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예쁜 몸에 누가 그랬을까?
“그럴 리가.”
이스카가 느른하게 웃었다.
“그냥 오늘 잠자긴 틀렸구나 싶어서.”
의도와 뜻이 분명한 농담이었다. 이스카에게 가볍게 눈을 흘긴 라벨라가 몸을 일으켰다.
‘이럴 때 보면 바람둥이라는 게 진짜일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낀 거지만, 능글거리는 수준이 아주 남달랐다.
라벨라는 정염에 젖어 들다 못해 눅진해진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사랑의 열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노골적이었다. 눈앞의 여인을 어쩌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정이 빤히 느껴졌다.
‘저런 걸 보면, 여자를 많이 겪은 남자는 또 아닌데 말이지.’
라벨라가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헷갈려 죽겠네.’
보통은 몇 번 찔러 보다 보면 다 파악이 되는데, 이스카는 아니었다.
눈에 다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은 흐린 안개가 낀 듯 그랬다.
‘적어도 얼굴이 아름답다는 소문 하나만은 진짜겠어.’
라벨라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기울이자 이스카도 뒤로 몸을 젖히며 눈을 맞췄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우리 황자님께서 밤에 외로우신가 하는 생각.”
“뭐?”
이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누누이 말하지만, 날 허기지게 만드는 건 당신 하나뿐이야.”
‘저 봐, 저 봐.’
순진한 건지 아닌지. 라벨라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사나운데 말투와 표정은 나긋나긋했다. 다정함이 찐득하게 묻어났다.
“어쨌든. 뭐가 궁금해서 기다리셨을까, 우리 아가씨께서.”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라벨라에 이스카가 웃음을 머금은 채 물었다. 사실 라벨라가 야밤에 자신을 찾아온 목적이야 빤했다.
“녀석들이 가져간 약초 종류는?”
“눈속임을 위해서였는지 거의 다 쓸어가긴 했지만, 노린 건 몇 가지로 압축돼.”
날카롭기는. 그걸 물을 줄 알았다는 듯 이스카가 짧게 결론부터 보고했다.
“주로 마취 용도로 쓰이는 약초들이고, 그중에는…….”
이스카가 말하다 말고 쓰게 웃자 라벨라의 눈이 서늘해졌다.
“최음, 환각 효과. 맞지?”
“……어떻게 알았어?”
“농장에 갔을 때 심어져 있는 종류를 조금 봤어. 다벨한테 열심히 배우고 있거든.”
약초상에 있던 종류와 농장에 남은 종류를 비교해서 유추한 사실이었다.
“대단하네. 맞아, 당신 예상대로야.”
“흐음. 목적이 빤하네.”
침대를 짚었던 손을 떼어낸 라벨라가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렇지. 내일은 마을 안을 살펴볼 생각이야.”
“어느 쪽 먼저 갈 거야?”
“그건 왜?”
“나도 내일 공자랑 마을에 갈 거거든. 이왕이면 각자 다른 데로 가는 게 빠르잖아?”
“……공자랑 하는 데이트가 즐거웠어?”
“뭐?”
엉뚱한 말에 라벨라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하, 왜? 질투나?”
“아니. 당신이 그런 사내에게 흔들릴 여자는 아니니까.”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야?”
“내일 마을에 간다며? 그럼 말을 타고 갈 거 아냐.”
“…….”
라벨라가 잠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말을 타고 가는 게 도대체 왜?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 녀석, 분명 널 자기 말에 같이 태우려 할 거야.”
매너가 몸에 밴 녀석이니까. 이스카가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앞에 태우는 것도 뒤에 태우는 것도, 다 싫어. 아니, 당신 몸에 다른 녀석이 닿는 게 싫어.”
“…….”
“후, 마차를 준비하라고 할까.”
할 말을 잃은 라벨라가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이스카가 하는 것도 낯선데, 심지어 지금 그가 진지해 보인다는 게 더 황당했다.
“지독한 독점욕이네.”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
“나 아직 네 거 아닌데?”
“질투 정도는 해도 되잖아?”
뒤로 손을 뻗어 짚은 이스카가 삐딱하게 물었다.
이스카를 가만히 바라보던 라벨라가 옅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스카, 말 돌리지 마. 마을에 못 오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면 다 눈치챘으니까.”
“들켰네. 아, 그래도 질투는 진심이었어.”
“이번 일에서 날 제외하려는 건가, 설마?”
“지금 상황에서 당신이 나서면 눈에 띄니까. 게다가 공자가 널 그런 위험한 곳에 데려가지도 않을 거고.”
감히 네가? 어쭙잖다는 듯 시선을 내리까는 라벨라에 이스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라벨라가 코웃음 쳤다. 귀족 나으리 하나 제 입맛대로 굴리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라벨라.”
이스카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이번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은 지금처럼 관망하면 안 되겠어?”
