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너만 몰라, 너만
“지금 그 말.”
어금니가 으득 갈리는 소리가 났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이스카의 눈빛이 형형해졌다.
발끝에서부터 허무한 분노가 차올랐다. 누군가 뇌를 움켜쥐고 압박하는 것처럼 관자놀이 부근이 쿵쿵 울렸다.
“왜 당신은…….”
항상 자신을 그렇게 도구 취급하지?
이스카가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짓씹었다. 꺼내 봐야 소용없는 이야기였다.
지금껏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여자다. 그런 그녀에게 따져봐야 아무 의미 없는 메아리였다.
지금만 해도 라벨라는 왜 네가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니까.
“후우.”
마른세수를 한 이스카가 거칠어진 숨을 뱉었다.
화는 나는데 화를 낼 상대가 없는 기묘한 상황이었다.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고,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된 자신을 탓할 수도 없으니.
‘내가 무슨 자격으로.’
이스카가 쓰게 웃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차메르와 거래를 한 탓에 라벨라를 만나게 된 거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차메르가 말한 존재를 막연히 ‘열쇠’ 혹은 ‘도구’쯤으로 생각했다.
그저 황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줄 대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여긴 것도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화를 낼 자격이 있는 지도 의문이었다.
“라벨라 당신, 내가 왜 황제가 되려고 하는지 알아?”
이스카는 한층 누그러진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지그시 눈을 마주치자 어디 말해보라는 듯 시큰둥한 눈빛이 돌아왔다.
이스카는 막막해졌다.
저 감정 없는 여자에게 이런 마음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지키기 위해서야. 전부…… 지키고 싶어서.”
소중한 내 사람들, 임피리아에서 살아가는 제국민들, 그리고 더이상 피에 얼룩지지 않을 역사를 위해.
“그리고 나한테 당신은…….”
이스카는 일자로 다물어진 라벨라의 붉은 입술을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사랑스러운 금안을 들여다보며 속삭이듯 읊조렸다.
“그깟 누군가의 목숨이 아니야.”
그녀의 표현에 마치 제 마음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기분이었다.
이스카의 눈동자가 한없이 쓸쓸해졌다.
“당신에게 내 마음이, 당신이 아끼는 그 작은 검보다도 못한 무게라는 거 알아.”
“어, 음…….”
부정하기도, 인정하기도 애매했다.
라벨라는 입을 뻐끔거리다 결국 다물어 버렸다.
항상 능글거리고 여유롭게 웃던 이스카가 이토록 가라앉은 건 처음 봤다.
넓은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 같았다. 처량해 보이기도 하고, 슬퍼 보이는 것도 같고.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까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얘는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라벨라는 제가 뭘 실수했는지 되짚어봐야 했다.
‘딱히 틀린 말을 한 것도 없는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모르겠다.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이스카가 실소를 흘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신이 내 눈앞에서 다친 게 벌써 두 번째야. 그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나.”
무력한 자신에게. 그리고 그녀를 위험에 빠뜨리는 원인일지도 모르는 자신에게.
그녀가 이 낯선 땅에 오게 된 건 오로지 자신 때문이었으니까.
“이게 잘된 일이라고?”
이스카가 코웃음 쳤다.
“아니.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서 숨을 멈췄다면, 난 연관된 모든 자를 다 찢어 죽였을 거야. 그리고 나 자신을 저주했을 거라고.”
“하, 이스카. 지금 네가 뭘 착각하는 모양인데.”
라벨라가 한숨을 폭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만약 죽게 된다면, 그건 내가 강하지 않기 때문이니 어쩔 수 없는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워.”
이스카의 입에서 흘러나온 거친 말에 라벨라가 짐짓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아?’
다른 사람도 아닌, 라벨라 자신에게 한 말이 맞나 싶었다. 항상 설렁설렁 능글거리며 웃는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당신이 깨어나지 않는 동안, 내가. 그리고 다른 녀석들이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알기나 해?”
“…….”
“어쩔 수 없다니, 그런 무책임한 말이 어디 있어. 당신, 키르아의 대장이잖아.”
말문이 막힌 라벨라가 입술을 비틀었다.
“당신이 죽으면 키르아는 어떻게 되는데? 당신 하나 보고 키르아에 들어온 녀석들은 또 어떻고? 그 생각은 안 해봤어?”
“…….”
맞다.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냥 죽으면 끝인 삶이었다. 어딘가에 무덤이 생길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그러니, 키르아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각자의 삶을 살아갈 거 아닌가?
나 하나 사라지는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키르아 녀석들은 네가 사라지면 슬퍼할 거야. 나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왜인지, 절벽에서 이스카가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깨어나자마자 보았던 키르아 녀석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반쪽짜리 형제들을 무감하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눈빛도.
