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숨소리마저 달콤한
마치 온도를 확인하듯 맞닿은 입술이 느리게 비벼졌다.
촉촉한 살결이 부딪치는 마찰음이 어두운 밤공기에 조용히 녹아들었다.
붙잡고 있던 라벨라의 손목을 놓아준 이스카는 손가락 끝을 세워 손목 안쪽을 뭉근하게 문질렀다.
“흣.”
간지러웠는지 얕은 신음을 흘린 라벨라가 하지 말라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어왔다.
멈추는 대신 라벨라의 손바닥 위를 느리게 간질이던 이스카가 포갰던 입술을 떨어트렸다.
“하아.”
잠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부족한 숨을 채운 라벨라가 눈을 떠 제 위에 자리한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번에도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이스카는 오롯이 저를 담고 있는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때? 내 진심, 확인했어?”
촘촘하게 박힌 풍성한 속눈썹 아래 투명한 금안이 달빛을 받아 더없이 반짝였다.
아름답고, 또 사랑스러운 모습.
“…….”
말없이 엉킨 시선을 즐기던 이스카는 라벨라의 벌어진 손가락 마디 사이로 제 기다란 손가락을 빈틈없이 끼워 넣었다.
부드러운 손놀림이었지만 단호했다.
꽉 잡아오는 힘에서 자신을 원하는 그의 갈망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좀 튕겨볼 생각은 없는 거야?”
입술 끝을 끌어올린 라벨라는 이스카의 멱살을 놓아준 뒤 자신 때문에 구겨진 옷을 톡톡 두들겨 정리하며 읊조렸다.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지금은 이 남자가 제게 한껏 취해야 할 때였으니까.
“글쎄…….”
열기를 품은 보랏빛 구슬이 감상하듯 라벨라를 꼼꼼하게 훑어내렸다.
이제 막 새 옷을 입은 듯 싱그러운 연둣빛 잔디 위에 흐드러진 백금발과 조금 상기되어 발갛게 익은 볼.
어느 것 하나 거부할 수 없이 매혹적이기만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은데.”
빠르게 달아오른 숨결이 입술 위로 흩어졌다.
“재미없기는.”
핀잔을 주면서도 라벨라는 이스카의 어깨를 짚은 손을 미끄러뜨려 그의 목을 휘감았다.
허락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이스카는 더 농밀하게 안을 파고들었다.
“읏.”
질척이며 섞이던 것이 꼴깍대며 목 뒤로 넘어가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질 만큼, 갈급하고 열정적인 입맞춤이었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고 일으켜 제 무릎 위에 앉히니 부드러운 백금발이 출렁이며 이스카의 뺨을 스쳤다.
몸이 밀착되자 라벨라가 호응하듯 넓은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그 사실이 이스카를 만족스럽게 했다.
숨겨두었던 욕망을 끄집어낸 이스카의 커다란 손이 가느다란 머리칼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다.
언제고 마음껏 만져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이스카는 손가락 사이로 기분 좋게 얽히는 결 좋은 금발머리를 만끽하며 자그마한 머리를 한층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헐떡이는 숨소리마저 사람을 애끓게 하는 여자였다.
그녀, 라벨라는.
* * *
‘흐응.’
이스카와 나란히 걷던 라벨라는 묘하게 차분해진 그를 힐끗 올려다봤다.
‘거기서 멈출 줄은 몰랐는데.’
새벽빛이 아스라이 올라오자 이스카는 깔끔하게 자신을 놓아주었다.
한껏 부풀어버린 그의 단단한 욕망을 충분히 느꼈기에 더욱 의외였다.
‘아직 자제할 이성은 있다 이건가.’
뭐, 약간 자존심이 상하는 것도 같고?
제 유혹에 쉽게 넘어온 그였다 보니 어디까지 받아줘야 하나 고민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어쩔 수 없지.’
키르아가 확실히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그의 마음을 붙들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라벨라는 어스름한 새벽빛이 비추는 이스카의 옆모습을 스륵 훑었다.
‘즐기기에 꽤 괜찮은 상대이기도 하니까.’
지금껏 저쪽 세계에서나 임피리아에서나 이스카만큼 여러모로 성에 차는 남자도 없기는 했다.
그러니 제게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이스카.”
생각을 정리한 라벨라가 이스카의 팔을 툭 건드렸다.
“쿠즈네의 장로를 만나러 갈 거야?”
“그럴 생각이야.”
덤덤하게 물으니 이스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마주쳐왔다.
이스카의 시선이 살짝 부풀어 오른 도톰한 입술에 닿았다.
“부었네.”
미안한 듯 손끝으로 조심스레 입술 표면을 쓸자 라벨라가 어깨만 으쓱였다.
이스카의 눈이 까마득하게 짙어졌다.
열정적으로 입을 맞췄던 기억이 꿈이었나 싶을 만큼 그녀는 태연한 태도였다.
