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12화 (12/94)

12. 데이트는 잘했어?

“얼른.”

이스카가 조르듯 내민 손을 까딱거렸다.

“임피리아에 대해 아직 잘 모르잖아, 내가 특별히 안내해 줄게. 라벨라, 당신이니까.”

특별히란 단어를 강조하는 이스카를 보며 라벨라가 실소를 흘렸다.

요 녀석 봐라, 떠본다 이거지? 누가 넘어갈 줄 알고.

라벨라는 의뭉스러운 이스카의 얼굴을 보며 턱을 들어 올렸다.

“……말에 뼈가 있네?”

“글쎄, 어떨까?”

내리깐 눈으로 라벨라를 힐끗 바라본 이스카가 라벨라의 손을 은근슬쩍 잡으며 제 쪽으로 당겼다.

“흐응. 난 허락한 적 없는데?”

“싫으면 뿌리쳐.”

잡힌 손을 가리키자 가늘게 뜬 눈이 화답하듯 휘었다.

언제든 빼내려면 빼낼 수 있을 정도의 미약한 힘이긴 했다. 잠시 생각하던 라벨라는 얌전히 있는 걸 택했다.

오늘은 머랭 쿠키처럼 달큰하게 굴어 이스카의 입을 열어 볼 요량이었다. 제가 쥐고 있는 패는 아무것도 없으니, 이스카가 먼저 운을 띄우게 만드는 게 나았다.

마음을 정한 라벨라는 오히려 은근히 팔이 스치도록 이스카에게 가까이 붙었다.

“…….”

물끄러미 올려다보니 의아함을 품은 보랏빛 눈이 아래로 내려왔다. 의도를 읽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제 손을 빼낸 라벨라가 다시 느리게 제 손가락을 이스카의 손가락 마디 사이로 끼워 넣었다.

“흐음.”

한쪽 눈썹을 추켜세운 이스카가 짓궂게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일단은 모르는 체해줄까.’

라벨라의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맞잡은 작은 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반대쪽 손을 들어 올린 라벨라가 손가락 끝을 까딱거렸다. 이스카는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너, 되게 의심스러운 거 알지?”

귓가에 속삭이자 쿡쿡대는 이스카의 나른한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알아. 그러니까 나에 대해 계속 궁금해해 봐.”

야살스레 눈꼬리를 접은 이스카를 보며 라벨라는 실소를 흘렸다.

“상처는? 걸을 만해?”

“어.”

바지를 벗고 드레스를 입은 탓에 상처 부위에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서 편했다. 그러고 보니 임피리아로 넘어 온 뒤 치마를 입은 것도 처음이었다.

“힘들면 말해.”

“걱정 말고 안내나 해.”

“좋아, 그럼 배부터 채워볼까.”

상점가로 가자마자 천을 꼬아 만든 장식끈으로 연결된 색색의 천막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게 보였다.

북적이는 인파가 상당했다. 마을 자체가 이토록 활기를 띠는 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라벨라는 사람들과 섞이기 전에 건물 위부터 살폈다. 저격수들이 숨어 있기 딱 좋은 위치였다.

‘아. 여긴 총이 없지.’

뒤늦게 생각이 난 라벨라가 긴장을 풀었다. 화살은 비거리가 나오지 않으니 저런 곳에 숨어야 의미가 없었다.

거리낄 것이 없어지자 라벨라의 걸음도 가벼워졌다. 두 사람은 점점 많아지는 인파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 뒤로 와.”

나란히 걷던 이스카가 반 보 앞으로 나서며 라벨라의 앞을 비스듬히 가렸다. 상처가 있는 몸이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배려하는 행동이었다.

“…….”

앞서 걷는 어깨와 등을 보며 라벨라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자신을 이런 식으로 여자처럼 대하던 사람이 있었던가. 물론 레이디로 위장 잠입을 할 때는 정체를 모르니까 접근해오는 남자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적어도 제 정체를 아는 이 중에서는 없었다. 길드원들도 여자로 대해주기 보다는, 주인을 보호하는 충견 같은 느낌이었고.

