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14화 (14/94)

14. 그렇게 쉽게는 못 주지

“…….”

서로의 숨결이 섞이는 거리. 라벨라는 눈동자만 살짝 위로 굴렸다.

어여쁜 보랏빛 눈동자 위로 그림자를 만든 긴 속눈썹을 보며 라벨라는 등 뒤의 문을 더듬거렸다.

가까워진 입술이 닿으려는 찰나.

철컥,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라벨라의 몸이 뒤로 기우뚱 기울었다.

“……!”

상황을 깨달은 이스카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순식간에 품에서 빠져나간 라벨라는 어느새 방 안으로 성큼 물러나 있었다.

“그렇게 쉽게는 못 주지.”

이스카에게 잡혀 있던 손을 흔들어 보인 라벨라가 픽 웃으며 제 손을 빼냈다. 작은 손을 놓치고 허공에 허무하게 떠 있던 이스카의 손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또 기회가 있기를 빌어줄게.”

“하.”

이스카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럼 잘 자.”

얄미울 정도로 예쁘게 웃는 얼굴은 열기로 가득한 사내만을 남겨둔 채 닫힌 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질투는 무슨.”

한숨을 폭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이스카가 제 방문을 열었다. 아주 능숙하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대는 여자다.

‘자꾸 욕심나는데.’

달을 담은 보랏빛 눈동자가 더할 나위 없이 짙어졌다.

“질투는 무슨.”

이스카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라벨라도 제 앞에 닫힌 문을 보며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전혀 아니거든?”

그렇고말고.

라벨라는 마음 한구석에 슬그머니 남은 찝찝함을 애써 훌훌 털어냈다.

*   *   *

“대장, 벌써 움직이는 거야?”

“다 나은 지가 언젠데 아직도 환자 취급이야?”

책상 위에 걸터앉은 라벨라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페시니의 걱정을 차단했다.

“다 모였어, 대장. 무슨 일이야?”

아르젠의 보고에 고개를 든 라벨라가 자유롭게 앉은 이들을 슥 훑어보았다.

아르젠부터 최근에 들어온 이스카까지. 길드의 핵심 멤버였고, 지금은 제 오른팔과 다름없는 네 명이었다.

“상단을 만들 거야.”

라벨라의 통보에 집무실 내부가 조용해졌다.

“……뭐야, 이 반응은?”

라벨라가 떨떠름하게 일행을 둘러보았다. 표정만 봐서는 놀란 건지 짐작하고 있었던 건지 전혀 가늠되지 않았다.

“아니, 상단이라니…… 생각도 못 한 거라.”

헛기침을 한 아르젠이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 보면 라벨라는 유독 임피리아 내의 유통망에 많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긴 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우리가 해오던 일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그런데 대장, 이 인원으로 상단을 운영하기는 힘들 텐데?”

“응, 토라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야. 그 마을을 기점으로 키우게.”

라벨라의 시선이 집무실 한쪽 벽에 걸린 임피리아 지도로 향했다. 아직 텅 빈 곳이 많았지만 라벨라의 지시로 조금씩 채워지고 있었다.

“정확히 임피리아의 중앙이라는 게 아주 마음에 들어.”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든 라벨라가 한쪽 눈을 감으며 지도한 가운데를 조준했다. 만족스러운 미소였다.

“참. 상단은 철저히 토라의 소유처럼 보이게 할 거야.”

“에, 어째서?”

육중한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며 묻는 페시니에 라벨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페시니, ‘키르아’하면 사람들이 떠올리는 게 뭘까?”

“음…… 임피리아 최고 실력자들이 모인 길드?”

“그리고 또?”

“……돈만 많이 주면 뭐든 다 하는 길드?”

말하고도 민망한지 페시니가 멋쩍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렇게 돈 밝히는 곳에서 파는 물건을 믿을 수 있겠어? 막말로 좋은 물건인지 아닌지 믿지도 못할걸?”

“…….”

“그런데 내가 거래하는 상단이 키르아의 호위를 받아 물건을 가져온대. 약탈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내가 원하는 날짜에 정확하게 물건을 받을 수 있어. 그러면 어때?”

“좋을 것 같은데?”

라벨라의 맞춤형 설명을 듣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은 페시니가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쳤다.

“키르아를 괜히 소수 정예 실력파 길드로 키운 게 아니야. 소문은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거든.”

라벨라가 매혹적으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너희들이 고생해 준 덕분에 계획을 실행하는 게 더 앞당겨졌어. 난 앞으로 임피리아 내의 모든 물건이 우리 상단에서 나가게 만들거야.”

“…….”

“그에 맞춰 우리 길드도 점차 세를 불려야 할 거고.”

라벨라의 위험한 미소를 보며 이스카는 생각이 조금 복잡해졌다.