“왜?”
불과 어젯밤에만 해도 하고 싶은 대로 하라던 그였다.
“…….”
그야, 당신의 존재가 아직 황태자에게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니까.
이스카는 속내를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이미 쿠즈네의 일로 키르아를 주목하기 시작했을 터. 이대로라면 라벨라의 존재가 수면 위로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라벨라의 마음속에 제가 자리 잡기 전까지는, 그녀를 그의 유일한 형제에게 절대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최대한 보류하고 싶은 일이었다.
‘나 지금 되게 한심한데.’
갑자기 자신이 유치하고 초라해지는 느낌에 이스카가 씁쓸히 웃었다.
라벨라 때문에 처음 느끼게 된 감정들이 한 번씩 지독하게 낯설었다.
“당신은 가끔 너무 안일하게 굴어. 잊지 마, 임피리아는 아직 당신에게 낯선 곳이라는 걸.”
적당히 속을 감춘 이스카가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흐응, 날 가르치시겠다?”
“조심해서 나쁠 거 없잖아?”
“솔직히 말해. 너, 이 일의 배후로 짐작 가는 대상이 있지?”
이스카의 붉은 입술이 닫혔다. 라벨라는 그가 지금 자신과 같은 인물을 떠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몸이 아파 숨어 지냈다는 황자와 인자하다는 황태자. 하지만 동생의 이름을 팔아 불법적인 자금을 모으고 있는 황태자.
진실은 무엇이며 누굴 믿어야 하는가.
어쩌면 조금이나마 직접 겪었던 그를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라벨라는 이스카의 팔을 잡아당겼다.
“!”
불시에 당한 습격에 그의 몸이 기우뚱 기울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스카의 몸 위에 올라탄 라벨라가 말없이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라벨라?”
어떤 유혹의 의미나 짓궂은 장난이라고 하기에 라벨라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이스카는 잠자코 그녀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단추를 전부 풀어내고 셔츠 앞섶을 펼치자 탄탄한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라벨라의 금안이 느리게 이스카의 단단한 몸을 훑었다.
“볼수록 걸작이야, 그렇지?”
“칭찬 나쁘지 않네.”
씩 웃은 라벨라는 가만히 그의 가슴 한가운데로 손을 가져갔다.
손끝이 그의 딱딱한 피부 표면을 꾹 눌렀다. 자상의 흉터가 시작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라벨라는 그림을 그리듯, 흉터를 따라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움직임을 따라 한 번씩 이스카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도톰한 입술을 노려보던 이스카가 인내심을 끌어모아 눈을 감았다. 미칠 것 같은 간지러움은 배꼽 부근에 가서야 멈췄다.
“이 예쁜 몸에 누가 그랬을까?”
“…….”
“응? 누구 짓이야?”
굳게 닫혀 있던 눈꺼풀이 들리며 보랏빛 눈동자가 서서히 나타났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그게 왜 궁금해졌어?”
이스카는 제 몸 위에서 군림하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라벨라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너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거라고 하면, 만족하려나?”
“달콤하니 듣기엔 좋은데. 내 입을 열기엔 부족하네.”
“흐응.”
평소와 달리 버티는 이스카에 라벨라가 느리게 몸을 숙였다.
이스카의 얼굴 옆으로 차르르 흘러내린 머리칼이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코앞에 보이는 금안을 보면서도 이스카의 여유로운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머금을 것처럼 다가온 숨결인데 이스카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라벨라가 눈앞에 얌전히 놓인 먹잇감처럼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에 입을 맞추려 할 때였다.
커다란 손이 빠르게 사이를 막았다.
“안 돼.”
“!”
어쭈, 튕겨?
라벨라의 좁아진 미간을 본 이스카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난 당신이 그걸 무기로 삼는 게 싫어.”
“…….”
필요하다면 몸의 작은 솜털까지도 무기로 쓸 준비가 되어있는 그녀였다.
제게 하듯, 다른 사내에게도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이었다.
“너도 원하잖아?”
“그건 맞지만, 하여간 싫어. 당신이 진짜로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면.”
“…….”
“거 봐. 지금 당신 표정만 봐도 알겠거든.”
“이렇게까지 해주는데도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
금방 심드렁해진 라벨라가 이스카 얼굴 옆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화났나?’
생각보다 빠르게 인정하고 물러나는 라벨라에 이스카가 의문을 품었다.
신경이 쓰인 이스카가 라벨라를 따라 팔꿈치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조금 일으키려던 때.
흘러내린 머리칼을 한쪽 귀 뒤로 넘긴 라벨라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
촉촉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가슴팍에 닿은 건 순식간이었다.
말캉한 게 훑듯이 가슴 한가운데에서 아래로 천천히 미끄러졌다.
“……지금, 뭐 하는…….”
“얌전히 있어.”
