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유혹해 볼까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오려 하더군요. 일단 입구에 붙잡아 두고 있는 상태입니다.”
“정체는?”
“거래 운운하는 걸 보면 원래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녀석들인 것 같습니다.”
리텔니는 걸음을 서두르며 병사에게 보고를 받았다.
루비츠를 사칭하는 병사 때문에 이스카를 빼내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부터 시작해서 키르아의 대장을 대동하고 나타난 주군까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거푸 터지는 바람에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가뜩이나 예민한 상태인데, 제 뒤를 따라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두 남녀가 리텔니의 신경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저 사람이 당신 오른팔이야?”
“그런 셈이지.”
두 남녀의 말투는 참으로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흐응.”
“저래 보여도 꽤 능력 있는 녀석이야.”
“흐으음.”
라벨라의 반응이 석연치 않자 이스카가 한마디를 보탰다. 그러자 라벨라가 더욱 못 믿겠다는 듯 비음을 흘렸다.
“…….”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대화에 리텔니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그래, 지금 저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입구에 모여 있는 무리를 본 리텔니가 두 남녀의 대화를 애써 못 들은 체하며 외면했다.
“무슨 일이지?”
뒤늦게 등장한 리텔니가 목적을 묻자 무리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당신, 보던 얼굴이 아니네?”
“아. 오늘부로 순환 근무를 하게 돼서 말이야. 일단 안으로 들어가지.”
한눈에 봐도 잡상인의 느낌이 물씬 풍기는 녀석들이었다.
경계심을 읽은 리텔니가 자연스럽게 안으로 무리를 안내했다.
“순환근무라니. 몇 년간 없던 일인데.”
사내 중 하나가 떠보듯 말을 꺼냈다.
“아아. 전에 있던 녀석이 이걸 빼돌리던 걸 들켰거든.”
리텔니가 동그랗게 말아 금전 모양을 만든 손가락을 슬쩍 흔들어 보였다.
“쯧, 그럴 줄 알았지.”
그러자 순순히 수긍한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혀를 찼다.
“녀석이 급하게 잡혀가는 바람에 내용 전달을 제대로 못 받았으니 자네들이 이해해. 높은 분 지시 받는 우리 입장이라는 게, 좀 그래, 응?”
“빌어먹는 인생은 어딜 가나 힘들구만.”
리텔니가 은근슬쩍 능글거리자 사내들이 동조하며 위로를 건넸다.
순식간에 사내들의 경계심을 풀어내는 리텔니를 보며 라벨라가 감탄에 찬 시선을 보냈다.
‘제법 하는데?’
‘거 봐.’
이스카와 눈빛으로 대화를 나눈 라벨라가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사내들에게 얼굴이 띄지 않도록 어느 정도 떨어진 거리였다.
‘따라오길 잘했지?’
‘흐응, 우리 황자님께서 뭘 꾸미시는 건지 좀 볼까?’
거들먹거리는 이스카의 장난기 섞인 눈빛을 본 라벨라가 입술 끝을 길게 늘였다.
‘재미있을 거야.’
이스카가 장담한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는 리텔니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라벨라가 이스카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그런데, 저쪽에 숨어 있는 녀석은 뭐야? 괜찮은 거야?”
“!”
라벨라의 시선이 설핏 가리키는 곳을 본 이스카는 헛웃음을 삼켰다.
‘이거야 원. 제국 최고의 그림자라는 별명이 울겠어.’
세츠의 기척까지 읽어낼 줄이야.
“괜찮아, 내 사람이야. 다음에 기회가 되면 소개해줄게.”
이스카가 곧 입가에 미소를 띠며 설명했다.
코끝이 스칠 것처럼 가까운 거리에서 보게 된 이스카의 미소에 라벨라는 순간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내 사람.’
이스카가 무심코 뱉은 그 한마디가 이상하게 잔향을 남겼다.
그러고 보니, 리텔니란 녀석을 보는 시선도 어딘지 모르게 따뜻했던 것도 같고.
