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너도 나도 오붓한 시간
“거래……라고 했습니까?”
카셰이가 눈썹을 찡그렸다가 의중을 확인하듯 이스카를 쳐다봤다.
팔짱을 낀 채 창가에 기대어 선 이스카는 지금 이 상황을 흥미로워하는 듯 보였다.
그 모습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인 카셰이가 다시 라벨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일단, 들어는 보지요.”
“이리 와. 우리는 한편이잖아?”
카셰이가 권하는 자리에 흔쾌히 앉은 라벨라가 무트를 보며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겼다.
“…….”
무트는 카셰이의 눈치를 보면서도 라벨라의 옆에 주섬주섬 자리했다.
“쿠즈네의 무기 거래 독점권을 제게 주세요.”
말간 얼굴을 한 라벨라가 깔끔하게 본론을 꺼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길드 ‘키르아’에 넘기라는 뜻이에요.”
“……키르아?”
한쪽 눈을 치켜뜬 카셰이가 이스카를 힐끔 쳐다봤다.
아무리 깊은 산속에 갇혀 지낸다 해도 키르아의 이름쯤은 알고 있었다.
‘황자님께서 왜, 어쩌다 키르아와 함께?’
하지만 답을 줘야 할 이스카는 긴 손가락으로 턱을 문지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음…… 그러니까.”
“라벨라에요.”
“그래요, 라벨라 양.”
카셰이가 아이를 어르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쿠즈네는 황실에 납품을 하기 때문에…….”
“알아요, 루비츠 황자와 거래하고 계시잖아요?”
정확히는 루비츠 황자를 사칭하는 누군가와겠지만.
“그쪽에 편지를 쓰시죠.”
“편지라니?”
“얼마 전, 무장한 밀수업자 무리가 쿠즈네를 공격했으며, 거기에는 쿠즈네를 지키던 황실의 병사들이 함께였다고.”
“그게 무슨…….”
“장로께서는 쿠즈네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키르아에 의뢰를 넣었으며, 앞으로는 키르아에 마을의 안전과 무기 거래를 맡길 생각이라고도 적으세요.”
“그런 요구를 들어 줄 리가…….”
“물론 충성심은 전과 똑같이 유지될 것이라고.”
“…….”
“황실에 있는 루비츠 황자께서 지키고 싶으신 게 진짜 쿠즈네라면,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겠죠?”
“지금 내게 도박을 하라는 건가요?”
“가끔은 스릴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죠.”
라벨라의 옆모습에서 자신만만함이 느껴졌다.
‘짧은 시간 안에 묘수를 찾아냈네.’
라벨라의 의도를 파악한 이스카는 짙은 미소를 피워냈다.
황실과 쿠즈네 양쪽 모두에게 진짜 루비츠 황자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쿠즈네를 가짜 루비츠 황자로부터 지킬 방법.
키르아를 전면에 내세우는 거였다.
“쉽게 생각하세요. 황실의 병사들이 해오던 일을 앞으로 키르아에서 하는 것뿐이에요.”
게다가 황태자의 욕구는 계속 충족시켜주니 한동안은 그의 눈을 속이는 게 가능했다.
“먼저 한 가지 묻고 싶은데, 키르아에서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제 라벨라는 그녀가 제일 갖고 싶어했던 걸 요구할 것이다.
“제게 쿠즈네의 진짜 무기를 만들어주세요.”
“!”
‘역시.’
혼란스러워 보이는 카셰이의 표정을 본 이스카는 웃음을 삼키려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 진짜 무기 또한, 황실에 납품할게요.”
“황실이라니…….”
“장로님께서 진짜 마음으로 충성하는, 그 상대에게요.”
라벨라가 씨익 웃으며 입꼬리를 늘였다.
‘그녀의 요구를 들어줘.’
웃음 띤 입가를 커다란 손으로 가린 이스카는 제게 의사를 묻는 카셰이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스카는 입을 맞춘 뒤 라벨라가 제게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당신은 내게 키르아의 이스카야, 아니면 루비츠 황자야?”
어쩐지, 그걸 왜 묻나 했다.
이스카는 그 질문에 제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똑똑히 기억했다.
“곧 약속한 100만 골드를 달성할 예정이야. 계약은 지켜야지 않아?”
“그럼 당신은 계속 내 곁에 있을 거란 뜻이네?”
그녀가 답지 않게 재차 확인까지 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거다.
이스카는 거래의 우위를 점한 라벨라를 바라보았다.
‘영악하기는.’
그래서 사랑스럽지.
이스카는 지금 당장 저 도톰한 입술을 집어삼킨 뒤 잘근 깨물고 싶은 심정이었다.
* * *
“그럼 잘 다녀와, 세츠.”
“…….”
“대답은 좀 하고 가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세츠의 빈자리를 보며 리텔니가 툴툴거렸다.
“그래도 고개는 까딱했잖아.”
