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여차하면 미남계라도
“요즘 얼굴 보기가 매우 힘듭니다?”
“바쁘거든.”
늦은 밤, 마을 외곽의 외진 펍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리텔니의 앞에 누군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여행자들만 북적이는 공간에 인원이 한 명 늘었다고 해서 관심을 두는 이는 없었다.
펍 주인만이 새로 온 손님 앞에 맥주가 가득 담긴 나무 컵을 쿵 내려놓고 떠나갔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길드 생활이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생각보다?”
이스카가 빙긋 웃어주었다. 정확히는 라벨라 때문에 즐거운 거긴 했지만.
“그럼 의뢰인 이야기를 들어 보실까?”
“하. 매번 이런 식으로 뵈어야 합니까?”
이스카의 농담에 리텔니가 불만스레 투덜거렸다.
안전한 만남을 위해 선택한 방법이 키르아에 의뢰를 넣는 거였다. 그것도 이스카 맞춤형으로.
고작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렇게 쓴 돈의 액수가 제법 컸다. 적어도 소규모 영지의 넉 달 치 예산은 될 터였다.
“의심은 피해야지. 그리고 대부분은 나한테 다시 돌아오잖아.”
길드 수수료와 라벨라가 떼가는 돈은 어쩔 수 없지만. 이스카가 씩 입꼬리를 늘였다.
“네, 돈 자랑을 이런 식으로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이쪽은 똑같습니다. 별다른 문제도 없고요.”
“그래.”
두루뭉술한 이야기지만 리텔니의 보고를 알아들은 이스카가 덤덤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확실한 증거까지 확보한 상태.”
“정말!……입니까?”
순간 벌떡 일어나며 외치려던 리텔니가 급히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 마력을 확인했어.”
“키르아의 대장이 진짜 ‘그자’였단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수확이야. 아주 재미있게 됐지.”
신기해하는 리텔니에 이스카가 손가락 끝으로 맥주잔을 기울이며 동의했다.
“어쨌든 이렇게 찾았으니 다행입니다. 요즘 황궁의 동태가 심상치 않으니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리텔니의 목소리가 한층 더 낮아졌다. 주변을 경계하는 것도 물론이었다.
“……천천히 가자고. 솔직히, 찾는 것만 해도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던 거잖아.”
“주군.”
리텔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리텔니.”
이스카의 눈이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난…… 이 피에 흐르는 저주를 어떻게든 끊어 낼 생각이야.”
“…….”
리텔니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주군이 어떤 일을 겪고, 어떤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내가 성공하지 못하면, 임피리아는 점점 피에 물들다가 황폐해지고 말겠지. 지금도 안에서부터 어쩌지 못할 만큼 썩어들어가고 있으니.”
“그건 그렇지만…….”
함께 임피리아 전역을 돌며 평화롭고 아름다운 배경 속에 숨겨진 제국민들의 많은 고통과 눈물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체감한 후였다.
“조급해하지 마. 기회가 왔을 때 성공할 수 있도록 지금은 철저히 준비하는 데 집중하도록 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입꼬리 끝만 올린 채 진중한 지시를 내리는 그는 가볍고 능글맞은 이스카가 아닌 임피리아 제국의 2황자 루비츠 크로브 비스메르트의 모습이었다.
리텔니는 처음 만난 이후 제가 평생 충성하리라 맹세했던 사내를 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우리 손에 목숨을 맡긴 수많은 이들을 생각하자고.”
“네, 주군.”
“당분간 그녀 곁에서 지켜볼 생각이야. 차메르 그자가 그녀를 우리에게 보낸 진의가 뭔지, 그녀가 앞으로 임피리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확인할 필요도 있으니까.”
“그자…… 아니. 그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겁니까?”
“내가 보기엔. 그래도 우리의 패를 먼저 내보일 순 없어.”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모를까. 라벨라에게 모든 걸 털어놓는 순간 둘 중 하나였다. 목덜미를 물어 뜯기거나 그녀가 제 상황을 이해하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거나.
“그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리텔니는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귀여워. 강하기도 하고.”
“…….”
“어린아이를 구한다고 죽음도 불사하는 여자지.”
“네에?”
“사랑스럽다는 뜻이야. 안쓰럽기도 하고.”
리텔니는 이스카의 말을 이해해보려 오만상을 썼다.
“그래, 네가 뭘 알겠어. 맨날 잔소리만 할 줄 알지.”
이스카는 리텔니를 짠하게 보다가 쯧 혀를 찼다. 어깨를 으쓱한 그는 어느새 황자 루비츠에서 방랑자 이스카로 돌아와 있었다.
“네, 뭐. 어찌 보면 차라리 여자라서 다행이다 싶습니다.”
주군의 변화에 덩달아 표정을 푼 리텔니가 중얼거렸다.