“…….”
“라벨라.”
조금 혼란스러워 보이는 라벨라를 보던 이스카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렀다.
“내 마음을 짓밟아도 좋고, 당신에 대한 마음을 이용해도 좋아.”
라벨라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어 이스카를 바라봤다.
“난 기꺼이 이용당할 거고, 당신에게 빠져든 마음을 부정할 생각도 없어. 하지만 두 번 다시 당신을 걸고 거래하는 것 따위, 하지 마.”
“…….”
“당신을 하찮은 도구 취급하지 말라고.”
“…….”
무거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이스카는 가만히 라벨라를 내려다봤다. 대답하지 않는 걸 보니 그녀의 심기를 건드린 건가 싶었다.
‘역시 통하지 않는 건가.’
어쩌면 이런 소리를 하는 자신을 건방지다 생각할지도.
이스카가 옅은 한숨을 쉴 때였다. 뜨겁고 심란한 열기로 가득한 눈동자를 코앞에서 보던 라벨라가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
“……뭐?”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이스카도, 무의식에 말을 뱉은 라벨라도.
동시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라벨라 당신, 지금…….”
이스카의 눈꼬리가 조금씩 휘기 시작했다.
“미안하다고 했어?”
확인 사살을 하듯 묻는 그의 입꼬리가 미려하게 올라섰다.
“으음?”
당혹스러워 보이는 라벨라는 처음이었다.
라벨라는 금방 웃음기가 번지는 이스카를 보며 미간을 좁혔다.
……내가 왜 그랬지? 모르겠다. 그냥, 어쩐지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렇지만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싱글거리는 이스카의 얼굴을 보니 실수를 인정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라벨라는 마치 의도하고 말한 것처럼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미안해.”
진심이라는 듯 태연하게 말을 반복하는 라벨라를 보며 이스카는 웃음을 삼켰다.
자기가 말해놓고도 당황스러운 눈치였지만, 아닌 척 새침 떠는 게 뻔히 보였다.
그 모습이 또 사랑스러워 하릴없이 마음이 녹아내린다.
“라벨라 당신, 그거 알아?”
“?”
“난 정말 당신에게 꼼짝도 못 하겠어.”
그리 말한 이스카가 졌다는 듯 풀썩 침대 위로 상체를 떨어트렸다.
이불 속에 있는 라벨라의 다리 위에 고개를 얹은 그가 한숨 같은 숨을 흘렸다.
“…….”
라벨라는 무심코 그의 머리를 향해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까만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던 탓이었다.
‘이상하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묘한 기분이었다.
* * *
“에잇. 재수가 없으려니까.”
포승줄에 묶인 채 끌려 나오던 사내가 인상을 쓰며 침을 퉤 뱉었다.
“이 자식이?”
“왜, 뭐?”
페시니가 눈을 부라리자 사내가 비웃음을 걸쳤다.
“지금 뭘 잘했다고, 네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 건지 알고 까부는 거야?”
“하.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저질렀는데? 다 먹고 살자고 한 일에!”
“뭐야?”
먹고 살자고 사람을 납치해 팔아넘겨?
헛소리를 들은 페시니가 당장이라도 도끼를 휘두를 것처럼 부여잡았다.
“페시니. 그만해. 처벌하는 건 우리 몫이 아니야.”
아르젠이 페시니를 붙잡음과 동시에 이스카가 페시니의 앞으로 팔을 뻗어 막았다.
“에잉.”
시근덕대던 페시니가 아르젠의 팔을 뿌리치고 쿵쿵대며 멀어졌다.
“휴, 시한폭탄이 따로 없네.”
아르젠이 그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참, 페시니는 어때? 그 녀석 요즘 괜찮아?”
“그건 왜 묻지?”
“그 녀석 폭주하지 않게 네가 관리 좀 해.”
이스카는 침대에 앉아 과일을 먹으며 무심하게 뱉던 라벨라의 말을 떠올렸다.
라벨라가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나 했더니, 이유가 있는 모양이었다.
인신매매 일당을 잡아들이는 동안 페시니는 전보다 더 다혈질이 된 듯 굴었다.
“그래도 이게 마지막이라 다행이지. 어쨌든 우리도 곧 길드로 돌아갈 수 있겠네.”
아르젠이 혀를 끌끌 차면서도 팔을 위로 쭉 뻗으며 기지개를 했다.
“그렇겠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이스카는 영주의 사병에게 인계되어 성으로 끌려가는 일당들을 바라봤다.
미친 듯이 쫓고 털어내며 영지 내를 청소하다시피 쓸었다.