‘제 수하들을 꽤 아끼는 모양이네.’
“왜 그렇게 봐? 사람 설레게.”
“아무것도.”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묻는 이스카에 라벨라가 뒤늦게 미소를 만들어냈다.
“또 가짜 웃음.”
“……쓸데없이 그런 거 관찰하지 말고 저기에나 집중해.”
라벨라가 짓궂게 웃는 이스카의 볼을 쿡 찔러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그 덕에 웃음기 섞인 이스카의 시선이 다시 열심히 일하는 제 수하에게로 향했다.
“그래서, 여기 온 용건은?”
“뭐야, 그것도 전달 못 받았어? 이거, 물건도 준비 안 된 거 아냐?”
‘역시 그것인가.’
리텔니는 막사 안에 쌓여 있던 무기를 떠올렸다.
“필요한 수량이 얼만데?”
“여기.”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품에 있던 종이를 꺼내 휙 던졌다.
펼쳐보니 예상대로 필요한 무기 수량이 적혀 있었다.
리텔니는 종이를 다시 둘둘 말아 옆의 수하에게 건넸다.
‘떠 봐.’
사내들의 시선을 피해 주문서를 받아 든 이스카가 리텔니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산속에서 시체가 발견 됐는데 말이야.”
“아아, 그 녀석들.”
이스카의 지시대로 리텔니가 미끼를 툭 던지자 녀석들이 덥석 물었다.
이스카가 무트를 구하면서 처리한 밀수업자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 짓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그 자식들, 대단한 거래처를 문 것처럼 호들갑 떨더니 어디 위험한 곳과 엮인 건지, 그렇게 개죽음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사내가 비열하게 웃는 걸 보니 동료는 아닌 모양이었다.
“거래는 그냥 안전한 게 최고라고. 안 그래? 자, 그럼 물건부터 확인하실까.”
사내의 요청에 리텔니가 눈짓하자 수하들 몇 명이 막사를 벗어났다가 무기 상자를 들고 돌아왔다.
“좋아. 그럼 우리 거래는 계속되는 거지?”
흡족한 얼굴로 무기를 확인한 사내가 리텔니에게 돈주머니를 건넨 뒤 확답을 구하듯 물었다.
“물론이지.”
“그럼 또 보자고.”
리텔니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기를 챙긴 사내들이 만족스러워하며 떠났다.
사내들이 사라지고 난 뒤, 다른 병사들까지 모두 물린 후에야 이스카와 라벨라는 무기 상자를 확인했다.
“쿠즈네의 무기가 아니군.”
“네, 그렇습니다.”
“쿠즈네의 무기인 것처럼 속여서 밀수업자에게 팔고 있었다는 이야기네.”
집어 들었던 검을 툭 내던진 이스카가 어이없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가짜라고?”
라벨라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그래, 라벨라 당신이라면 구분할 수 있을 거야.”
“무예에 능한 사람은 만져보기만 해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거든요.”
라벨라에게 거리낌 없이 상황을 공유하는 제 주군에 리텔니가 눈치껏 말을 보태며 이해를 도왔다.
“흐흥, 이제 대화 나눌 정신이 좀 드셨나 보네.”
라벨라가 놀리듯 뱉은 말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리텔니가 그녀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리텔니입니다. 이스카 님의 보좌를 맡고 있습니다.”
정중하게 예를 갖춘 리텔니가 허리를 숙이고는 라벨라의 손을 가볍게 잡아 들었다.
오랜만에 귀족의 모습으로 돌아간 리텔니가 라벨라의 손등에 입을 맞추려던 찰나.
스릉.
긴 검 하나가 리텔니의 입술 바로 앞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졸지에 차가운 칼날에 입을 맞출 뻔했던 리텔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눈에 거슬리니까 그 인사는 하지 않는 것으로.”
서늘한 미소를 장착한 이스카가 어서 떨어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검 끝을 까딱거렸다.
