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9화 (9/94)

9. 아니면 내가 벗겨주고

“!”

비명 소리가 들리자마자 라벨라는 순식간에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스카와 아르젠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야?”

라벨라는 금방 비명소리의 주인을 찾아냈다. 로나였다. 심지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바구니가 흙바닥에 엎어져 있었고, 쏟아진 내용물이 짓밟혀 터져있었다.

눈물범벅이 된 로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다가 라벨라에게 부축을 받아 몸을 일으켰다.

“레아…… 레아를 데려갔어요.”

“누가.”

“누, 누군지는 모르겠어요, 얼굴을 다 가, 가리고 있어서…….”

로나는 당장이라도 숨이 멎을 것처럼 헐떡거렸다.

“로나!”

“토라…… 우리, 레아. 레아가…….”

뒤늦게 달려온 남편을 본 로나의 울음소리가 커졌다.

“그자들이…… 키, 키르아에 알리면, 우, 우리 레아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범인들의 정체를 대충 알 것 같은 느낌에 라벨라가 후, 작은 숨을 내뱉으며 아르젠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토라. 일단 로나를 집으로 데려가서 진정시키도록 해. 레아는 우리가 데려올 테니까.”

“……네, 부, 부탁드리겠습니다.”

라벨라의 냉정한 목소리에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은 토라가 아내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르젠, 넌 저쪽으로 가. 이스카는 이쪽. 발견 즉시 신호를 보내도록 해.”

“응, 대장.”

라벨라의 지시가 끝남과 동시에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잠시 실례.”

주변의 인기척을 주시하며 달리던 이스카는 보이는 마굿관에서 말 한 마리를 잡아탔다. 주인의 허락 없이 타는 건 미안하긴 하지만 시간을 아끼려면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돌려주든, 혹은 말값을 물어주든 해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마을 끝에까지 다다른 이스카는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노려보았다.

이쯤 됐으면 라벨라와 아르젠도 마을을 벗어났을 텐데 신호가 없는 걸 보니 이미 납치범들은 마을을 벗어난 모양이었다. 이스카는 망설임 없이 숲으로 들어섰다.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어.’

조합장 부부에게는 덤덤한 것처럼 보였겠지만 이스카는 라벨라의 눈에 떠오른 살기를 읽을 수 있었다.

아이를 납치한 괴한들에 대한 분노인 건지, 아니면 그녀가 그토록 좋아하는 싸움을 할 순간이 와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착한 건지 아닌 건지 헷갈린다니까.’

픽 웃은 이스카가 말고삐를 더 바짝 움켜쥐었다. 어느 쪽이든 아이를 무사히 구출해내는 게 우선이었다.

*   *   *

“후, 일단 여기서 멈추자고.”

마을에서부터 쉴 틈 없이 달려온 괴한들은 산 중턱에 이르러서야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 쪼가리를 치운 사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기절했나 본데?”

사내 중 하나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가죽 주머니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한참이나 발버둥 쳐서 힘들게 하더니 조금 전부터 움직임이 없었다.

“중요한 인질이니 죽는 건 곤란해. 쓸모가 있을 거라고. 숨구멍은 만들어 줘.”

“알겠어, 두목.”

털이 덥수룩한 사내는 입구를 꽁꽁 묶어두었던 가죽끈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두목, 마을 녀석들이 키르아에 바로 알리면 어쩌지?”

“그게 우리가 노리는 거야. 어차피 조합장 딸 녀석이 우리 손안에 있는데 함부로 할 수 없을 거야. 먼저 조합장 녀석에게 크게 뜯어내고, 이 녀석을 미끼 삼아 키르아 녀석들을 불러들여야지. 가장 중요한 건 키르아 녀석들에게 복수하는 거다.”

키르아를 떠올린 산적 두목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행복하던 시절이었다. 산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며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풍족하게 지냈다. 그런 행복을 하루아침에 망가뜨린 키르아 녀석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녀석들이 조합장의 딸을 되찾기 위해 산으로 오는 순간,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그때를 대비해 만발의 준비도 진즉 끝내놓은 후였다.

“그런데 왜 요즘 녀석들이 안 보였지?”

사내 하나가 찝찝해하며 중얼거렸다. 길드 키르아는 항상 정해진 날에 마을에 들러 산을 살피곤 했었다.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그 녀석들이 안 보여서 이렇게 우리 작전을 실행할 수 있었던 거잖아.”

“하긴…….”

“자, 이제 다시 출발하자.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산을 넘어야 해.”

두목의 지시에 사내들이 엉거주춤 무거운 엉덩이를 일으켰다.

그때였다.

삐이익.

큰 새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채웠다.

“무슨 소리지?”

“처음 듣는 새소리인데?”

사내들이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올려다 볼 때였다.

“윽.”

무언가 커다란 검은 형체가 빠르게 움직이는가 싶더니 사내 중 한 명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

“어이, 왜 그……, 윽.”