잔챙이들만 잡기를 반복한 끝에 오늘 드디어 중요 인물을 잡을 수 있었다.
이제 강도 높은 취조가 시작될 것이다. 이대로라면 녀석들을 조종해 일을 벌인 배후를 잡아낼 수 있을 테고.
라벨라도 거의 회복된 상태이니 나름대로 순조롭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그러니 한결 개운해야 하는 게 맞는데, 마음 한 구석이 영 찝찝했다.
“…….”
이스카는 말없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
“라벨…… 음?”
습관처럼 라벨라의 방을 찾은 이스카는 텅 빈 침대를 보며 눈썹을 구겼다.
영주와 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오는 길이었다.
지금쯤이면 자고 있거나 아니면 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그녀였다. 온기가 전혀 없는 걸 보니 잠깐 자리를 비운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직 마음 놓고 돌아다닐 상황은 아닐 텐데.
“후, 얌전히 지낸다 했지.”
그 성격에 오래 참는다 싶었다.
한동안은 반성하는 척하며 웅크린 채 눈치를 보는 어린 애처럼 굴더니만.
곧장 문을 열고 나온 이스카는 인기척이 나는 응접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리고 거나하게 벌어진 술판 앞에 앉은 라벨라를 본 이스카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뭐……!”
‘쉿.’
이스카와 눈이 마주친 라벨라가 아무 말 말라며 제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라벨라의 맞은 편에 앉은 저 거대한 덩치는 페시니겠고. 칸피덴과 아르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쉰 이스카가 문가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다리를 꼰 채 비틀어 앉은 라벨라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고 있었다.
입술에 댔던 손가락을 내린 라벨라가 술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대장…….”
“그래그래.”
“으허어어엉.”
“……!”
‘울어?’
이스카의 한쪽 눈썹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그러고 보니 페시니의 커다란 몸이 떨리고 있었다.
“난 대장에게 평생 충성할 거야. 알지? 으허헝.”
“…….”
커다란 목소리로 펑펑 우는 게 우스우면서도 어이없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람.’
“아직도 저러고 있어?”
알 수 없다는 듯 두 사람을 보는 이스카의 어깨 뒤에서 아르젠이 징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이 상태야?”
“아까 저녁 먹은 후부터.”
“뭐?”
“대장 명령이었어. 마을로 보냈다가 술 먹고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니 여기서 마시게 하라고.”
“술을 안 마시면 되잖아?”
이스카의 대꾸에 아르젠이 난감한 미소를 지었다.
“이해해줘. 저 녀석 지금 속이 속이 아닐 거야.”
잠시 고민하던 아르젠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이스카도 식구나 마찬가지니까 알아도 되겠지.
“저 녀석, 여동생을 인신매매로 잃을 뻔했거든.”
“!”
이스카의 팔짱이 스르르 풀렸다.
“다른 이유로 그쪽을 털던 대장이 여동생을 찾으러 다니던 페시니를 우연히 마주쳤지.”
“…….”
“대장 덕분에 빠르게 구할 수 있었는데, 구했을 때는 이미 약물 중독이 심각했어. 이번 사건과 여러모로 유사하지.”
이스카는 우는 페시니와 라벨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녀석, 이번 일 하면서 그때 생각이 많이 났을 거야.”
이스카는 그제야 라벨라가 왜 제게 페시니의 상태를 물었는지 알게 됐다.
“여동생은 지금…….”
“아, 대장이 여러 방면으로 애쓴 덕에 회복돼서 지금은 건강해.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이라 페시니가 딸처럼 아끼거든.”
“……다행이군.”
“그래서 녀석이 대장에게 충성하는 거야. 저 녀석에겐 대장이 은인이니까.”
“…….”
“대장은 딱히 도울 생각 같은 거 없었다고 말은 하지만.”
이스카는 무심하게 페시니의 술주정을 지켜보는 라벨라를 눈에 담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직업을 가진 여자다. 그 사실을 잊게 할 만큼 다정할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다정함을, 본인은 모르겠지.
왜 그녀에게 사람들이 매료되는지, 저 여자는 그저 자신의 외모와 실력 탓이라고만 여길 것이다.
그 모순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울 때가 있는데.
이스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릴 때였다.
“여, 영주님께서 찾으십니다!”
헉헉대며 외치는 커다란 목소리가 이스카의 감상을 깨뜨렸다.
이스카와 아르젠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스, 습격입니다. 오늘 잡아 온 무리가 전부…… 전부 몰살당했습니다!”
“!”
빠르게 고개를 돌린 이스카는 눈만 들어 올린 라벨라와 시선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