어떻게 해야 저 마음을 가질까.
그저 몸을 섞는 것 정도로는 저 여자에게 어떤 의미조차 부여할 수 없겠지.
그걸 깨닫자 몸을 뜨겁게 달구던 열기가 식는 기분이었다.
이스카의 머릿속을 휘몰아치고 있는 폭풍 같은 고뇌를 라벨라가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이미 이스카에게서 관심을 끈 후였으니까.
‘으음?’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린 라벨라의 시야에 잿빛 머리가 들어왔다.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저런담?’
라벨라는 건물 모퉁이에 쥐새끼처럼 숨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무트를 주시하며 실소했다.
무트는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다음에 다다다 내달리다가 멈추어 다시 주변을 확인하길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밀수업자에게 쫓기고 있었지?’
검지 손가락으로 팔을 톡톡 두들기던 라벨라가 마음을 정하고 방향을 틀었다.
“난 숙소로 갈래. 대화 잘 나눠.”
“?”
미련 없이 몸을 돌린 라벨라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내일 봐.”
“…….”
황망해하는 이스카를 두고 라벨라는 총총걸음을 옮겼다.
‘이스카가 눈치채면 안 되는데.’
라벨라는 일부러 무트와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며 그가 무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길 바랐다.
이스카를 따라가 카셰이를 만나 봐야 지금은 무기 거래 독점권은커녕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이스카의 진짜 정체를 안 이상, 그의 마음을 붙들어 놓는 것 외에 제게도 유리한 패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 실마리는, 역시 무트에게 있을 것 같았다.
“후우.”
뒤에서 라벨라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무트는 혼자 긴박하게 쫓고 쫓기는 중이었다.
‘오늘은 꼭 성공하고 말 테다.’
무트는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장간으로 향했다.
‘어떻게든 황실로 갈 자금을 만들기만 하면 돼.’
쿠즈네의 검 몇 자루만 밀수업자에게 넘겨도 어마어마한 돈을 받을 수 있을 터.
차기 쿠즈네의 장로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이었으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장 할아버지만 해도 병사를 앞세운 루비츠 황자의 권력에 굴종해 가짜 무기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쿠즈네의 자부심을 지키는 것도 일단 마을 사람들이 넉넉하게 살 수 있을 때나 하는 거였다.
‘황궁으로 가서 황태자님이나 황제 폐하를 만나서 이야기하면 해결될 거야.’
루비츠 황자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고 다시 마을의 평화를 되찾으면 된다.
무트는 그 어느 때보다 차기 장로로서 책임감에 불타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대장간을 지키는 불침번을 따돌리지 못해 실패했지만, 이번에는 미리 수면초 즙을 탄 술을 건네주어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
‘역시.’
창고 앞에서 꾸벅꾸벅 조는 이를 발견한 무트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살금살금 걸어가 창고 안으로 들어선 무트는 커다란 천을 펼친 뒤 검 몇 자루를 올려놓고 둘둘 말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해.’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단단히 동여맨 무트가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흐응, 쿠즈네의 보물 창고가 이렇게 허술해도 되는 거야?”
“!”
“좀도둑이 너무 쉽게 들어오잖아.”
며칠 사이에 익숙해진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히익.”
덜덜 떨면서 몸을 돌렸다가 라벨라를 본 무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지금 그거, 훔치려던 거 맞지?”
“라, 라벨라 님.”
“눈앞에서 도둑질하는 걸 봐버렸으니 모르는 체할 수도 없고. 이를 어쩐다?”
비음을 흘리며 창고를 휘휘 둘러보던 라벨라가 눈앞에 놓인 검으로 손을 뻗었다.
“!”
그리고, 검을 손에 쥐고서야 라벨라는 이스카와 리텔니가 했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쿠즈네의 진짜 무기구나.’
제가 본 건 가짜였는데도 불구하고 임피리아 내에선 최고의 품질이었다.
그랬는데 진짜 쿠즈네의 것은 차원이 달랐다. 마치 검과 공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허억.”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러보는 라벨라의 행동을 오해한 무트가 재까닥 바닥에 엎드렸다.
“제발 봐주세요, 저는 마을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다.”
“음?”
라벨라는 한쪽 눈썹 끝을 끌어올렸다.
“네가 쿠즈네의 무기를 밀수업자에게 파는 게 왜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야?”
“전 황실에 가서 루비츠 황자의 악행을 밝혀야만 합니다.”
“……진심이야?”
“네!”
“후…….”
무기 상자 위에 걸터앉은 라벨라가 한심하다는 듯 무트를 내려다보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있지. 네 할아버지는 왜 가만히 있는 걸까?”
“……네?”
“생각이라는 걸 좀 해 봐. 네 할아버지가 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고분고분 따르는 건지.”
“그야 루비츠 황자가 협박했으니…….”