쓰러진 동료를 살피던 남자도 곧 그 위로 쓰러졌다.

“기습이다!”

우왕좌왕하던 사내들이 제각기 무기를 빼 들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그들 앞에 나타난 건 검은 머리의 남자 한 명뿐이었다. 키는 컸지만 육중한 자신들에 비하면 남자는 호리호리해 보였다. 사내들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넌 뭐야?”

“어, 음. 지나가던 사람?”

이스카가 단검 손잡이로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뭐 해? 해치워!”

두목의 명령에 사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이스카에게 달려들었다.

“너무 치사한 거 아냐? 한 놈씩 덤벼야지.”

투덜거리던 이스카가 가볍게 춤을 추듯 몸을 빙그르르 돌려가며 사내들의 목 뒤를 연달아 단검 손잡이로 내리 쳤다.

“죽여, 죽이라고!”

두목이 크게 소리쳤지만 누구 하나 사내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질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두목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에잇.”

두목은 레아가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챙겨 산속 깊은 곳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몇 남지 않은 사내들의 뒷목을 쳐 손쉽게 기절시킨 이스카가 그 뒤를 쫓기 시작했다.

“……레아는?”

그리고 곧 라벨라가 그 옆에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왔네?”

“……아르젠이 느린 거겠지.”

“다른 녀석들은 기절시켰고, 저 녀석이 그 꼬마를 데려갔어.”

“그래? 수고했어. 그럼 먼저 간다?”

“어휴, 급하긴.”

라벨라가 속도를 높여 앞서 나가는 걸 본 이스카도 덩달아 속도를 높여야만 했다.

“어, 저기는 절벽인데.”

라벨라의 중얼거림과 동시에 산적 두목이 움직임을 멈췄다.

“읏차.”

나무 사이를 건너가며 뛰던 라벨라가 공중제비를 돌아 산적 두목의 앞을 가로막았다.

“쳇.”

두목이 급히 옆으로 몸을 틀자 그곳에는 조금 전 수하들을 쓰러뜨린 남자가 길을 막고 있었다.

“비키시지. 안 그러면 이 꼬마의 목숨 줄은 보장 못 해.”

뒤는 절벽, 앞에는 적. 모두가 막히자 두목은 가죽 주머니에 칼을 들이밀었다.

“흉악해라……. 그렇게 어린애를 가지고 협박하고 싶어? 응? 자존심도 없어?”

손에 든 단검을 빙빙 돌리며 라벨라가 빈정거렸다.

“네 수하들은 전부 살려뒀어. 그러니까 너도 이쯤하고 가는 게 어때?”

라벨라가 너그럽게 굴며 기회를 주었다.

“닥쳐!”

하지만 두목은 더 화를 낼 뿐이었다.

“……안 되겠네.”

한숨을 쉰 라벨라가 눈 깜빡할 새에 팔을 휘둘렀다. 조그만 돌이 빠르게 날아가 칼을 쥐고 있던 두목의 손등을 쳤다.

“으악.”

뼈가 부러진 것 같은 통증에 칼을 떨어뜨린 두목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금방 이를 악문 두목이 칼을 다시 쥐기도 전, 레아는 이미 이스카의 손에 구출된 후였다.

이스카가 서둘러 가죽 자루의 끈을 풀어 벗기자 입에 재갈이 물린 레아가 나타났다. 재갈을 풀어준 이스카가 귀를 레아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쉰 이스카가 라벨라를 보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모습을 본 라벨라가 서늘한 눈으로 두목을 내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제 손등을 움켜쥔 채였다.

“……그러게 왜 되지도 않을 이런 짓을 벌여.”

“너희 때문에 우리는 먹고 살길이 막혔다고!”

라벨라가 혀를 끌끌 차며 사내를 책망하자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러게 정도껏 했어야지. 마을 사람들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냐.”

라벨라는 별 감흥 없이 손가락 끝을 퉁기며 제 손톱을 감상했다.

“키르아 대장을 죽이고 가야 속이 후련하겠지만, 좋아. 너희들이라도 죽이고 가겠어!”

산적 두목이 칼을 낚아채고 라벨라에게 달려들었다.

“……살려주려고 했더니.”

라벨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단검을 고쳐 쥐었다.

“…….”

이스카는 혹시나 깨어났을지도 모를 레아를 제 몸으로 가렸다.

사내가 휘두르는 칼을 피하려는 라벨라의 몸이 가볍게 구부러졌다가 날아오르듯 튀어 올랐다. 마치 작은 새가 포로롱 날아오르는 모양새였다.

“으잇!”

헛손질한 사내가 황급히 고개를 들고 라벨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공중에서 떨어지는 라벨라의 검 끝이 정확히 사내의 목을 향해 있었다.

‘피, 피해야……!’

서둘러 몸을 굴리려던 사내의 발이 절벽 끝을 헛디뎠다.

