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너만 모르는 유혹-8화 (8/94)

8. 손은 놓고 이야기 해

“마을에 갈 거야. 빨리 내려와.”

뒤늦게 이스카의 눈을 마주한 라벨라가 짧게 지시하고는 몸을 돌렸다.

찰랑거리는 금발 머리가 계단 아래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던 이스카가 픽 웃음을 흘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

뒤에서 인기척이 사라지자 걸음을 멈춘 라벨라가 휙 뒤를 돌아봤다.

라벨라는 조금 전 보았던 이스카의 몸을 떠올렸다.

옷에 가려져 있던 탄탄한 상체를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다. 떡 벌어진 어깨에 군살 하나 없는 배는 근육 모양을 따라 깊게 갈라져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몸이었다. 하지만 라벨라가 멈칫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가슴 사이에서 배꼽 위쪽을 지나 옆으로 길게 남아 있던 흉터.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를 만큼 희미했지만 라벨라는 곧장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자상인데.’

크기를 봤을 때 당시에는 꽤 큰 부상이었을 터였다. 어쩌면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르는.

곱상한 외모와는 다르게 이스카도 험한 삶을 살았던 건가 싶었다.

‘쯧. 예쁜 몸에 아깝게 됐어.’

혀를 찬 라벨라가 다시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래서, 어딜 가려고 꼭두새벽부터 깨운 건데?”

훌쩍 말에 오른 이스카가 물었다. 이미 라벨라와 아르젠은 모든 채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꼭두새벽이라니. 해가 중천인데.”

“새벽까지 일했으니까 좀 봐줘, 대장. 요즘 이스카 엄청 바쁘다고.”

“알아주니 고맙네.”

“……그러게 작작 좀 부려 먹으라고 했잖아. 가자.”

이스카를 힐끗 본 라벨라가 아르젠에게 핀잔을 주고는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인근 마을의 초입이었다.

“마을에는 왜?”

“오늘 수금일이거든. 중요한 거라 대장, 칸피덴, 나, 페시니만 그동안 번갈아 가며 해 온 일이야. 그런데 대장이 이제 너에게도 맡길 모양이야.”

이스카가 호기심을 내보이자 말에서 내린 아르젠이 설명을 시작했다.

“……수금일?”

“두 번 말하지는 않을 거니까 잘 들어 둬. 정확히 말하자면 시장 상인들한테 돈을 받는 거야. 이 인근 마을이 다 우리 길드 관할이거든.”

“시장 상인들한테 돈을 받는다고?”

이스카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래, 보호의 대가로.”

“……뭐?”

이스카의 눈이 서늘해졌다.

영주민을 보호하는 것은 영주의 역할이었다. 한낱 길드가 영주민들을 보호한답시고 돈을 받다니.

산을 지킨다며 통행세 명목으로 상인을 약탈하는 산적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돈 되는 일은 다 하는 길드란 건 알고 있었지만 평범한 영주민들에게까지 손을 뻗쳤을 줄은 몰랐다.

이스카는 날카로운 시선을 라벨라에게 옮겼다. 말을 쓰다듬다가 시선을 느낀 라벨라가 이스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왜 저러지?’

이스카와 눈이 마주친 라벨라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스카의 눈빛에 담긴 감정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라벨라. 방금 저 이야기, 전부 사실이야?”

“응. 그런데?”

“당장 그만…….”

이스카의 말은 누군가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에 끝을 맺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라벨라 님!”

작은 꼬마 아이 하나가 달려와 라벨라에게 매달리다시피 폭 안겼다. 고사리 같은 손은 행여나 라벨라를 놓칠까 걱정이 됐는지 라벨라의 옷자락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이스카에게 나중에 이야기하라고 눈짓한 라벨라가 무릎을 굽혔다.

“요 꼬맹이, 오랜만이네?”

라벨라가 개구쟁이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눈높이가 같아지자 붉은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콕콕 박힌 얼굴이 해사하게 웃었다.

“라벨라 님,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약속한 밤보다 세 밤이나 더 지났잖아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양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서운함을 내비치며 투덜거렸다.

“그랬어?”

“헤헤. 보고 싶었어요, 라벨라 님.”