그런 부분에서 이스카는 묘한 녀석이었다.

이스카의 걸음이 꼬치에 커다란 고기를 꿰어 굽고 있는 천막 앞에서 멈췄다.

“울란으로 만든 거야. 임피리아의 북쪽에서만 잡히는 거지. 쉽게 볼 수 있는 건 아닌데, 여기까지 들어왔네.”

“형씨, 뭘 좀 아는구만? 이 지역 사람들은 몇 년 만에야 맛보는 거라고.”

몇 년? 원래는 지역 간의 거래가 활발했었나 보네. 라벨라는 상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억양을 보니 북쪽에서 왔나 보군.”

“맞아. 키르아 덕분에 길이 뚫렸다는 소문이 나서 마음먹고 와 봤지.”

“그렇군. 많이 벌어 가.”

픽 웃은 이스카가 은화 한 닢을 넘겼다.

“형씨 화끈하구만. 아가씨, 이런 남자는 꽉 잡아야 해.”

호탕하게 웃는 상인에게 어깨만 으쓱해 보인 라벨라는 이스카가 건넨 길쭉한 꼬치를 받아 들곤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육즙이 퍼지는 게 나쁘지 않았다.

마을 중심부의 광장까지 들어가자 곧 커다란 무대가 나타났다. 무대를 중심으로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타원을 이루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인형극이네. 아마 내용은 건국 신화와 관련된 걸 거야.”

고개를 내린 이스카가 라벨라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무대 위에는 잿빛 긴 머리에 머리색과 같은 망토를 걸친 인형과 황관을 쓰고 제복을 입은 채 말을 탄 인형이 대치 상태였다.

“이 어리석은 녀석아! 한낱 인간인 네가 나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악당 역할을 맡은 목소리가 비열하게 외쳤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널 무찌르고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유치찬란한 대사인데도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무대에 집중하고 있었다.

라벨라가 심드렁하게 무대를 보며 말린 과일을 씹을 때였다.

“사악한 대마법사 차메르여! 내 칼을 받아라!”

쿨럭.

뭐? 누구?

갑자기 들려오는 아는 이름에 음식을 잘못 삼킨 라벨라가 켈록거렸다.

“괜찮아?”

라벨라를 사람들 사이에서 빼낸 이스카가 곧장 라벨라의 얼굴을 살폈다.

“아, 혀를 씹었어.”

“조심해야지. 어디 봐봐.”

짧게 혀를 찬 이스카가 라벨라의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혀 내밀어 봐.”

“…….”

“빨리.”

라벨라가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앙다물고 노려보자 이스카가 짐짓 엄한 얼굴을 하곤 라벨라의 입술을 꾹 눌러 벌렸다.

“앙 다쳐써.”

입술을 누르고 있는 손길에 발음이 샜다. 라벨라가 이스카의 손을 떼어 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당신, 은근히 손 많이 가는 거 알아?”

“뭐?”

머리털 나고 처음 듣는 말에 기겁한 라벨라가 질색했다.

“그게 나름 귀엽긴 하지만.”

“…….”

순간 이스카의 입을 때릴까 고민하던 라벨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금 이스카의 말장난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이스카. 방금 저 연극, 건국 신화라고 했지? 저거 진짜야?”

라벨라는 궁금했던 걸 물었다. 물론 인형의 외형은 제가 아는 차메르와는 전혀 다르긴 했다. 긴 머리라는 것만 제외한다면.

“응, 역사에 기록된 내용이기도 하고. 왜?”

“그냥.”

라벨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악한 대마법사? 혹시 그 차메르가 이 차메르인가?

황제에 패했다고? 그래서 보석 속에 갇혀 사는 건가?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었군.’