시장을 독점하겠다는 건 즉 임피리아의 경제를 쥐고 흔들겠다는 거였다. 게다가 영주에게도 필요 이상의 사병이 금지된 마당에 길드의 세력을 키우겠다니.

대체 그녀는 임피리아에서 뭘 하고 싶은 걸까.

“라벨라, 상단을 만들려는 이유가 뭐야?”

이스카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라벨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아.”

창틀에 기대 바깥의 풍경을 느긋하게 감상하던 라벨라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황궁에서 비밀리에 병력을 키우고 있어. 그것도 상당한 규모로.”

“!”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잖아? 안 그래?”

‘병력이라…….’

라벨라의 느른한 시선이 제게 향한 탓에 서둘러 표정을 숨긴 이스카가 겨우 고개를 까딱였다.

“질문은 더이상 안 받을 거야. 자, 봐봐.”

라벨라가 책상 위에 있던 단검을 집어 테이블 위에 툭 던져 놓았다.

“다들 쿠즈네라고 들어 봤어?”

“…….”

모두 처음 듣는다는 듯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오로지 이스카만 제외하고는.

‘흐응.’

이스카를 힐긋 본 라벨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려지지 않은 대장장이 마을이야. 내가 써본 온갖 무기를 통틀어도 여기만큼 좋은 데가 없었어.”

“…….”

이스카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제자리를 찾았다.

최고의 품질인 게 당연했다. 쿠즈네는 대대로 황실에 납품하는 무기만을 제작하는 곳이니까.

‘오늘 여러 번 놀라는군.’

라벨라가 쿠즈네의 존재를 아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곳의 물건이 어떻게 시중에 흘러나왔는지도 의문이었다.

“난 쿠즈네의 무기 거래 독점권을 얻어낼 생각이야.”

“…….”

가봤자 헛수고일 텐데. 라벨라의 계획에 이스카의 고개가 모로 기울어졌다.

쿠즈네에서 황실 외의 곳에 물건을 내줄리가 없었지만, 이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쿠즈네의 존재를 아는 체하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살 테니.

‘하긴, 또 모르지.’

이스카는 햇빛에 반짝이는 라벨라의 백금발을 눈에 담았다.

모든 일은 예상을 비껴가는 법이다. 제가 그녀를 만나고, 그녀에게 조금씩 빠져드는 것처럼.

라벨라, 그녀이니까. 원래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예외의 존재이니까. 어쩌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지도 몰랐다.

“자, 그럼 누가 갈래?”

라벨라가 손뼉을 짝 부딪치며 사내들을 훑었다.

“페시니는 안 돼. 취소할 수 없는 의뢰가 있거든.”

“……젠장.”

곧장 자원하려던 페시니가 아르젠에게 선수를 빼앗겼다.

“난 대장이 없으니 길드에 있어야 하고. 너희 둘이 같이 가는 게 어때? 아, 혹시 모르니 다벨도 데려가고.”

아르젠이 이스카와 칸피덴을 번갈아 보며 의사를 물었다.

“그럴게.”

“음, 난 빼 줘.”

고개를 끄덕이는 칸피덴과 달리 이스카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젖히며 사양했다.

칸피덴이 따라가는 게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쿠즈네에 제 모습을 드러낼 순 없었다.

“……빼달라?”

팔짱을 낀 라벨라의 머리끝이 흔들렸다.

입꼬리 끝만 올린 채 비음을 흘리는 라벨라에 이스카는 싱긋 웃으며 버텼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함께 가겠다는 말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래, 그럼.”

다행히 라벨라의 시선이 금방 멀어져갔다.

“후.”

이스카가 자신도 모르게 내쉰 한숨에 이마를 덮고 있던 앞머리가 살랑거렸다.

“출발은 사흘 뒤야, 칸피덴. 그럼 다들 볼일 봐.”

축객령이 떨어졌다.

“이스카.”

집무실을 빠져나오는 길, 아르젠이 앞서 걷던 이스카의 어깨를 턱 붙잡았다.

“왜?”

“알지? 대장이 널 데려왔어.”

“흐음?”

무슨 소리를 하려는가 싶어진 이스카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섰다.

“대장은 실력만 좋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주의지. 그 사람의 배경이 무엇이든 간에. 숨기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런데?”

뼈가 있는 말이었다.

“대장을 배신하지 마.”

“……내가 배신할 거라고 보는 건가?”

이스카의 입술 끝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글쎄.”

“내가 이 경계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이스카가 픽 조소를 흘렸다. 동행을 거절했다고 이런 소리까지 듣게 되다니.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마음을 이들이 알 리 없었다. 안 그래도 라벨라의 곁에 철썩 붙어 있을 칸피덴을 생각하면 배알이 뒤틀리는 마당에.

“쓸데없는 걱정이야. 난 라벨라의 곁을 떠날 마음이 없거든.”

“그럼 다행이고. 네가 길드에 와 줘서 큰 도움이 됐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 지금처럼 말이야.”