라벨라가 토실토실한 볼을 손가락으로 톡톡 건드리자 아이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 꼬았다. 아이를 번쩍 안아 든 라벨라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라벨라 님. 오늘 레아 집에 가면 안 돼요? 가서 레아랑 밥도 먹고, 레아랑 같이 놀아 주세요.”

“흐응, 생각 좀 해보고.”

라벨라의 품에 안긴 아이는 신이 났는지 연신 꺄르륵 거렸다. 듣기만 해도 유쾌해지는 웃음소리였다.

“시장 상인 조합장의 딸인데 대장을 엄청 좋아해. 자기는 커서 대장과 결혼하겠다고 말한다니까.”

라벨라의 뒤를 따르는데 아르젠이 우습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 어떤 상황인지 일단 파악하고 난 다음에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냉정함을 되찾은 이스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라벨라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어쩌면…… 라벨라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아서 잠시 유예를 두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아 참, 그리고. 상인 조합장 외에는 라벨라가 키르아의 대장인 걸 몰라. 그냥 길드 내에서 일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으니까 너도 적당히 알아서 맞춰.”

이스카는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아르젠을 보다가 자연스럽게 그 곁에 선 라벨라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바로 조합장부터 만날 거야?”

“아니. 그전에 시장부터 한 번 둘러보자. 오랜만에 왔으니까.”

라벨라는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레아의 볼을 콕콕 찌르는 장난을 치며 대답했다. 아이의 오동통한 팔은 라벨라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였다.

‘뭐가 뭔지 모르겠군. 긴장을 너무 풀고 있었어.’

이스카는 한숨을 쉬며 잠시나마 흥분했던 자신을 탓했다. 라벨라에게 빠져든 나머지, 그녀가 키르아의 대장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게 된다.

만약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라벨라에게 의심을 샀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심해야겠군.’

이스카의 눈동자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   *   *

“라벨라, 오랜만이네.”

“라벨라, 이것 좀 먹고 가.”

라벨라, 라벨라. 연신 라벨라를 불러대는 상인들 덕분에 걸음에 속도가 붙질 않는다.

과일 장수는 가장 예쁜 사과를 골라 라벨라에게 건넸고, 라벨라는 한 입 깨물어 먹은 뒤 레아에게 건네주었다. 곡물 장수는 갓 구운 빵을 작은 가죽 주머니에 담아 라벨라의 허리에 매어줬다.

라벨라의 입에서 맛있다는 말이라도 나오면 그들은 뭐라도 하나 더 먹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요즘은 어때? 별일 없고?”

그렇다고 라벨라가 활짝 웃어준다거나 살갑게 말을 거는 것도 아니었다. 무덤덤한 말투로 툭툭 던지듯 안부를 물을뿐이었다.

“다들 대장을 어디 몰락 귀족의 여식인 줄 알아. 사연이 있어서 용병 생활을 하는 줄 알지.”

낯선 풍경에 영 적응하지 못하고 있는 이스카의 귓가에 아르젠이 속삭였다. 이스카의 찡그린 눈이 아르젠에게 향했다.

“그런 소문이 왜 퍼졌는지는 나도 몰라. 굳이 정정할 이유가 없어서 내버려 뒀어. 키르아의 대장이 저런 작은 여자라는 게 알려져서 썩 좋을 것도 아니고.”

“…….”

“아아, 오해하지 마. 그게 부끄럽다는 게 아니니까. 대장 실력이야 우리가 제일 잘 알잖아? 하지만 솔직히. 겉만 봐서는……. 무슨 뜻인지 알지?”

뒷말을 아낀 아르젠이 씩 웃으며 이스카의 동의를 구했다. 어깨를 두들기는 아르젠의 손을 밀어낸 이스카가 아이의 손을 꼭 쥐고 있는 라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냥 겉모습만 본다면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신비로움은 오히려 보호본능을 일으키고, 누구든 그녀를 사랑하게끔 만들 것만 같았다.

그러니 라벨라가 키르아의 대장이라 밝힌다고 해도 누구 하나 믿지 않을 것이다. 이스카는 왜 라벨라의 정보가 알려지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굳이 숨긴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숨겨진 것이다.

