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17화 (17/94)

17. 어머, 들켰네?

“저들이 그렇게 주장해? 루비츠 황자의 병사라고?”

제가 들은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진 이스카가 눈을 한번 깜빡였다.

“네, 그렇습니다.”

이스카의 입술 끝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리텔니가 제 이름을 팔 리도 없거니와, 소년이 알고 있다는 건 정체 모를 저 무리가 이곳에 상주한 지 오래됐다는 뜻이었다.

어쩐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안 되겠군.’

제 이름을 사칭하는 이유를 알아야 하니 몇 녀석만 남겨 취조할 생각이었다.

“먼저 가. 정리하고 갈게.”

이스카가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검을 고쳐 쥘 때였다.

“이건 또 뭐람?”

라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또 한 무리의 인기척이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리텔니 녀석인가.’

흔들리는 갈대숲으로 시선을 옮긴 이스카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일 먼저 나타난 얼굴이 낯이 익은 걸 보니 이번엔 확실히 제 병사인 듯했다.

“네 놈들의 일행인가!”

“누가 할 소리?”

경계심을 내비치며 소리치는 황실 군사에 라벨라가 코웃음을 쳤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여차하면 다 쓸어버리면 되니까.

“너희들은 또 뭐냐!”

“?”

뒤늦게 나타난 ‘진짜’ 루비츠의 병사들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리텔니의 명령대로라면 본인들이 이스카의 일행을 덮쳐야 하는 상황인데, 웬 녀석들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멈춰선 채 상황을 살피는 무리 사이를 헤치고 얼굴을 전부 가린 사내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세츠였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나도 몰라. 일단 난 쿠즈네로 들어간다. 뒤는 알아서 해.’

이스카와 눈빛으로 대화를 한 세츠는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쳤다.

세츠가 칼을 뽑는 것을 시작으로 분위기는 금방 흉흉해졌다.

“우린 적당히 틈을 봐서 빠지자고.”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자 이스카가 라벨라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지 뭐.”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면서도 라벨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사실 중요한 거래를 앞두고 피 칠갑을 한 상태로 마을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슈웅.

“억.”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황실의 군사 하나가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이잇, 다 해치우거라!”

즉사한 부하를 본 군사 대장이 부들부들 떨며 내린 명령을 끝으로 전투가 시작됐다.

“……가자.”

겁에 질려 오들오들 떠는 잿빛 머리 소년을 낚아 챈 일행은 다가오는 이들을 적당히 상대하는 척하다가 슬쩍 발을 뺐다.

“이제 우리 마을은 끝입니다. 황실에서 이 사실을 알면 당장 토벌할 군사를 보낼거라고요.”

날카로운 칼붙이와 비명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게 되자 소년이 그렁그렁해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나 궁금한데, 왜 황실의 군사가 마을 앞에 진을 치고 있는 거야?”

라벨라가 처음으로 소년의 말에 관심을 내비쳤다. 불쑥 고개를 들이민 라벨라에 몸을 흠칫 떨면서도 소년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붉어졌다.

“우리 쿠즈네는 황실에 납품하는 무기만을 제작하고 있는데요. 최근에 우리 할아버…… 크흠, 쿠즈네의 장로님이 파업 선언을 했거든요.”

“파업이라고?”

게다가 황실에만 무기를 납품한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라벨라는 왜 쿠즈네가 키르아의 정보력에도 잡히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았다.

‘어쩐지 물건이 유독 좋더라니. 흐응, 이를 어쩐다?’

무기 덕후인 제 마음에 쏙 들 정도니 어떻게든 독점하고 싶었다. 일이 복잡해지는 것 같자 라벨라의 미간이 좁아졌다.

‘카셰이 영감의 피라곤 믿기지 않는데.’

라벨라에게 쿠즈네의 기밀을 줄줄 털어놓는 소년을 보며 이스카는 마음속으로 혀를 찼다.

예상대로 잿빛 머리는 카셰이의 핏줄이 맞는 모양이었다.

“네. 명목은 보호지만 사실은 감시나 다름없습니다. 저놈들 때문에 마을 사람들 전부가 힘들어하고 있다고요.”

“흐음.”

화가 치미는 듯 입술을 꾹 깨무는 소년을 힐끔 쳐다본 라벨라는 제 뒤에 오고 있는 이스카를 생각했다.

이스카는 쿠즈네에 대해서도, 이 소년에 대해서도 뭔가 아는 눈치였다.

“이게 다, 그 루비츠 황자, 개자식 때문입니다!”

소년이 갑자기 움켜쥔 주먹을 허공에 휘두르며 소리쳤다.

“!”

‘뭐, 개자식?’

“크흡.”