리텔니의 불퉁한 시선이 이스카에게 닿자 라벨라가 싱긋 웃으며 제 손을 빼냈다.
“이해해요, 아무래도 그쪽 상관이 날 너무 좋아하는 모양이니.”
“어쨌든, 어떻게 된 건지 상황 설명은 해주셔야 할 겁니다.”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일까.
한숨을 폭 내쉰 리텔니가 이스카에게 엄포를 놓았다.
예의를 갖추긴 해도 라벨라를 믿어도 되는가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이 일부터 해결하자고.”
이스카의 턱 끝이 쌓인 무기들을 가리켰다.
“왜 내 이름을 팔았는지, 이 가짜들을 판 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아야지 않겠어?”
“네, 조사하고 있습니다.”
“그래, 카셰이와도 하다 만 대화를 계속 나눠봐야겠군.”
“네. 쿠즈네의 표식은 아무나 흉내낼 수 잇는 게 아니니까요.”
“잠깐, 잠깐. 그래서 이 무기들이 쿠즈네에서 만든 게 맞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복잡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라벨라가 제동을 걸었다.
“정확히 말하면 쿠즈네에서 만든 것은 맞지만 진짜 쿠즈네의 무기는 아닙니다.”
“그럼 아까 그 병사들은? 당신 부하들 아니야?”
리텔니를 보던 라벨라가 휙 고개를 돌려 이스카를 노려보았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뒤에 도착한 녀석들이 내 병사였……지?”
“하?”
“미안, 내게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
뒤통수를 얼얼하게 맞은 것 같은 기분에 라벨라가 눈을 치켜뜨자 이스카가 퍽 미안한 표정을 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 내 존재가 알려지면 곤란해.”
“어째 귀찮은 일에 말려든 기분이네.”
“비밀 지켜줄 거지?”
이스카는 라벨라의 코앞에서 싱글거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마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강아지 같은 꼴이었다. 정확히는 강아지의 탈을 쓴 범이겠으나.
‘다벨의 말이 진짜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 주군의 모습에 리텔니만이 기겁을 할 뿐이었다.
“이 값은 크게 칠 거야.”
아직 계산을 끝내기 전이니 라벨라는 일단 그의 청을 들어주기로 했다.
“말이라고. 자, 그럼 카셰이에게 가볼까.”
“전 빼주십쇼. 그분은 이스카 님을 못 때리니 절 때릴 거라고요.”
“좋을 대로. 대신 내일 오전이면 내가 알고 싶어 하는 걸 다 가져 오겠지?”
“…….”
“그럼 수고.”
눈으로 욕하는 리텔니를 보며 씩 웃은 이스카가 막사를 빠져나왔다.
“또 뵙겠습니다, 라벨라 님.”
“…….”
그래도 제게는 끝까지 예의를 갖추는 리텔니에게 눈웃음을 지어 준 라벨라도 이스카의 뒤를 따라 나왔다.
‘흐음.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더 복잡해 보이는데.’
느른하게 기지개하는 이스카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익숙한 듯 낯선 모습.
그가 루비츠 황자라고 한들, 제게는 그저 함께 키르아의 일을 하는 이스카일 뿐이었다.
다만.
“나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면 안 되는 사람이거든.”
덤덤한 목소리에서 묻어나던 희미한 씁쓸함과 덩달아 주먹을 말아쥐는 리텔니의 모습이 찝찝하게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우연히 보았던 그의 가슴팍에 남아 있던 자상의 흔적도.
황권을 노리는 이스카의 상황을 알게 되고 나니 이스카에게 벌어졌을 일들이 대충 짐작이 갔다.
이스카의 대척점에 있을 존재.
‘황제, 혹은 황태자. 가장 확률이 높은 건…… 역시 황태자인가.’
원래의 그녀였다면 그 사람을 찾아가 거래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황실의 문제다. 그것도 라벨라에게는 낯선 땅인 임피리아.
아무리 키르아가 유명해지고 있다고 한들 시도 조차 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지금 상황에서는 이스카와 깊이 얽히고 만 상태나 다름없었고.