“라벨라!”

겨우 걸음을 떼나 싶었는데 이번엔 장신구 상인이 라벨라를 불러 세웠다. 총총걸음으로 달려와 라벨라의 손을 부여잡은 여자가 지친 숨을 골랐다.

“엄마.”

라벨라에게 매달려 있던 레아가 여인을 반겼다. 그러고 보니 붉은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콕콕 박힌 선한 인상이 아이와 똑 닮았다.

“그렇게 뛰어도 돼?”

라벨라의 덤덤한 물음에 로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약을 꾸준히 먹어서 그런지 요즘 많이 좋아졌거든. 전부 너희 덕분이야, 라벨라.”

“아아.”

“참. 라벨라, 네게 줄 것이 있어.”

다급히 품 안을 뒤적인 로나가 이내 라벨라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역시. 생각했던 대로 잘 어울리네.”

라벨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던 로나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로나가 라벨라의 머리에 꽂아 준 것은 연녹색의 구슬이 촘촘하게 박힌 나비 모양의 머리 장식이었다.

로나의 말마따나 머리 장식은 라벨라의 백금발과 퍽 잘 어울렸다.

“……뭐야, 이건.”

“앗, 빼지 마!”

라벨라가 제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가자 레아가 재빨리 라벨라의 손을 붙잡았다.

“엄마랑 레아가 같이 고른 거란 말이에요.”

“…….”

“얼마 전에 물건을 들여왔는데,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챙겨뒀어.”

레아의 투정에 로나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난 이런 거 안 하는데.”

“알아. 그래도 우리 선물이니까 받아 줘, 라벨라.”

강경한 태도에 라벨라가 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내렸다.

“나중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때는 사용하고 싶어질지도 몰라.”

“뭐, 어쨌든 고맙게 받을게.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받아줘서 고마워.”

선물을 준 사람이 오히려 받아줘서 고맙다고 하니 이상한 상황이었다.

“엄마, 라벨라 님이 오늘 우리 집에서 같이 밥 먹기로 했어.”

“정말?”

“아아, 번거롭게 할 생각은…….”

“무슨 그런 서운한 말을! 오랜만에 실력 발휘 좀 해야겠네.”

“……시간 맞춰 갈게. 자, 레아. 엄마랑 집에 가 있어.”

“네, 라벨라 님.”

레아는 못내 아쉬운 듯 뒤를 몇 번이나 돌아보다가 제 엄마의 손을 잡고 사라졌다.

“오늘 저녁은 어쩔 수 없이 여기서 먹어야겠네.”

이스카와 아르젠에게 다가온 라벨라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둘 다 왜 그런 표정이야?”

“아아, 그 머리 장식. 대장한테 아주 잘 어울리…… 악!”

키득거리며 라벨라의 머리를 가리키던 아르젠이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미간을 찡그린 라벨라에게 걷어차인 탓이었다.

투덜거리던 라벨라가 머리 위로 손을 뻗을 때였다.

“빼면 아까 그 꼬맹이가 서운해할 텐데.”

이스카의 커다란 손이 라벨라의 손을 잡아 멈추게 했다.

“그냥 하고 있어. 잘 어울리니까.”

“…….”

“진심이야.”

이스카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라벨라가 픽 웃으며 입꼬리를 틀었다.

“알았으니 손은 놓고 이야기해.”

*   *   *

“오셨습니까.”

“오랜만이야, 토라.”

레아의 아빠이자 상인 조합장인 토라가 손님을 맞으며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나도, 나도 따라갈래.”

“레아. 너는 엄마를 도와줘야지.”

라벨라의 뒤를 쫓으려던 레아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웃음을 삼킨 토라가 일행을 응접실로 데려갔다. 응접실이라고 해 봐야 테이블 하나가 겨우 놓여 있는 작은방이었다.

“이달 분입니다.”

토라가 곧장 작은 가죽 주머니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쩔그럭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돈주머니인 모양이었다. 이스카는 찌푸려지려는 표정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아르젠.”

“응, 대장.”

평온한 침묵 속에 아르젠은 주머니를 열어 금액을 확인하고는 라벨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라벨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아르젠은 주머니를 제품에 챙겨 넣었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스카가 토라를 힐끗 살폈다. 토라의 표정은 상당히 밝아서 돈을 강제로 뺏기는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라벨라 님.”