아르젠이 이스카의 어깨를 톡톡 치며 빙긋 웃었다. 찌를 듯한 경계심은 온데간데없었다.

‘……충성스럽기도 하지.’

느긋하게 미소 지어 준 이스카는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길드를 벗어났다.

‘리텔니를 한 번 만나야겠어.’

삐익.

근처의 숲으로 온 이스카는 신호음을 보낸 뒤 나무에 기대어 섰다.

잠시 후, 작은 새가 날아와 이스카의 손가락 위에 자리 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스카는 망설임 없이 새의 등에 염료를 묻혔다. 누군가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는 쪽지 대신 색깔로 상황을 알리는 방법이었다.

일부분이 녹색으로 물든 새가 이스카의 손가락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오늘도 고생해라.”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날개를 파닥이던 작은 새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뭔가 아는 눈치였는데?’

집무실에 혼자 남은 라벨라의 손가락이 도톰한 입술 위를 톡톡 두들겼다.

‘흐응, 그냥 끌고 갈까?’

“대장.”

“응?”

창문 너머로 향해 있던 라벨라의 시선이 문으로 옮겨 갔다.

“이스카 말이야.”

문을 닫은 아르젠이 바깥의 기척을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

“……이스카가 왜?”

“쿠즈네에 갈 때 무조건 데려갔으면 해.”

“왜?”

라벨라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들어오는 의뢰는 단 한 번도 거절한 적 없는 녀석이야. 그런 녀석이 안 간다니까 이상하잖아.”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결론이네. 의뢰는 돈이 나오지만 이 일은 아니잖아.”

“나도 아는데, 그냥 대장이 데려갔으면 좋겠어. 대장하고 칸피덴까지 가버리면 우리 중에 이스카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아르젠의 사뭇 진지한 태도에 라벨라도 입술을 말아 물었다. 더 말해보라는 신호였다.

“대장도 알잖아, 그 녀석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흐응, 이스카를 마음에 들어 하는 줄 알았는데?”

“마음에 든 거랑 조심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대장이 그렇게 가르쳤잖아?”

어머, 기특해라. 아르젠의 말에 수긍한 라벨라가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알겠어, 데려갈게.”

안 그래도 생각하던 부분이라 쉽게 대답이 흘러나왔다.

“난 대장만 믿는다?”

신신당부한 아르젠이 사라지자 라벨라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떻게 할까?”

바깥이 어두워질 때쯤에야 집무실을 나온 라벨라는 이스카의 방에 불이 있는 걸 보고 곧장 그의 방으로 향했다.

“이스카, 안에 있지?”

“……라벨라?”

문이 벌컥 열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스카의 눈이 조금 커졌다. 라벨라가 자신을 먼저 찾아오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무슨 일이야?”

문틀에 팔을 세우고 다른 손으로 허리를 짚은 이스카가 고개를 기울였다.

“너, 쿠즈네에 대해서 아는 게 있어?”

“……글쎄?”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오는 라벨라에 이스카가 반박자 느리게 반응을 내보였다.

“흐응. 같이 가, 나랑.”

“…….”

이스카의 가로로 긴 눈이 느리게 깜빡이다가 곧 장난스레 휘었다.

“내가 필요해?”

“응, 필요해.”

“하아. 그렇게 말하니 가고 싶어지네.”

싱긋 웃으며 수긍하는 라벨라에 이스카가 난처한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안 갈 거야.”

“이스카, 이렇게 나올 거야?”

“…….”

달콤하게 바뀌는 목소리에 이스카가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흐응.”

비음을 흘린 라벨라가 한 걸음 다가서며 보라색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난 같이 가고 싶은데. 안 돼?”

라벨라의 눈꼬리가 야살스럽게 접혔다.

그녀는 어떤 남자든 가장 쉽게 무너트릴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전에 살던 곳에서도 수도 없이 써먹었던 그 방법.

바로 미인계였다.

“어떻게 해야 네 마음이 바뀔까? 응?”

손을 뻗어 이스카의 목 뒤를 부드럽게 감싼 라벨라가 한층 더 가까이 다가갔다.

동시에 끝을 세운 손가락이 허리를 짚고 있는 이스카의 손 위를 스치듯 지나쳤다.

가느다란 손으로 이스카의 단단한 허리를 휘감듯이 안자 몸이 자연스레 밀착됐다.

“…….”

노골적으로 닿는 부위에 이스카는 당혹스러워 보였다. 이스카를 옴짝달싹못하게 만든 라벨라는 살짝 펼친 손으로 미끄러지듯 그의 목을 감아 당겼다.

“아, 라벨라……. 좀 봐주면 안 될까?”

목을 당기는 미약한 힘에 하릴없이 끌려 내려간 이스카는 라벨라의 손길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밀려오는 달콤한 향에 문틀을 짚은 이스카의 손등 위로 핏줄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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