“……그게 왜?”
술잔을 들어 올리던 이스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가만히 있어도 여자가 매달리는 이스카 님이시니까요.”
여차하면 미남계라도 쓰면 되지 않겠습니까. 리텔니가 능글맞게 웃었다.
“…….”
미안하지만, 매달리기는커녕 꼼짝도 안 해. 게다가 빠져드는 건 오히려 이쪽이라서. 물론 이 말을 굳이 할 필요는 없을 터다.
이스카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참. 다벨은 지금 어디에 있지?”
“아, 얼마 전에 돌아왔습니다. 희귀한 약초를 많이 구했다고 좋아하더군요.”
“잘됐네. 그 녀석, 길드로 데려가려고 해. 의사가 필요하거든.”
“정말입니까?”
리텔니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 준비시켜 둬. 최대한 자연스럽게 합류시킬 거니까.”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당분간은 보지 말자고, 우리.”
“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몸을 일으키는 이스카를 보며 리텔니가 헛웃음을 뱉었다.
“……귀찮아 죽겠네.”
“다 들립니다.”
“그럼 수고해.”
불퉁하게 입을 비죽이는 리텔니의 어깨를 툭 친 이스카가 펍을 빠져나갔다.
* * *
‘뭐 하고 있으려나.’
다음 날 오후. 숙소 계단을 오르는 이스카의 걸음이 저절로 빨라졌다.
제 방을 지나 라벨라의 방 앞에 이르자 노크를 할 필요도 없이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렇게 움직여도 돼?”
열린 문틀에 기대어 선 이스카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올라섰다.
“어서 와.”
손님을 본 라벨라가 가볍게 휘두르던 검을 고쳐 잡으며 움직임을 멈췄다.
“아직 회복 중이란 걸 잊은 건 아니지?”
“너까지 그러지 마. 가만히 있으려니까 갑갑하단 말이야.”
‘귀엽기는.’
라벨라가 칭얼거리자 이스카는 이해한다는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움직이기라도 할라치면 난리를 치는 페시니가 귀찮았는지 방에 콕 틀어박혀 버린 라벨라였다.
“어디 다녀오는 길인가 봐?”
라벨라는 가볍게 무장을 한 이스카를 훑어 내렸다. 눈빛에 약간의 부러움이 섞여 있는 듯도 했다.
“의뢰가 있었거든.”
“흐응.”
“아, 당신에게 전할 말이 있어.”
“?”
손가락 사이에 단검을 끼워 놓고 돌리며 손장난을 하는 라벨라를 귀엽게 보던 이스카가 뒤늦게 그녀를 찾아온 목적을 떠올렸다.
“토라가 네 안부를 묻던데. 특히 레아가 많이 궁금해해.”
“아아.”
산에서 내려와 곧장 길드로 온 탓에 그 이후로 레아의 얼굴을 보질 못했다. 어린 애가 눈앞에서 무서운 광경을 봤으니 불안해할 만도 했다.
“오늘 의사가 오기로 한 날이던가?”
라벨라는 상처 부근을 문지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까지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한 것도 길드 녀석들의 고집 때문이었다.
“……나갈래?”
중얼거리는 말에 담긴 속뜻을 파악한 이스카가 잠시 고민하다가 의사를 물었다.
“좋아, 갈래.”
팔짱을 낀 채 문틀에 기대어 선 이스카를 물끄러미 보던 라벨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욱신거리긴 하지만, 상처도 많이 아물었으니 바람 쐴 겸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대신 에스코트 제대로 해.”
“말이라고.”
이스카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몸을 바로 했다.
라벨라는 그의 눈이 매끄럽게 휘는 걸 보며 방문을 나섰다.
“내 말은?”
길드원들을 마주치지 않고 입구까지 빠져 나온 라벨라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의아해했다. 그들 앞에는 오로지 이스카의 말 한 마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페시니에게 외출한다고 알릴 생각이야?”
“아.”
이스카가 말의 콧잔등을 적당히 쓸어주며 지적하자 라벨라가 곧장 수긍하며 인상을 썼다.
“자.”
“?”
라벨라는 다짜고짜 손을 내미는 이스카를 보며 찡그린 표정을 풀지 않았다.
“에스코트하라며?”
“…….”
“상처가 다시 벌어지기라도 하면 난 네 추종자들에게 사지가 찢길걸?”
내가 널 데리고 나왔으니까.
이스카의 설득에 라벨라는 제게 내밀어진 커다란 손을 순순히 잡았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라벨라를 조심스레 안아 올리고 자신도 훌쩍 올라탄 이스카가 말 고삐를 부여잡았다.
“오늘은 이 속도로 참아.”
“알아.”
상처를 신경 쓴 탓에 빠르게 달릴 수가 없었다.
투덜거릴 줄 알았던 라벨라는 짧게 수긍하며 편안하게 몸을 늘어트렸다.