“고마워할 거 없어. 어디까지나 우리는 대가를 받고 하는 거니까.”

라벨라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라벨라 님이 아니었다면 제 아내는 지금쯤…….”

고개를 떨어트린 토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떨렸다.

“정말 그때 생각만 하면…….”

토라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윽. 나 먼저 나간다?”

마치 도망치듯 라벨라가 휙 나가 버렸다. 그녀가 떠나고 사내 셋만 남은 자리에는 토라의 훌쩍이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이봐, 토라. 적당히 하고 나오라고. 딸 앞에서 울보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아르젠도 놀리듯 약을 올리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봐, 조합장.”

“네?”

“라벨라와 무슨 일이 있었지?”

“……라벨라 님은 우리 은인이십니다. 우리 시장 상인들은 라벨라 님과 키르아 분들께 갚지도 못할 빚을 졌지요.”

같은 길드 아닌가? 훌쩍이던 토라가 의아해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리비아 성 옆의 여행자 마을을 아십니까?”

이스카가 라벨라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이 마을에서 그곳까지는 말을 타고 사나흘이 걸리는 거리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곳은 이 마을이었습니다. 그때는 마을이 지금보다 더 크고 활성화되어 있었지요. ……그 산적 놈들만 아니었어도.”

토라의 얼굴에 떠오른 그리움이 이내 분노로 바뀌었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을 그놈들이 막으면서 이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이 점점 줄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상인들이 판매할 물건도, 마을 사람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까지도 산적들에게 막혀 조달할 방법이 없어진 겁니다.”

“…….”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그놈들에게 통행세를 냈습니다만…… 그놈들은 점점 높은 값을 부르기 시작하더군요. 나중에는 저희가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의 기억에 화가 나는지 토라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을을 찾는 여행자들로 먹고살던 곳이었는데 사람이 찾질 않으니 수입이 줄어들고 그 와중에 통행세를 내야하고…… 모든 게 악순환이었습니다.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기 시작하고, 그나마 남아 있는 사람들의 형편도 악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주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나?”

“몇 번 목숨을 걸고 성을 찾아간 이들이 있었긴 했습니다만…… 영주님의 군사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번번이 산적 놈들에게 패했다고 들었습니다.”

“…….”

“절망적이었죠. 제 아내도 그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지병을 앓고 있어서 항상 약을 먹어 왔는데 여기선 구할 수 없는 거였거든요.”

이스카는 입안이 텁텁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 저희를 도와주신 분이 라벨라 님이었습니다. 우연히 이 마을에 들렀던 라벨라 님이 상황을 아시고는 산적 놈들을 깨끗하게 처리해주셨죠.”

토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그의 눈동자에는 고마움과 존경스러움이 고루 섞여 있었다.

“그 이후로 저희 마을은 키르아에 공식적으로 의뢰를 넣었지요. 마을을 산적들로부터 보호해달라고요.”

‘그런 거였군.’

이스카는 조금이나마 라벨라를 오해한 것이 미안해졌다. 한편으로는 기쁜 것도 같았다.

“사실 턱없이 부족한 금액입니다만…… 라벨라 님은 주기적으로 마을 주변을 확인해주십니다. 키르아의 보호를 받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산적놈들은 이 근처로 얼씬도 하지 않게 됐고요. 떠났던 마을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고, 여행자들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옛 모습을 찾게 될 겁니다. 이 모든 게 다 라벨라 님 덕이지요.”

“……그렇군.”

“하하, 제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어서 나가서 식사하시지요.”

토라와 이스카가 문을 열고 나오자 벽난로 앞에 대충 앉아 있던 라벨라가 고개를 돌렸다.

“사내 녀석들끼리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아?”

“…….”

이스카는 실눈을 뜬 라벨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더 예뻐 보이는 것도 같고.

“하하, 죄송합니다. 로나?”

“아아. 두 사람은 잠시 나갔다 온다고 했어.”

아내와 딸을 찾는 토라에 라벨라가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찰나.

“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찢어질 것 같은 여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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