이스카가 대신 변명해주며 리텔니의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황태자가 어떻게 나올까요?”
“글쎄.”
이스카가 병사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은 살려두었던 병사 하나의 손에 중요한 편지를 들려 지금 막 황궁으로 보냈다.
세츠는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그들의 뒤를 따른 참이었고.
“전 당분간 이곳에 머물러야겠군요.”
“그래, 대외적으로는 키르아라는 걸 잊지 말고.”
“하하,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참 대범한 여자야. 안 그래?”
“그러네요.”
막사 사이를 가로지르며 라벨라에 대한 감상을 털어놓던 두 사람은 곧 대화의 주인공을 다시 만났다.
“편지, 보냈어?”
“응.”
“그럼 이제 우리의 거래 이야기를 나눠볼까?”
라벨라의 말에 리텔니가 막사 주변의 사람을 물렸다.
조용해진 공간에 세 사람만이 남자 책상에 걸터앉은 라벨라가 다리를 꼬았다.
“원래 황실에 납품하는 가격에다 10% 얹겠어, 어때?”
“그 정도쯤은 흔쾌히.”
“그래, 쿠즈네의 무기를 갖게 됐잖아. 내가 많이 양보한 거 알지?”
“고맙게 생각해.”
팽팽한 기싸움을 펼치면서도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미소는 청량하기만 했다.
‘이스카 님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 기운이라니.’
리텔니는 또 한 번 라벨라에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라벨라, 정말 괜찮겠어?”
먼저 방향을 튼 건 이스카였다.
“황실이 우리 생각대로 움직여준다 해도, 키르아가 그들의 눈에 띄게 된 걸 썩 좋다고만 할 순 없어.”
이스카는 제 걱정을 숨기지 않았다.
“알아. 내가 그 정도 계산도 없이 일을 진행할 사람으로 보여?”
그녀는 퍽 불쾌해하는 표정이었다.
“물론 아니지.”
걱정을 해줘도.
이스카는 졌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 * *
“오셨습니까.”
“그래.”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서는 남자의 검은 머리가 가볍게 휘날렸다.
황금색 테두리에 화려한 장미가 수 놓인 소파에 털썩 앉은 남자는 망토를 벗어 던졌다.
“목욕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후우.”
허리를 숙인 후레이 자작의 말에 피곤한 몸을 일으킨 남자가 욕실로 향했다.
금방 나체가 된 탄탄한 몸이 욕조에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나가 봐.”
남자의 지시에 후레이 자작이 나머지 시종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주었다.
천천히 몸을 끌어내린 남자의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내가 고개를 다시 물 밖으로 빼내자 축 늘어진 은발 머리 아래 청초한 미모가 드러났다.
“전하, 당분간은 외부에 나가는 걸 자중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궁을 오래 비우는 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습니다.”
“…….”
“물론 허튼 생각을 하는 이는 없겠지만요.”
자작의 말을 듣던 남자가 미미하게 입술을 비틀었다.
“허튼 생각이라. 글쎄. 지금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몇 있는데.”
“지나친 염려이십니다. 지금도 전하를 뵙기 위해 찾아오는 귀족들이 많습니다.”
자작이 송구하다는 듯 허리를 더 깊숙이 숙였다.
키득 웃은 남자의 긴 손가락이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 우아한 몸짓이었다.
배불리 먹고 난 짐승처럼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 위로 조명이 어른거렸다.
“내가 황제가 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야. 폐하께서도 아직 저리 건재하시고.”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전하께선 제국 유일의 후계자이십니다.”
루카비 크로브 비스메르트. 임피리아 제국의 적통이자 제1황자로 1년 전 황태자가 된 그였다.
“유일? 그럴 리가.”
루카비가 코웃음 쳤다.
“…….”
“내가 모를 것 같아? 여전히 내 동생을 기다리는 자들이 있다는 걸.”
“전하, 하지만 그분은 이미 오래전에…….”
죽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당신 손에.
후레이 자작은 끝말을 아꼈다. 루카비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글쎄, 내 몸속에 흐르는 이 저주받은 피는 그리 말하지 않는데.”
젖은 팔을 들어 올려 빛 아래에 제 혈관을 비춰 본 루카비가 입꼬리 끝을 비싯 끌어올리며 웃었다.
이윽고 느긋했던 눈동자에 어두운 살기가 들어찼다.
“찾아내야 할 거야. 제국, 아니 이 대륙 전부를 뒤져서라도.”
“……네, 알겠습니다.”
“내 사랑스러운 아우님이 너무도 그립군.”
후레이 자작은 서늘해진 목덜미를 문지르고 싶은 본능을 억눌렀다.
“참,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다 했던가.”
“네, 전하. 비스코 백작과 모리나 후작입니다.”
바뀐 주제에 반색한 후레이 자작이 어깨의 긴장을 풀며 빠르게 대답했다.