라벨라가 이스카의 가슴팍을 손으로 가볍게 밀었다.
무력하게 쓰러진 그의 가슴 위로 촉, 촉, 흔적을 남기듯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닿는 곳마다 피부가 타들어 가듯 후끈거리면서 근육과 신경세포들이 기민하게 반응했다.
견디지 못한 이스카가 짓눌린 신음을 옅게 흘리고 나서야 라벨라의 입술이 떨어졌다.
“뭐지, 이건?”
“원해서 하는 거면 괜찮은 거 아니었어?”
“……원해서 한 거라고?”
“그래, 이 흉터에 대한 위로 정도로 생각해.”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씩 웃은 라벨라가 이스카의 볼을 톡톡 두들겼다.
그리고 침대 밑으로 발을 내린 뒤 가볍게 목을 잡아당기며 몸을 풀었다.
“…….”
다시 몸을 일으킨 이스카가 그 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볼 때였다.
“잘 자.”
고개만 뒤로 돌려 싱긋 웃은 라벨라가 느긋하게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허.”
이스카가 참았던 헛숨을 터트리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라벨라가 누워 있던 자리엔 그녀의 향기와 달콤한 체취가 가득했다.
공기에 노출된 피부에는 그녀의 입술이 닿았던 감촉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화륵 달아오른 몸의 열기가 갈 곳을 잃고 한곳으로 쏠렸다.
“아아…….”
앓는 소리를 낸 이스카가 찢을 것처럼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아아아, 진짜! 잠은 어떻게 자라고!”
라벨라. 라벨라. 라벨라.
이스카가 짓씹듯 원망스러운 이름을 읊조렸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한탄에 찬 탄식을 뱉는 것밖에 없었다.
* * *
“정말 평화로운 곳이에요.”
“그렇습니까?”
라벨라의 칭찬에 공자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라벨라가 공자와 단둘이 걷고 있는 곳은 마을의 한 주거 구역이었다.
이스카의 예언대로 공자는 안전한 곳만을 골라 라벨라를 데려갔다.
‘내가 가고 싶은데는 따로 있는데.’
마음 같아서는 그를 따돌리고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었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줄지어 있는 걸 보며 라벨라가 속으로 한숨을 쉴 때였다.
“고, 공자님!”
눈물범벅이 된 여인이 갑자기 두 사람의 앞에 엎어지듯 무릎을 꿇었다.
“우리 딸아이가 없어졌습니다. 딸아이 좀 찾아주세요, 제발.”
용케 브라트를 알아본 여인이 절박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정했다.
“……가장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은?”
공자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두서없는 여인의 말에도 공자는 짚이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여인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한 공자가 곧장 말에 오르려다 라벨라를 보곤 난감한 기색을 비쳤다.
편하게 움직이려 호위 기사도 없이 단둘만 나온 게 실수였다.
“급하신 일이면 혼자 성으로 돌아가도 괜찮아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야 나도 혼자 편하게 돌아보지. 라벨라가 덥석 미끼를 던졌으나 공자는 단호했다.
“……일단 함께 가시지요.”
잠시 고민하던 공자가 라벨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호라.’
공자와 함께 도착한 곳을 본 라벨라는 웃지 않으려 애썼다.
공자가 그녀를 데려온 곳은 유흥가였다. 제 수하들이 열심히 조사하고 있을 장소가 즐비해 있는 곳.
‘흥, 어차피 이렇게 오게 되고 마는 것을.’
이스카가 곁에 있다면 약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곳에 있는 자신을 본다면 그는 어떤 표정을 지으려나.
“일에 휘말리게 해서 미안합니다.”
라벨라를 말에서 내려 준 공자가 미안한 기색을 비쳤다.
“아니에요, 그런 말씀 마세요.”
“절대 내 옆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네, 그럴게요.”
라벨라에게 한 번 더 당부한 공자가 펍의 문을 열었다. 여인의 딸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이라 했다.
아직 바깥은 밝은데 내부는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앉을 수 있는 테이블이 없어 대부분 자기 잔을 들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독특한 형태였다.
주인장에게 간단한 탐문 조사를 마친 공자와 다시 바깥으로 나왔을 때였다.
“이봐, 정신 좀 차려.”
라벨라와 공자는 바로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힐끔 시선을 던졌다.
한 사내가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만취한 여인을 끌어안듯이 부축하고 있었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앞에 있는 사람들을 의식한 듯 유독 큰 목소리였다. 사내는 마치 다정한 연인처럼 여인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주변의 눈치를 한 번씩 살피는 게 영 수상쩍은 작태였다.
라벨라는 슬쩍 고개를 들어 공자를 바라봤다. 표정을 보아하니 공자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었다.
“따라가 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아무래도 그게 좋겠습니다.”
떠보듯 묻자 공자가 덥석 미끼를 물었다.
라벨라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