제 가슴팍에 안기듯 편하게 기대어오는 라벨라에 이스카는 웃음을 삼켰다.
절벽에서 보낸 짧은 시간 이후, 라벨라는 자신을 완전히 동료로 받아들인 듯했다.
경계심도 풀고 편안하게 대하는 걸 보고 있자면 마치 들고양이를 길들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오랜만에 나온 소감이 어때.”
“하, 살 것 같아.”
라벨라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며 하얀 손가락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자 찰랑거리는 금빛 실타래가 스르륵 흘러내리며 반짝거렸다.
이스카는 문득 그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고 부드러운 감촉을 마음껏 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미친 건가.’
품에 안은 그녀에게서 향긋한 라일락 향기가 났다. 바로 코앞에 보이는 동그란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은 본능이 일렁였다.
왜 이렇게 이 여자를 가만히 두질 못하겠는지, 참 이상했다.
처음 느껴보는 낯선 감정을 곱씹는 이스카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울렸다.
빠져드는 속도가 생각보다 더 빨랐다.
마치 절벽으로 내달리는 물소 떼처럼 걷잡을 수 없이 질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것도 같았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리텔니가 알면 비웃겠군.’
이스카는 입속으로 혀를 찼다.
* * *
“마을이 뭔가 소란스럽네?”
“오늘부터 축제거든.”
“…….”
고개만 뒤로 돌린 라벨라가 이스카를 보며 이 외출이 처음부터 의도된 거였는지 눈으로 물었다.
“좋잖아. 이왕 바람 쐬는 김에.”
토라의 집에 도착한 이스카가 말에서 풀쩍 뛰어내리며 답했다.
“우리 또 해야 할 이야기가 많잖아?”
물론 겸사겸사였다. 라벨라가 다치는 바람에 그녀의 마력과 그 배경을 물을 기회가 없었기도 하지만, 답답해하는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라벨라 님!”
라벨라가 채 말에서 내리기도 전, 레아가 집 밖으로 뛰어나왔다.
“라벨라!”
그 뒤를 이어 로나와 토라도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왔다. 이미 두 사람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눈물바람 할 거면 나 그냥 가고.”
“어서 와. 기다리고 있었어.”
로나가 눈물을 슬쩍 훔친 뒤 라벨라의 손을 부여잡았다.
“마을 축제라며?”
이스카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린 라벨라가 토라를 힐끔 보며 물었다.
“네, 초대 황제를 기리는 축제입니다. 임피리아 전역에서 열리죠.”
“흐응.”
“재미있을 거예요 라벨라 님! 맛있는 것도 많단 말이에요!”
“다른 지역에서 넘어오는 흥미로운 특산품도 꽤 많을 겁니다.”
특산품? 라벨라의 마음을 움직인 건 토라가 한 마지막 말이었다.
“그럼 둘러볼까?”
“잠깐만, 라벨라.”
“?”
알아둬서 나쁠 건 없다고 판단한 라벨라가 집 밖으로 나가려 하자 로나가 그녀의 손을 다시 붙잡았다.
“축제에 가기 전에 전통 의상을 입어야 해. 혹시 몰라 준비해두길 잘했네.”
“귀찮은데.”
“어머, 임피리아 전통이라고? 어서, 그리 오래 안 걸릴 거야.”
로나가 뚱해진 라벨라를 집안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잠시 후.
“와, 공주님 같아요!”
로나의 뒤를 따라 나온 라벨라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뜬 레아의 입이 헤 벌어졌다.
“!”
대화를 나누고 있던 토라와 이스카의 눈도 덩달아 커졌다.
“라벨라 님, 너무 예쁩니다!”
토라의 감탄사를 바로 옆에서 들으며 이스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눈이 부신 백금발을 하나로 굵게 땋아 옆으로 내리고 짙푸른 벨벳 천을 덧댄 하얀 원피스를 입은 라벨라는 사뭇 청초했다.
얼굴엔 만연하게 띤 못마땅한 기색만 아니었다면, 저절로 앞에 무릎을 꿇고 싶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이스카는 이 모습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급적 누구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움이었다.
“크흠, 그럼 두 분 먼저 돌아보고 계시겠습니까? 저는 상인 조합도 돌아봐야 해서요.”
말없이 라벨라를 빤히 보고 있는 이스카를 힐끔거리던 토라가 눈치껏 두 사람을 바깥으로 떠밀었다.
얼결에 문밖으로 밀려난 두 사람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예쁘네.”
툭 튀어나온 칭찬에 라벨라의 투명한 금안이 삐뚜름하게 올라섰다.
예쁘다는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 여자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웃음을 삼킨 이스카가 라벨라에게 정중히 손을 내밀었다.
“그럼, 라벨라. 나랑 데이트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