“모리나 후작? 그자가 어쩐 일로?”
루카비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모리나 후작은 그의 동생, 루비츠를 지지하던 대표적인 귀족 중의 하나였다.
“비스코 백작과의 인연으로 오게 된 모양입니다. 저희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렇군.”
루카비의 긴 손가락이 붉은 입술 끝을 문질렀다.
“이참에 좋은 시간이나 보내볼까.”
“네, 좋은 생각이십니다.”
한 명의 귀족이라도 더 발밑에 꿇게 할 필요가 있었다.
후레이 자작은 몸을 일으키는 제 주군의 젖은 어깨 위에 커다란 망토를 둘러 주었다.
* * *
“임피리아의 황제는 대대로 피 웅덩이 위에 황위를 세웠지요.”
루카비가 차분하게 말하며 스테이크의 귀퉁이를 썰자 핏물이 선연하게 밴 붉은 육즙이 흘러나왔다.
황위에 오르기 위해 필연적으로 피를 묻혀야 하는 숙명.
제 아버지인 현 황제도 마찬가지였고, 그의 아버지, 또 그 위의 황제들도 모두 그랬다.
형제들을 제 손으로 숙청하거나, 제 아들의 손을 더럽히기 싫어 직접 다른 자식을 죽이거나.
어느 황제도 그 피의 저주를 피해 가지 못했다.
“참 저주받은 혈통이지 않습니까?”
내가 황위에 오르지 못하면, 죽는 것은 내가 된다.
루카비는 적당한 크기로 썬 스테이크 조각을 입가로 가져가며 태연하게 읊조렸다.
오늘 루카비의 사냥감이 된 모리나 후작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묵묵히 식사를 이어갔다.
“……저는 그런 황실의 역사가 참 싫습니다.”
쨍그랑.
접시 위에 올려진 나이프가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켰다.
모리나 후작이 진의를 파악하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루카비의 얼굴을 힐끗 살폈다.
큰 키에 비해 곱상하기만 한 얼굴은 마치 천사와도 같았다.
나긋한 말투와 간간이 입가에 걸리는 작은 미소는 훌륭한 성품이라 정평이 나 있는 황태자와 퍽 잘 어울렸다.
하지만, 모리나 후작은 그 소문이 진짜인지 의심스러웠다.
루카비가 다른 누구도 아닌 황태자였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건강하던 황자 루비츠가 병을 핑계로 황궁 깊숙이에 몸을 숨긴 탓에.
“전 소중한 아우와 힘을 합쳐 임피리아의 영광을 이어가고 싶었습니다.”
“전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군요. 정말 훌륭하십니다.”
비스코 백작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마치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것을 볼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황제 폐하께서도 전하의 그런 진심을 아시기 때문에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그는 당장 눈물이라도 흘릴 기세였다.
비스코 백작의 태도가 부담스러운 듯 루카비는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하다니요. 당연한 생각이겠지요. 저는 황가의 서글픈 역사가 제 대에서 끝났으면 합니다.”
루카비가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네. 저희도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니 제가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여러분께서 도와주시면 좋겠습니다.”
선한 얼굴의 루카비는 고요하게 웃으면서 만찬에 참여한 귀족들 하나하나 모두와 눈을 마주쳤다.
마지막으로 모리나 후작과 눈을 마주친 루카비가 인자한 미소를 내비쳤다.
“아우와 함께 협력하며 임피리아를 위해 노력해야겠지요.”
조용히 입을 다무는 귀족들을 보며 루카비는 흘리듯 말을 이었다.
“제발 아우가 병을 훌훌 털고 병상에서 일어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마치 형제의 깊은 우애가 눈앞에 그려질 듯 처연한 표정이었다.
* * *
“두 분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일어났어?”
“네, 모처럼 침대에서 잤더니 숙면을 취했지 뭡니까.”
숙소 앞에 나와 있던 다벨이 개운한 얼굴로 반겼다.
“좋은 아침이라고 하기엔 너무 늦었지?”
우두커니 서 있는 칸피덴을 본 라벨라가 그의 어깨를 툭 치며 반갑게 인사했다.
“……무슨 일이야?”
“그냥 오붓하게 데이트 좀 했어. 오늘 밤 길드로 돌아갈 거야.”
애매한 농담을 남긴 라벨라가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덕분에 칸피덴의 굳어버린 표정을 감상하는 건 오롯이 혼자 남은 이스카의 몫이었다.
물론 이스카는 그 농담을 정정해줄 생각 따위 없었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고.
“조금만 자고 나올게, 꽤 무리했거든.”
안 그래도 딱딱한 칸피덴의 얼굴이 더욱 굳는 걸 본 이스카는 눈썹만 까딱였다.
“진짜 연애라도 하실 참인가…….”
“…….”
사라진 두 사람의 뒤를 보며 다벨이 무심코 덧붙인 한마디가 칸피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