이스카의 손이 움찔 떨림과 동시에 웃음이 터진 다벨이 급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옆에서 느껴지는 살기에 다벨은 스르륵 라벨라와 소년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

“개자식이라니? 루비츠 황자가?”

“네! 두들겨 패줘도 시원찮을 놈이라고요!”

‘요즘 많이 봐줬지.’

이스카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대화에 끼어드는 다벨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은 걸 꾹 참느라 손을 오므렸다 펴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 개자식이 황태자의 자리를 노리고 우리 쿠즈네의 무기를 탐내는 게 틀림없다고요. 그래서 할아버…… 장로님도 파업을 선언하신 걸 겁니다.”

“…….”

따지고 본다면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였다. 이스카는 소년의 말을 들으며 씁쓸해졌다.

대부분의 제국민들이 저리 생각할 터였다. 그들이 황실의 내밀한 속사정까지 알 리 없으니까.

“너 좀 똑똑하구나?”

“네, 제가 좀…… 아얏!”

뻐기려던 소년이 이내 비명을 지르며 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키득거리던 다벨이 후려친 탓이었다.

“근데 왜 때리십니까?”

“기특해서.”

막상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이 제 주군을 모욕하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물론 나중에 이스카에게 혼나지 않기 위해 포석을 깔아두려는 것도 있었고.

“쿠즈네의 장로는 어떤 사람이야?”

두 사람의 실랑이에 상념에서 깨어난 라벨라가 소년의 어깨를 툭 치며 물었다.

“네 목숨 빚을 어떻게 받아낼까 고민 좀 해보려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들기는 라벨라의 얼굴에 매혹적인 미소가 피어났다.

*   *   *

“세상에, 무트!”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마주친 여인이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너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너 때문에 마을이 뒤집어졌던 거 알아?”

후다닥 달려와 소년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여인이 연신 잔소리를 해댔다.

“무트가 왔다고?”

“무트라고?”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여러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이분들은……?”

소년의 안위를 확인한 뒤에야 라벨라의 일행을 본 마을 사람들이 뒤늦은 경계심과 호기심을 드러냈다.

“제가 목숨을 빚진 분들이에요.”

“세상에, 중요한 손님이셨네.”

“장로님은 어디에 계세요?”

“항상 계시는 곳에.”

“무트, 혼날 각오는 되어 있는 거지?”

소년의 질문에 미래를 예견한 마을 사람들이 동시에 고개를 내저었다.

“……따라 오세요.”

허옇게 뜬 얼굴로 앞장서는 소년을 따라가며 라벨라는 빠르게 마을을 살폈다.

험준한 바위산 속에 숨어 있는 마을치고는 아늑하고 잘 정돈된 편이지만 마을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음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상황이 더 안 좋군.’

마을의 분위기를 살피는 건 이스카도 마찬가지였다. 마을이 그의 기억보다 더 쇠락한 듯 보였다.

“전에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앞서 걷던 무트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전부 루비츠 황자의 군사들이 오면서 이렇게 된 겁니다. 그들이 마을을 에워싸고 막은 탓에 다른 마을과 왕래하는 것도 힘들어졌거든요.”

“무트…….”

무트의 곁에 꼭 붙어 있던 여인이 일행의 눈치를 보며 소년의 소매자락을 잡아당겼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식량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환경은 아니라서 다른 마을과의 교류는 필수라고요. 그런데…… 녀석들이 오가는 사람들은 전부 감시하는 데다가 통행세까지 요구해서…….”

꾹꾹 누르는 목소리에 선명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제국민들이 황실에 무한 충성하는 걸 생각한다면 특이한 경우이긴 했다.

“……여깁니다. 마을의 장로이신 카셰이님을 만나 뵐 겁니다.”

마을 가장 안쪽에 있는 집으로 일행을 데려간 무트가 침을 꼴깍 삼킨 뒤 문을 열었다.

“장로님, 무트가 돌아왔어요!”

여인이 밝은 목소리로 외친 뒤 문을 닫아주었다.

응접실을 거쳐 집무실로 향하니 열린 문 너머 창가에 서 있는 노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장로님.”

“…….”

뒷짐을 진 노인은 인기척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장로님?”

무트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나가거라.”

“!”

무트가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넌 더이상 쿠즈네의 사람이 아니다.”

“할아버지!”

“그러겠다고 뛰쳐나간 거 아니었느냐.”

“그건……!”

“아, 잠깐, 잠깐.”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라벨라가 덤덤하게 끼어들었다.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나중에 알아서들 하시고요. 일단은 이쪽 계산부터 먼저 해주셔야겠는데?”

“?”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노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뒷짐 진 손을 푼 노인이 천천히 몸을 돌림과 동시에 라벨라가 삐딱했던 자세를 바로 했다.