“그게 진짜라면 황실에서 루비츠 황자를 보호하려 들까, 아니면 네 이야기를 들어줄까?”
“…….”
“그리고 말이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무트를 본 라벨라가 혀를 끌끌 찼다.
“그 루비츠 황자라는 녀석,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황자를…… 아세요?”
‘제 존재를 비밀로 해달라고 했었지.’
무트의 질문에 라벨라는 픽 웃음을 흘렸다.
“소문이라는 건 쿠즈네에만 도는 건 아니거든.”
“…….”
“자, 도둑. 일단 넌 내게 대장간을 좀 안내해줘야겠어.”
“네? 안 됩니다! 대장간을 외부인에게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네 할아버지한테 널 데려가는 수밖에.”
“자, 잠시만요, 라벨라 님.”
“어떻게 할래? 선택은 네가 해.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네게 다른 해결책을 줄 수도 있어.”
“그게 무슨…….”
“키르아라고 들어 봤어?”
“키르아라면…….”
“그거 내 거야.”
“…….”
“못 믿겠으면 어쩔 수 없…….”
“……대장간으로 모시겠습니다.”
라벨라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내가 장담하는데, 네가 지금까지 한 짓 중에 제일 잘한 선택이 될 거야.”
* * *
“애를 아주 구워삶네.”
대장간 쪽으로 사라지는 두 사람을 보며 이스카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갑자기 자리를 뜨는 라벨라가 이상해서 뒤를 밟은 참이었다.
“그 루비츠 황자라는 녀석,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어쨌든 따라온 성과가 있었다. 라벨라의 그 한마디를 듣게 되었으므로.
툭 내뱉는 그 말이 왜 그리 사랑스럽게 들리는지, 마음에 쿡 박혀버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 자라나기 시작한다.
혹 그녀가 차메르가 제게 건넨 또 다른 복수의 저주라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카셰이와 상황을 정리해야겠어.’
저 순진한 꼬마가 또 위험한 사고를 치게 둘 수는 없었다.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이스카를 보자마자 카셰이가 불퉁한 얼굴로 물었다.
밤이 시작되자마자 찾아왔던 제 주군은 아침 해가 떠오르려 할 때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이런저런 바쁜 일?”
“……그래서, 해결은 하신 겁니까?”
“아직.”
한숨을 푹 내쉬며 묻는 말에 이스카가 빙긋 웃었다.
“카셰이.”
“네, 말씀하십시오.”
“어쩌다 내 병사들이 쿠즈네를 포위하고 가짜 무기를 거래하게 된 거지?”
“……송구합니다.”
허리를 깊이 숙인 카셰이가 고개를 조아렸다.
“무엇이? 마을 사람들의 오해를 풀지 않은 것? 아니면…….”
“황태자님의 명령이었습니다.”
“…….”
입을 다문 이스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이스카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뗐다.
가슴에 아직 남아 있는 흉터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황자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신 이유를 압니다.”
생사를 넘나들 만큼 크게 다친 황자가 쿠즈네에 숨어든 이후, 황태자는 종종 사람을 보내 쿠즈네를 압박해 왔다.
아무것도 모른다며 버티기를 반복하던 때, 황자는 부상을 채 회복하기도 전에 제 모습을 감췄다.
“황태자께서 요구하신 건 하나였습니다. 본인께 쿠즈네의 충성을 증명할 것.”
“…….”
“황자님의 생사도 모르는 와중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무기가 가짜라는 걸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짓을…….”
침음한 이스카가 겨우 말을 이었다.
“밀수업자들이 몰려드는 걸 보고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적어도 황태자께서 필요로 하는 게 무기는 아니라는 판단이었습니다.”
카셰이가 씁쓸하게 읊조렸다.
“혹, 일이 틀어진다면…… 목숨을 내놓을 작정이었습니다. 아직 손주 녀석이 모자란 게 걱정이긴 합니다만, 저야 오래 살지 않았습니까.”
“카셰이. 자네가 죽을 각오를 하기엔 그 녀석…… 많이 모자라던데.”
“그래서 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무거워진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이스카의 노력에 카셰이가 기꺼이 화답했다.
“카셰이, 사실 자네를 만날 생각은 아직 없었어.”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아무 소식도 전하지 않은 거,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괜찮습니다. 이토록 무사하신 걸 확인했으니까요.”
“…….”
“앞으로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일단은…….”
이스카가 무거워진 입을 열려던 때였다.
“안에 계시죠?”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와 낭랑한 목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라벨라?”
벌써 대장간 구경이 끝났나.
이스카가 호기심을 드러냈다.
“……들어오시죠.”
카셰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아침부터 무슨 일입니까?”
카셰이는 라벨라와 허옇게 뜬 얼굴을 한 무트를 번갈아 보며 의아해졌다.
“거래 요청을 하러 왔어요.”
그녀의 새하얀 얼굴 위에 피어난 건 그 어느 때보다 상큼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