생각이 많아 보이는 라벨라의 얼굴을 보며 이스카는 라벨라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확신했다.

훌륭한 성과였다.

게다가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핑계가 생긴 것 같아 퍽 안심이 되기도 했고.

“라벨라, 그만 돌아가자.”

손을 뻗은 이스카가 다시 라벨라의 손을 가만히 그러쥐었다.

“길드로 돌아가는 거 아니었어?”

“아아, 여기서 보는 풍경이 예쁘다더라고.”

말에서 먼저 훌쩍 뛰어내린 이스카가 어리둥절해 하는 라벨라를 안아 내렸다.

괜히 움직이게 뒀다가 잘 낫고 있는 상처가 터지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라벨라도 그 사실을 잘 아는지 얌전히 제 몸을 맡겨 왔다.

마을 외곽에서 길을 벗어나 조금만 올라오면 나타나는 야트막한 동산이었다.

끝에 서니 색색깔의 천막이 조명과 어우러져 다양한 빛을 냈다.

적당한 바위 위에 걸터앉은 라벨라의 곁에 선 이스카가 풍경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축제는 재미있었어?”

“어.”

이스카 덕분에 새로운 정보도 많이 수집했으니 나름대로 알찬 시간이었다.

“아름다운 나라지.”

“…….”

“그래서 지키고 싶어지는 곳이고.”

라벨라는 휙 고개를 돌려 이스카를 올려다봤다.

팔짱을 끼고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는 그의 옆모습이 묘하게 진지했다. 그간 봐왔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게 무겁고 진중한 듯도 했고.

“라벨라.”

이스카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쳐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이스카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짙어 보였다.

“임피리아가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

“네가 전에 살던 세상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   *   *

“여, 대장! 데이트는 잘했어?”

“…….”

다음 날 오후, 느지막하게 일어나 오랜만에 집무실에 들른 라벨라는 능글거리며 웃는 아르젠을 마주쳤다.

“소문이 여기까지 들리더라고, 우리 대장이 어떤 미남과 오붓하고 다정하게 데이트했다고.”

“시끄러워.”

“그 미남이 내가 아는 사람 같던데!”

“…….”

라벨라의 손이 슥 아래로 미끄러졌다.

라벨라의 눈에 떠오른 살기를 보고서야 아르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엔 여전히 놀리고 싶어 어쩔 줄 몰라하는 기색이 가득했지만.

길드로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걸러내는 아르젠이니 마을에서의 제 행적쯤이야 이미 아는 게 당연했다. 모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길드가 조용하네.”

“의뢰 나간 녀석들 빼고는 각자 축제를 즐기러 갔지.”

그나저나 왜 나만 축제인 걸 몰랐을까? 의문을 품은 라벨라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임피리아인이라면 축제라는 걸 모를 수가 없을 테니까. 게다가 요 며칠 상처 때문에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바깥의 분위기를 몰랐던 탓도 있었다.

“넌 왜 여기 있는데?”

“난 돈 되는 일 아니면 관심 없어.”

“좋은 자세야.”

대충 대꾸한 라벨라가 서류를 뒤적거렸다.

“뭐 찾아?”

“아아, 그간 이스카가 맡았던 의뢰서들 좀 보려고.”

“흐응.”

“한 번만 더 그런 표정 지으면 너라도 안 봐줄 거야, 아르젠.”

아르젠이 호다닥 서류뭉치를 집어 건넸다.

“쯧. 눈치 빠른 건 네 장점이야.”

서류 뭉치를 들고 방으로 돌아온 라벨라는 닫혀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가에 앉아 서류를 들춰 보는데 이스카와 나눴던 대화가 맴돌았다.

‘전에 살던 세상이라고?’

제가 이곳으로 소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걸 인정하는 말이었다.

안 그래도 캐물으려던 걸 녀석이 먼저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너……!”

“라벨라, 내가 한 가지 알려줄까?”

“…….”

