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내가 네게 미친다면
‘일단 대장간을 한번 둘러보고, 그다음에는 광산 쪽도 가보는 게 좋겠어.’
늦은 밤, 라벨라는 간단하게 점검을 마친 무기들을 몸 여기저기에 다시 장착하며 해야 할 일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 루비츠 황자의 병사들이라는…… 그 녀석들도 한번 캐봐야겠지?’
아무래도 바쁜 밤이 될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라벨라가 조용히 침실 문을 열려던 때, 그녀보다 한발 앞서 옆 방의 문이 열렸다.
‘이스카?’
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이스카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그냥 잠깐 나왔다고 생각하기엔 서서히 기척을 죽이는 게 못내 의심스러웠다.
‘……따라가 볼까?’
짧은 고민을 끝낸 라벨라는 멀어지는 이스카를 조심스레 뒤쫓았다.
‘장로의 집?’
오래 지나지 않아 이스카가 들어간 곳은 의외의 장소였다.
“제가 황자님을 못 알아볼 리 없잖습니까?”
“음?”
이스카가 쿠즈네의 장로와 나누는 대화는 물론 더 의외였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라벨라는 흘려듣던 두 사람의 대화에 조금 더 집중했다.
“비스메르트의 충신, 카셰이 카바치. 루비츠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
‘루비츠 황자라고?’
라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루비츠 황자의 병사입니다.”
“이게 다, 그 루비츠 황자, 개자식 때문입니다!”
무트가 했던 말들이 연속으로 라벨라의 뇌리를 스쳤다.
‘흐응, 지금 내가 뭘 들은 거지?’
정체가 의심스러운 녀석이다 싶기는 했지만, 제국의 황자라니.
솔직히 거기까지 예상하진 못했다.
어쩐지 이 바닥에서 구르는 녀석답지 않게 고상한 맛이 있다 싶더니만.
‘제2황자라…… 그런 녀석이 왜 황궁에 안 붙어 있고 저러고 다니는 거지? 우리 길드엔 왜 들어온 거고?’
라벨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황실에서 병력을 모으는 건 그럼 누구일까.’
잠시 생각에 빠진 탓에 이스카의 기척이 달라진 걸 눈치채지 못했다.
미처 자리를 피하지 못한 라벨라는 이스카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이런.”
네가 그 개자식이냐며 묻는 라벨라의 말에 이스카는 짧게 혀를 찼다.
방 안에 있는 걸 확인하고 나왔는데, 언제 또 뒤를 밟은 건지.
하여간 예측이 안 되는 여자였다.
“라벨라. 일단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는데. 개자식이란 건 그 녀석의 오해거든?”
“그래?”
라벨라는 입술 끝을 매끄럽게 미끄러트렸다.
자신을 보자마자 실수했다는 듯 난감한 얼굴이었다.
보아하니 제 정체를 일부러 알린 것 같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스카가 개자식이든 아니든 그건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라벨라에게는 얼결에 제 손에 떨어진 이 대박 패를 어떻게 굴릴지가 더 중요했다.
‘안 들켰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시간을 두고 더 이득이 되는 쪽으로 고민해 볼 수 있었겠으나, 이미 일은 벌어졌고.
계산기를 두들기는 라벨라의 머릿속이 팽글팽글 빠르게 돌아갔다.
‘바로 공격하지는 않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이스카가 실소했다. 자신을 어떻게 이용할지 고민하는 라벨라의 속내가 훤히 보였다.
‘이렇게 빨리 알릴 생각은 없었는데. 너무 안일했군.’
바로 발밑의 창가에서 카셰이가 불안하게 서성이는 걸 느낀 이스카는 짧은 반성을 끝냈다.
“우리 나눠야 할 말이 많을 것 같은데, 자리를 옮기는 게 어때.”
“그러지 뭐. 어디로 갈까?”
이스카의 제안에 라벨라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목덜미를 뜯기지 않으려면 어떤 패를 내밀어야 할까.
자리에서 일어나 어여쁘게 웃는 라벨라를 보는 이스카의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졌다.
이럴 때는 어쩔 수 없이 직진하는 게 답이었다.
“난 황위에 오를 생각이야.”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으로 자리를 옮기자마자 이스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라벨라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흠?”
라벨라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왜?”
“글쎄, 그렇게 야망이 커 보이는 타입은 아니었던 것 같아서.”
“당신 눈엔 내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는 걸까.”
눈꼬리를 접는 라벨라를 보며 픽 웃은 이스카가 덤덤히 대꾸하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황위를 욕심내는 건 어쩔 수 없이 운명에 등이 떠밀린 탓이었으니.
“라벨라.”
라벨라는 특유의 가벼움을 순식간에 지워버린 이스카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쪽이 진짜 모습인가.’
함께 축제에 갔던 날, 해가 진 언덕 위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진중하고 무거웠던.