“그러니까, 어르신이 이 마을 대표이신 거죠?”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공손한 말투에 천으로 완벽하게 은폐한 이스카의 얼굴에 웃음기가 서렸다.

항상 사람을 깔보거나 아래로 두는 말투와는 사뭇 달라서 지금의 그녀는 키르아의 대장이 아니라 예의 바른 귀족 아가씨 같아 보였다.

라벨라의 백금발과 투명한 금안에 노인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고, 이스카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카셰이가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는 이스카가 차메르와 거래한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아가씨는?”

“무트 군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랄까요? 아, 물론 구한 건 여기 제 친구들이고요.”

한걸음 옆으로 비켜선 라벨라가 싱긋 웃으며 일행을 가리켰다.

“…….”

카셰이의 시선이 칸피덴에게서 다벨로 옮겨가다 마지막에 이스카에게로 향했다.

이스카의 반쯤 가려진 눈동자를 보던 카셰이의 시선이 다시 라벨라에게 향했다.

“무트 군을 마을에 데려다주느라 바쁘게 움직였거든요. 괜찮으시다면 마을에서 며칠 묵게 해주시겠어요?”

“할아버지…….”

무트가 눈치를 보면서도 부탁한다는 듯 웅얼거리는 걸 본 카셰이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안내해 드려라.”

“어머, 감사해요. 그럼 또 뵐게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상냥하게 웃은 라벨라가 작별을 고하고 무트의 뒤를 따라나섰다.

카셰이는 라벨라와 그 뒤를 따르는 검은 천으로 꽁꽁 싸맨 사내를 지그시 바라봤다.

“……얼굴은 또 왜 가렸는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친절한 여인의 가면을 벗어던진 라벨라가 이스카의 얼굴을 보며 떨떠름하게 물었다.

“음, 여기 햇빛이 너무 강해서?”

이스카가 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뻔뻔하게 대답했다.

“…….”

“…….”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길 잠시, 라벨라가 한심하다는 듯 실소를 흘리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가?”

“쿠즈네는 황실에만 납품한다잖아. 당신 계획이 틀어진 것 같은데.”

“후후, 난 쿠즈네의 무기가 마음에 들어.”

라벨라가 별거 아니라는 듯 생글거렸다.

“그리고 난 마음에 든 건 어떻게든 손에 넣거든.”

“그건 나와 같네.”

“…….”

“나도 마음에 든 건 무조건 갖고 말거든.”

반쯤 가려진 보랏빛 눈동자였지만 이스카가 말하는 그 대상이 라벨라 자신이라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흐응, 그래? 누가 먼저 갖게 될지 궁금해지네.”

“내기할까?”

“내가 이길 게 뻔하잖아. 그리고……. 얼굴은 가리지 마. 네 얼굴 감상하는 거 꽤 즐겁긴 하거든.”

“……얼굴만?”

거기 말고도 네가 좋아할 만한 곳이 많은데.

라벨라는 이스카의 끝말을 사뿐히 무시해주었다.

*   *   *

지나가는 짐승 소리의 숨소리가 들리겠다 싶을 만큼 깊은 밤이었다.

숙소를 빠져나온 이스카는 기척을 죽인 채 익숙한 길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스카가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어둠 속에 앉아 있던 카셰이가 기다렸다는 듯 밤손님을 반겼다.

“역시, 알아챘어?”

“제가 황자님을 못 알아볼 리 없잖습니까?”

“화낼 건가?”

“대체…… 지금까지…….”

화를 내야 할지 반가워해야 할지.

여러가지  마음이 복합적으로 든 카셰이가 말끝을 흐렸다.

모습을 감출 때만 해도 아직 어린 태가 남은 소년 같았는데 몇 년 만에 나타난 루비츠 황자는 멋진 청년이 되어 있었다.

“돌아오셨으면, 그거면 됩니다.”

고개를 내저은 카셰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비스메르트의 충신, 카셰이 카바치. 루비츠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카셰이, 그런 형식적인 인사는 됐…….”

혀를 차며 창가로 다가가던 이스카가 그대로 멈춰 섰다.

“……재회의 인사는 나중으로 미뤄야겠군.”

카셰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 순식간에 창문 밖으로 빠져나온 이스카가 지붕으로 뛰어올랐다.

“어머, 들켰네?”

도망갈 틈도 없이 등장해버린 이스카에 라벨라가 혀를 빼물었다.

“……라벨라.”

이스카가 미간을 꾹 누르며 한숨을 쉬었다.

“흐응, 어쩐지 이상하다 했지.”

지붕 위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있던 라벨라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니까, 황자님이시라고?”

“…….”

“아니, 개자식이었던가?”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스카를 본 라벨라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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