“으어어억!”

육중한 몸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커다란 비명이 메아리쳤다.

“……알아서 갔네.”

땅에 내려서자 찰랑이던 라벨라의 머리칼이 차분하게 제자리를 찾았다.

이스카는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는 움직임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숨을 쉬는 것도 잊게 할 만큼 아찔한 광경이었다.

“이스카, 그 자루 좀 줘 봐.”

“…….”

“……이스카?”

“아……. 이거 말하는 거지?”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이는 라벨라에게서 겨우 시선을 떼어 낸 이스카가 레아를 가두고 있던 가죽 자루를 라벨라에게 던져 주었다.

라벨라가 가죽 자루에 단검을 슥슥 문질러 닦아 냈다. 행여나 더러운 것이 묻었을까 꼼꼼한 손길이었다.

“……엄마.”

레아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아르젠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일찍 일찍 좀 다니자.”

아르젠에게 핀잔을 준 라벨라가 레아에게 몸을 숙였다.

“레아. 집에 가자.”

“……라벨라 님?”

“그래, 레아.”

말투는 무뚝뚝했지만 라벨라의 것이라고 보기에 어려울 만큼 꽤 다정한 목소리였다. 천천히 눈을 뜬 레아가 라벨라를 보고 안심했는지 라벨라에게 안기며 울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이런 걸로 울면 안 돼. 강해져야지, 레아.”

“놈은?”

“저 아래.”

아르젠의 질문에 라벨라의 턱 끝이 절벽을 가리켰다.

“어후.”

아르젠이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혹시나 싶었던 라벨라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 레아를 아르젠에게 넘기고는 절벽 근처로 다가갔다.

훌쩍거리면서도 라벨라를 계속 보고 있던 레아의 눈이 이내 동그래졌다. 제가 엄마와 선물한 머리 장식이 머리카락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곧 떨어질 것처럼 달랑거렸다.

‘어어…….’

결국 머리 장식이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아르젠의 품에서 벗어난 레아가 라벨라에게 달려갔다.

“!”

“레아!”

“어어?”

머리 장식에만 눈을 고정하고 달린 레아는 그 끝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이스카와 아르젠이 즉시 몸을 움직였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

빠르게 몸을 던진 라벨라가 떨어지려는 레아를 잡아 아르젠에게 던졌다.

“라벨라!”

“대장!”

레아는 무사히 아르젠이 받아들었지만 레아를 던지느라 반동에 밀린 라벨라는 절벽 아래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라벨라!”

이스카가 서둘러 절벽 아래를 살폈다.

“라벨라?”

“……아아, 나 여기.”

덤덤한 목소리가 메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이스카는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벨라, 올라올 수 있어?”

“……음. 힘들 것 같은데.”

이스카는 라벨라의 목소리에서 무언가 문제가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내가 내려가 볼게.”

놀란 레아를 다독이던 아르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스카가 내려갈 준비를 하는 걸 도왔다.

밧줄을 단단하게 묶어 고정시킨 이스카가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꽤 한참을 내려오고 나서야 이스카는 절벽 아래로 사람 몇 명이 겨우 누울 만한 공간에 앉아 있는 라벨라를 발견했다.

“여어.”

“……죽는 줄 알았잖아.”

“내가 그리 쉽게 죽을 운명은 아니긴 해.”

“뭐야, 어디를 다쳤어?”

라벨라에게 다가간 이스카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둠 속에서도 라벨라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선명하게 보였다.

“옆구리를 조금? 떨어질 때 나무를 붙잡았는데 삐져나온 가지에 찢겼어.”

상처를 덮고 있는 라벨라의 손 사이로 피가 새어 나오는 게 보였다.

어쩌자고 거기서……!

이스카는 치밀어 오르는 화를 꾹꾹 내리눌렀다. 아이를 구하려 했던 것이니 라벨라를 탓할 수는 없었다. 그냥 이 지경이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자신에게 화가 났다.

“이스카? 어때?”

“…….”

걱정이 섞인 아르젠의 목소리가 위에서 울렸다.

라벨라를 그냥 데리고 올라가자니 상처의 정도가 어떨지 몰라 찝찝했다.

라벨라에게 참으라 하고 올라가기엔 꽤 높이가 있었다. 두 사람의 무게를 밧줄이 버텨줄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르젠, 일단 레아를 데리고 마을로 돌아가.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깨끗한 천과 럼주를 구해 오고. 튼튼한 밧줄과 나무도 필요해.”

“알겠어.”

이스카의 말에 상황을 파악한 아르젠이 재빨리 레아를 챙겨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르젠의 발걸음이 멀어지는 걸 들은 이스카가 라벨라에게 시선을 옮겼다.

“……벗어 봐. 상처 좀 보게.”

“…….”

라벨라는 어딘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왜? 내가 벗겨 줘?”

이스카의 커다란 손이 라벨라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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