“임피리아에서 당신 같은 백금발과 투명한 금안은 존재하지 않아.”

“…….”

“오로지 마법사만 그런 외형을 갖지.”

“!”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도 네게 효용가치는 있어야 하니까. 자, 그만 돌아갈까?”

“도대체 정체가 뭐야, 그 녀석?”

차메르를 불러내고 싶었지만, 역시나 도움이 되지 않는 영감은 모습을 드러낼 기미조차 없었다.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이스카에게 들어 온 의뢰서를 보는 라벨라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   *   *

“갈게.”

“아, 라벨라 님, 약초상에 귀한 물건들이 들어왔다는군요. 돌아가시는 길에 한번 들러보십시오.”

“그래.”

토라와 헤어져 약초상으로 향하던 라벨라는 무의식에 상처가 있는 부근을 문질렀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희미한 흉터를 제외하고는 거의 아문 상태였다. 상처가 낫는 속도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라와의 이야기도 잘 끝났으니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오늘은 또 어떤 물건이 들어왔으려나.”

부상을 당한 이후 본격적으로 임피리아의 독초와 약초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의뢰를 나가지 않다 보니 심심해서 시간을 때울 생각으로 시작한 취미였다.

본능적으로 효능을 짐작할 때도 있었지만, 아직 제가 알지 못하는 종류의 식물이나 동물들이 많아서 약초상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약초상의 간판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작은 새 한 마리가 삐약거리며 라벨라의 머리 위로 날아갔다. 녹색과 노란색이 독특하게 섞인 작은 새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아, 그 새인가?”

언젠가 숙소에서 보았던 새와 비슷한 생김새였다. 라벨라는 별생각 없이 눈으로 새를 쫓았다. 새가 날아가 착지한 곳은 약초상의 간판 위였다.

목적지에 도달한 라벨라가 자연스레 걷는 속도를 늦출 때였다. 어딘가 낯익은 뒷모습이 라벨라의 눈을 붙잡았다.

‘뭐야, 이스카잖아?’

약초상 바로 앞에 선 이스카는 신중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살피고 있었다. 제 기억이 맞다면 지금 그는 의뢰를 수행하는 건 아니었다.

아는 체나 하려고 다가가던 라벨라는 이스카의 옆에 선 이를 발견하고서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이스카가 눈치챌까 기척을 죽인 라벨라가 힐긋 이스카의 곁에 선 자를 살폈다.

‘……여자?’

발목까지 덮는 긴 망토에 후드로 얼굴까지 덮고 있는 가녀린 자였다.

그나마 보이는 거라곤 작은 입술과 하얀 피부. 그리고 후드 밖으로 빠져나와 어깨 바로 밑까지 드러나 있는 어두운 낙엽색 머리였다.

신분이 드러나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까지 온몸을 가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이스카만큼이나 정체가 수상한 여인이었다.

‘잠깐.’

그런데 나는 왜 숨는 거지? 라벨라가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던 때 이스카는 볼일이 끝났는지 여인과 함께 라벨라가 있는 쪽의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어딜 가려는 걸까.’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묘하게 거슬리고. 어쩐지 저 뒤를 밟아야 할 것 같은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 어차피 캐볼 생각이었으니까.’

합당한 이유를 찾아낸 라벨라는 조용히 후드를 뒤집어쓰고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이스카와 정체불명의 여인은 천천히 거리를 거닐었다. 두 사람은 한 번씩 멈춰서 마을 상점을 둘러보기도 하고, 얼굴을 가까이하며 소곤거리기도 했다.

‘이건 그냥…….’

누가 보아도 데이트를 하는 연인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인은 수상할 정도로 후드를 계속해서 끌어내렸다. 마치 누가 제 얼굴을 볼까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거리를 몇 바퀴나 돌던 두 사람이 마음을 정한 듯 한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

건물의 정체를 확인한 라벨라의 눈이 일그러졌다.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은 여관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