“당신의 예상처럼 임피리아엔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라.”
“…….”
“하지만 난 전쟁을 원치 않아. 흘리는 피가 적은, 깔끔한 승리를 원해.”
“이상주의자네.”
“그럴지도. 그래서 난 당신이 필요해.”
“흠, 널 대신해서 손을 더럽힐 사람이 필요하다는 건가? 나더러 네 뒤를 닦아주라는 거야?”
“……라벨라.”
적나라하고 직설적인 표현에 이스카가 허리춤을 짚은 채 끙 앓는 소리를 냈다.
“지난번 절벽에서도 생각한 거지만, 대체 당신은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음, 글쎄?”
도톰한 입술 사이로 손가락 끝을 가져가며 되묻는 그녀는 자못 순진해 보였다.
“그럴 목적이었으면 굳이 내가 직접 키르아에 들어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돈으로 고용하면 될 일이지.”
“그것도 그렇네.”
“세력을 불리는 중이야. 당신이 실력자들을 길드로 모으는 것처럼, 나도 마찬가지로.”
이스카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라벨라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당장 검으로 손을 뻗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제 말에 쉬이 수긍하는 눈치도 아니었다.
라벨라는 제가 듣는 말의 진실 여부를 가늠하는 듯 보였다.
‘차메르, 그자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 전이라 그나마 다행이군.’
그와의 거래를 라벨라에게 털어놓는 건, 그녀의 신뢰를 더 얻은 다음이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그 이야기를 꺼내도 된다는 확신이 없으니 이스카는 일단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황자님께서 판단하시기엔, 내가 꽤 유용한 존재였다 이건가?”
“꽤?”
이스카가 코웃음 쳤다.
“겸손한 척할 필요 없어, 라벨라. 고작 그 정도일 리가 없잖아? 내가 직접 몸담고 지켜봤으니.”
살짝 비꼬면서 묻는 그녀의 말에 이스카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당신도, 당신이 키운 키르아도 마음에 들어. 진심으로.”
제 정체를 알고도 태도 변화는커녕,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는 더 마음에 들었고.
“하긴.”
라벨라는 제게 성큼 다가오는 이스카를 올려다보며 팔짱을 꼈다.
“그럼 우리 황자님께서 내게 줄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을 원하는데?”
“흐음, 글쎄.”
고민하는 듯 눈을 내리까는 라벨라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선 이스카가 부드럽게 그녀의 턱을 쥐어 들어 올렸다.
“잘 생각해 봐, 라벨라. 여인에게 미친 황제가 어디까지 하는지는 역사만 봐도 알 수 있지.”
사랑스러운 금안을 마주 보며 이스카는 매혹적으로 웃었다.
“그리고 난 라벨라, 당신에게 끌리고 있고.”
“…….”
이스카가 고개를 삐딱하게 내린 탓에 얽힌 시선의 거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라벨라의 턱선을 타고 올라가 굳게 다물린 붉은 입술을 느른하게 문질렀다.
“그러니 내가 당신에게 흠뻑 빠지도록 제대로 유혹해 보는 건 어때. 당신이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흐응, 상황이 바뀐 것 같네?”
분명 잘 보여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당신에게 매력적인 제안 아닌가?”
“그렇지.”
제 턱을 쥔 손을 은근하게 쓰다듬던 라벨라의 작은 손이 곧 감싸듯이 그 위를 덮었다.
“물론 당신이, 지금, 황제라면 말이야.”
라벨라가 이스카의 손을 떼어내며 냉정하게 읊조렸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상황을 두고 거래를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차갑기도 하지.”
서운한 투로 중얼거리면서도 이스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이런 여자이기에 끌리는 거였다.
그저 감상에 빠져드는 여자가 아니라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는 여자라서.
“내가 황위에 오르는 게, 당신에게도 키르아에게도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겠지.”
“부정은 하지 않겠어.”
“내 제안은 당분간 유효할 예정이야. 열심히 고민해 보라고.”
“어머, 고마워라.”
계산기를 더 두드려 볼 시간을 벌게 된 라벨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지을 때였다.
작은 새 한 마리가 포로롱 날아와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이스카가 손가락을 내밀자 새는 기다렸다는 듯 그 위로 내려앉았다.
‘어디서 많이 보던…… 아.’
길드의 숙소와 약초상 앞에서 봤던 그 새였다.
“흠, 가봐야 할 곳이 생겼는데.”
이스카가 라벨라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같이 갈래?”
그동안 익히 보아 온 이스카 특유의 장난기가 섞인 듯한 웃음이었다.
* * *
“안 오시려는 모양이군.”
한참이나 창가에 서서 사라진 이스카를 기다리던 카셰이는 털썩 의자에 앉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사라지신 건지, 원.”
아직 들어야 할 말이 많이 남은 터라 마음이 초조했다.
“참, 황후 폐하께도 소식을 전해드려야…… 아니, 아니지.”
