.”

‘이건 예상치 못한 수확이군.’

차메르가 의외라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재미있군. 그래, 재미있어.”

차메르는 비스메르트의 시작이었던 사내를 떠올렸다. 누구보다 잔혹하고 잔인했던.

“당신의 마력이 사라지면, 그럼 그녀는 안전한 건가?”

뒤늦게 중요한 걸 깨달은 이스카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그 대답은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제약이 많은 몸이라서 말이야.”

“뭐?”

삐뚜름하게 웃던 얼굴이 점점 투명해지더니 금방 사라져 버렸다.

“……하.”

사라진 자리를 허망하게 보던 이스카가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수백 년 묵은 능구렁이 영감에게 이쪽의 약점을 내보인 거나 마찬가지였다. 정작 가장 중요한 건 듣지도 못하고.

황궁에 있는 이보다도 어쩌면 자신과 임피리아에 가장 큰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이.

“리텔니가 알면 가만히 있지 않겠는데.”

헛웃음을 뱉은 이스카가 몸을 뒤로 젖혀 창밖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은한 금빛을 흘리는 달을 보니 또 라벨라의 어여쁜 눈동자가 생각이 났다.

부드러운 금발머리도.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먼저 반한 게 죄지.”

누굴 탓하겠나, 결국 빠져든 제 탓이었다.

그런데도 그녀가 제 약점이 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참 이상하게도.

*   *   *

“이스카. 이 마력석, 이건 어디서 생산되는 거야?”

역시나.

얼굴을 보자마자 마력석에 대해 캐묻는 걸 보니 라벨라는 제 수명을 깎아 먹든 말든 마법을 손에 넣을 작정인 듯했다.

‘절대 말하지 말아야겠군.’

혹시나 마법 사용이 가능하다는 걸 알면 당장에 움직일 여자였다.

“글쎄.”

이스카가 적당히 얼버무리며 딴청을 부리자 라벨라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제법 상단주 태가 나는데 그래?”

“그렇습니까?”

아르젠의 농담에 토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이스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때마침 나타난 일행들이 아니었다면 라벨라에게 강도 높은 취조를 당했을지도 몰랐다.

타이밍을 놓친 라벨라가 하릴없이 토라와 집행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보고해, 토라.”

라벨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토라가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상단에 납품하겠다는 업자들이 많습니다. 반응이 무척 좋습니다.”

예상했다는 듯 라벨라는 덤덤했다.

“꾸준히 납품 가능한 업자들로 골라서 계약을 진행하도록 해. 농장은? 공산품보다는 식료품 유통을 선점하는 게 더 중요한 거 알지?”

“라벨라 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생산물을 독점하는 조건으로 직계약을 진행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반응은 미지근합니다.”

“대부분 영지 내에서 자급자족하던 농부들이니 이런 식의 거래가 익숙하지는 않겠지. 농장 부지를 좀 봐야겠어.”

“네, 목록을 정리해뒀습니다.”

“좋아, 정 안되면 직접 키워 파는 방법도 나쁘지 않지.”

라벨라가 서류를 훑으며 무심하게 말했다.

“곧 프롬쉘에 간다고?”

“네, 함께 가실 겁니까?”

“아니, 난 이 목록에 있는 부지를 먼저 확인할 생각이야.”

“네,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 주십시오.”

“수고했어, 토라.”

“라벨라 님!”

허리를 꾸벅 숙이고 물러난 토라가 사라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수하 하나가 달려왔다.

전서구를 관리하는 녀석이었다. 벌게진 얼굴로 헉헉대는 녀석에게 시선이 쏠렸다.

“……무슨 일이야?”

“프롬쉘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긴급 표시가 되어 있는 편지를 받아든 라벨라가 서둘러 내용을 읽었다.

“프롬쉘에서 벌어진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는데?”

“뭐?”

“나메렌 후작의 영지래.”

라벨라가 위치를 말하면서 동시에 이스카를 힐끗 쳐다봤다.

나메렌 후작. 대표적인 루비츠 황자를 지지하는 귀족 중 하나였다.

“…….”

“이스카, 네가 가보는 게 좋겠어. 네이트랄 공작과 의사소통하던 것도 너니까.”

당분간 대련은 못 하겠네. 아쉬움에 혀를 찬 라벨라가 이스카에게 적당한 핑계를 붙여주었다.

“대장, 나도 갈래.”

인신매매범 이야기에 페시니가 울컥하며 나섰다.

“안 돼, 페시니. 지난번 사건을 잊은 건 아니지? 넌 이번에 나와 농장 부지를 보러 가도록 해.”

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페시니가 얌전히 명령을 받아들였다. 이스카가 곧장 몸을 일으켰다.

“이스카, 보고는 빠짐없이 해.”

“알겠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스치듯 부딪쳤다.

*   *   *

“분명히 토라의 보고서엔 비옥하고 풍요로운 곳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말이야.”

며칠 뒤. 황폐한 평야를 본 라벨라가 못마땅한 기색을 내비쳤다.

이스카가 나메렌 후작의 영지로 떠난 뒤 라벨라도 곧장 칼리벨을 떠났다.

라벨라는 페시니와 함께 농장을 만들 부지를 알아보기 위해 토라가 추천한 곳으로 온 참이었다.

“도적 떼가 출몰하는 게 아니라 메뚜기 떼가 쓸고 간 것 같은데?”

종종 도적 떼의 습격 때문에 곤란하다는 정보를 보긴 했지만, 실제 상황은 더욱 안 좋은 듯 보였다.

“마을로 들어가 보자, 대장.”

좀 더 나을까 싶었던 마을 분위기도 암울하긴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지친 얼굴을 보며 느리게 걸음 한 라벨라는 근처의 선술집으로 들어섰다.

“여기 시원한 맥주 두 잔, 아니 석 잔만 주쇼.”

페시니가 문을 열자마자 큰 소리로 주문을 마쳤다. 오랜만에 찾아온 손님을 본 주인장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라벨라는 텅 빈 술집의 한가운데 자리를 잡았다.

“손님이 없네?”

후드로 얼굴을 가린 라벨라를 힐끗 본 주인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지 한참 됐소이다. 도적 떼가 나타난다는 이야기 못 들었소?”

“도적?”

“성으로 가는 물자들, 성에서 내려오는 구호물자들, 번번이 습격해서 다 약탈해가고 있소.”

“…….”

“오래 있을 동네는 아니니 얼른들 마시고 떠나는 게 좋을 거요.”

지친 얼굴로 술잔을 내려놓은 주인장이 충고한 뒤 자리를 떴다.

‘여기가 이 정도면, 다른 데도 마찬가지겠네.’

라벨라의 머릿속에 도적 떼의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영지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전부, 루비츠 황자를 지지하는 귀족들의 영지라는 점.

“페시니.”

“음?”

어느새 맥주 한 컵을 비운 페시니는 입가를 손으로 훔치며 다른 컵을 들고 있었다.

“이스카와 합류하자.”

페시니의 잔 위에 제 잔을 내리찍은 라벨라가 씩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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