만약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돌아선다면, 그가 키르아에게 어떤 제재를 가해올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라벨라는 이스카와 나란히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그를 괜히 길드에 끌어들였나 싶기도 하지만 어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시간을 질질 끌며 경우의 수를 따지느니 오히려 빠르게 마음을 정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스카.”
“음?”
라벨라가 서서히 뒷걸음질 치며 이스카와 거리를 벌렸다.
“우리 계약 내용 기억해?”
“물론.”
“내가 원할 때는 언제든 대련에 응하기로 했지.”
“……지금?”
연애 조항을 떠올렸던 이스카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긴 했지만 라벨라가 대련을 요구해 온 적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없었다.
“전력을 다할 거라고 약속해.”
“라벨라.”
“내 입에서 긍정의 답을 듣고 싶다면 더더욱.”
“하.”
반은 협박이었다. 이스카가 한숨을 내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라벨라가 마음먹었다면 거역할 수 없을 터였다.
언제든 허리춤의 검을 꺼낼 것처럼 자세를 잡는 이스카를 본 라벨라가 빠르게 달려들었다.
채앵.
검붙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몇 번의 합을 주고 받는 동안 라벨라는 이스카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었다.
‘올곧고.’
축적된 경험을 통해 몸에 새겨진 본능이었다.
죽일 듯이 극한 상황에서 치고 받다 보면 상대의 본성을 알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다정한 편이네.’
급소를 노릴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음에도 이스카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꿋꿋이 버텼다.
그간 제가 느낀 이스카와 별다를 바 없었다.
“전력을 다하라고 했잖아.”
“이크.”
라벨라의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이스카의 옆구리를 스치며 셔츠 자락이 찢어졌다.
라벨라의 공격을 피하면서도 이스카는 연신 라벨라의 표정을 살폈다.
‘딱히 죽일 목적은 아닌 듯한데.’
라벨라의 관자놀이 부근에서 또르르 떨어지는 땀방울을 보며 이스카는 심란해졌다.
이 갑작스러운 대련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탓이었다.
“후.”
하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몇 날 며칠이 가도 끝나지 않겠지.
옅게 한숨을 쉰 이스카가 결심한 듯 라벨라의 빈틈을 노렸다.
“미안, 라벨라.”
순식간이었다.
“!”
풀숲 위로 쓰러져버린 라벨라는 잠시 상황 파악을 하느라 눈을 깜빡여야 했다.
“…….”
제 몸 위에 자리한 채 손목을 조심스레 붙잡고 있는 이스카를 본 라벨라는 곧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였다. 굴욕적인 것보다는 묘한 고양감이 샘솟았다.
덕분에 이스카의 표정이 난감해진 건 당연지사였다.
“……왜 웃는 거지?”
“이스카.”
“?”
“임피리아 내에 당신보다 강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글쎄.”
“내가 당신을 쓰러뜨리면, 임피리아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내가 되려나?”
“…….”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보니 이스카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답을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라벨라는 유일하게 자신보다 강한 남자이자 황권을 쥐려 하는 사내를 올려다봤다.
‘본성도 썩 나쁘지 않고. 이 정도면 도박을 해 볼 만하지.’
라벨라는 잡혀 있던 한쪽 손을 빼내 이스카의 멱살을 잡고 끌어 내렸다.
“!”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스카의 보랏빛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라벨라는 조금 더 가까이 그를 끌어당겼다.
“당신을 유혹해 볼 마음이 들었어.”
“진심인가?”
이스카가 눈을 가늘게 뜬 탓에 보랏빛이 사라질 듯 없어졌다.
“확인해 볼래?”
유혹하듯 긴 속눈썹을 내리깐 라벨라가 마치 연인의 키스를 기다리는 여인처럼 눈을 감았다.
“그럼 사양 않고.”
라벨라의 붉은 입술 위에 쿡 웃음을 흘린 이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입술이 스치듯 닿았다가, 곧 깊이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