곧장 책상으로 가 깃펜을 집어 든 카셰이가 뒤늦게 고개를 내저었다.
루비츠 황자가 갑자기 사라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을 터. 대화를 충분히 나눈 뒤에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시 자리를 잡고 앉은 카셰이는 긴 수염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흐흠.’
연락도 없이 사라졌던 황자가 제 발로 쿠즈네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일행에 껴 있던 여인. 백금발에 투명한 금안을 가진 자.
카셰이의 주름진 눈꺼풀에 퍼뜩 힘이 들어갔다.
“역시 그것 외에는 이유가 없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카셰이가 방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창문을 내린 뒤 덧문까지 내려 잠갔다.
방을 밀실로 만든 카셰이가 책상 아래 깔린 카펫을 걷어내자 정사각형 모양의 나무 문이 드러났다.
대대로 쿠즈네의 장로에게만 전해져 오는 비밀 통로였다.
문의 존재를 알게 된다 하더라도 복잡한 미로인 탓에 길을 알지 못하면 절대 살아서 나올 수 없는 위험한 곳이었다.
카셰이는 망설임 없이 사다리에 발을 걸쳤다.
머리 위의 문을 닫고 내려온 카셰이는 발이 땅에 닿자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횃불을 찾아 불을 붙인 그가 컴컴하게 뻗은 통로를 노려보다시피 했다.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을 만큼 좁은 길을 따라 걷기를 한참.
곧 커다랗게 뚫린 공간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
카셰이는 횃불을 들어 올려 집 몇 채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은 곳을 꽉 채우고 있는 투명한 결정체를 비췄다.
결정체를 칭칭 감고 있는 커다란 쇠사슬들이 광산으로 연결되는 벽을 관통하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쇠사슬이 웅웅거리며 잘게 흔들렸다. 결정체에서 빠져나온 마력이 흘러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렇게 흘러간 마력은 쿠즈네의 광산으로 스며든다. 쿠즈네의 무기가 강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카셰이는 결정체 안에 있는 마력의 원천을 확인했다.
긴 백금발과 하얀 피부. 감은 눈 뒤에 있을 투명한 금안.
황자와 함께 온 여인과 상당히 닮은 모습이었다.
‘대마법사 차메르.’
수백 년 동안 이곳에 봉인되어 있었으며, 그 오랜 세월 동안 쿠즈네에서 비밀리에 지켜 온 존재.
‘임피리아에 평화가 찾아오기를.’
카셰이는 쿠즈네의 원칙을 깨고 루비츠 황자를 차메르와 만나게 한 제 결정이 부디 옳은 선택이었기를 빌었다.
* * *
“리텔리 님, 찾았습니다.”
“그래?”
병사가 안내하는 막사로 들어선 리텔니의 눈이 가늘어졌다.
“흠, 이건…….”
안에는 각종 무기가 들어 있는 커다란 상자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주둔지의 병사들이 사용한다기엔 지나치게 많은 양이었다.
“세츠.”
“쿠즈네의 것이 아닙니다.”
검 하나를 집어 든 세츠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렇지? 쿠즈네의 표식이 있기는 한데.”
리텔니가 턱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비츠 황자의 군사를 사칭하는 이들을 한꺼번에 정리한 뒤 그들의 주둔지를 샅샅이 털어낸 후였다.
“오실 때가 됐으니 같이 의논해 보자고.”
전령새를 날려 보낸 시간을 가늠해 본 리텔니가 쭈그리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리텔니.”
“아, 오셨군요.”
거참, 언급하자마자 나타나다니 악마가 따로 없지 않은가.
때마침 막사 천을 거둬내며 등장하는 주인공에 리텔니가 혀를 내둘렀다.
“몇 가지 이상한 점이 있어 보고 드리려던…….”
이스카 쪽으로 몸을 돌리던 리텔니가 라벨라를 발견하고는 말을 멈췄다.
당혹스러운 눈빛이 어떻게 된 건지를 묻자 이스카가 태연하게 웃으며 답했다.
“아, 들켰어.”
“!”
“인사해, 리텔니. 라벨라야. 키르아의 대장이자 내가 모시고 있는 상관이지.”
내적 비명을 지르는 리텔니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는지 이스카는 덤덤하게 라벨라를 소개했다.
“이 사람은 인사 나눌 정신이 없어 보이는데?”
라벨라가 혼이 나간 듯한 리텔니를 아래위로 훑을 때였다.
“리텔니 님!”
거친 숨을 내뱉으며 병사 하나가 막사 안으로 들이닥쳤다.
“앗!”
뒤늦게 이스카를 발견한 병사가 서둘러 허리를 숙였다.
“무슨 일이야?”
“잠깐 나와 보셔야겠습니다. 웬 이상한 사내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아, 하루 종일 혼란하다, 혼란해.
리텔니가 대형사고를 친 제 주군을 원망스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