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벗어날 기회는 지금뿐
“뭐라고?”
라벨라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낭창한 목소리에 비웃음이 섞이고 동그란 어깨선이 불만스레 으쓱였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하얀 귀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과 그 끝의 손톱 모양마저 사랑스러운 여자였다.
“정확히 들은 거 맞아.”
커다란 손을 뻗어 라벨라의 작은 손과 귀를 한번에 감싼 남자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는 오늘 밤, 이 베갯머리송사를 꼭 성사시킬 작정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결혼이라고 했어? 나더러 황후가 되라는 뜻이야?”
“맞아.”
“너 미쳤구나?”
열정적으로 몸을 섞은 뒤에 이런 헛소리를 듣게 될 줄 몰랐던 라벨라가 눈을 치켜떴다.
“너 내가 누구인지 잊었어?”
“잘 알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암살자이자, 임피리아 최고의 암살 길드인 키르아의 대장이잖아?”
마치 놀리는 것 같은 말투에 일자로 곧게 뻗은 라벨라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라벨라는 제 허리를 지분거리는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기꺼이 좋아해 마지않는 어둠을 닮은 새까만 머리칼과 반짝이는 자수정을 박아 놓은 것 같은 눈동자.
아름다운 남자였다. 물론 단순히 외모 때문에 그를 마음에 들어 했던 건 아니었지만.
“싫어, 기각이야. 내가 키스하고, 몸을 섞는 남자는 이스카지 루비츠 황자는 아니야.”
라벨라가 옆에 던져두었던 옷을 꿰입으며 차갑게 읊조렸다.
“내가 누구이든 전부 받아들여야 할 거야, 라벨라.”
“…….”
모로 누워 상체를 세운 남자가 찰랑거리는 라벨라의 백금발 끝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어차피 난 널 놓아 줄 생각이 없거든. 넌 이대로 내 곁에서 평생을 살아야 해.”
“……뭐?”
라벨라의 금안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니 라벨라, 네게 선택지는 단 둘뿐이야.”
몸을 섞으며 눅진해졌던 공기 위로 첨예한 긴장감이 서렸다.
“황후가 되든가.”
“…….”
“……날 죽이든가.”
보랏빛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라벨라가 사내의 몸 위로 올라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침대가 잘게 흔들리며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럼 죽이지 뭐.”
지극히 담백한 말투로 답한 라벨라가 머리맡에 두었던 단검을 집어 들었다.
라벨라가 들이민 검 끝의 매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남자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마치 지금 그녀의 손에 죽는다 해도 미련이 없는 사람처럼.
“……죽여, 라벨라.”
남자는 단검을 쥔 라벨라의 손을 제 목으로 끌어당기며 희미하게 웃었다.
뾰족한 날 끝이 어느새 남자의 목에 닿았다.
“네가 벗어날 기회는 지금뿐이니까.”
살갗을 파고든 검의 날을 타고 핏방울이 도르르 흘러내렸다.
붉은 핏방울이 하얀 시트를 적시며 번지는 걸 본 라벨라는 하마터면 검을 놓을 뻔했다.
‘왜, 어째서?’
라벨라는 움직이지 않는 제 손이 마치 다른 이의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남자는 복잡해진 라벨라의 금안을 보며 웃었다.
“……넌 날 죽일 수 없을 거야.”
“왜 그렇게 자신해? 네 숨통을 한 번에 끊을 수도 있어.”
뾰족한 말이 비수처럼 튀어 나갔다.
“몰라서 물어?”
남자는 픽 웃으며 눈을 휘었다.
“날 사랑하잖아, 라벨라.”
“…….”
“내가 널 사랑하듯이. 너도, 나를.”
남자의 붉은 입술이 주문을 외우듯 부드럽게 움직였다.
“라벨라.”
‘하아.’
유혹하듯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라벨라는 질끈 눈을 감아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거지?
왜?
라벨라는 시간을 돌리고 싶어졌다.
이 남자, 이스카를 처음 만났던 그때로.
*
달도 별도 빛을 잃은 어두운 밤.
휙.
끝에 커다란 갈고리가 달린 밧줄이 허공을 갈랐다.
“…….”
밧줄을 팽팽하게 당겨 본 남자가 곧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목적지에 다다른 남자가 주변을 살핀 뒤 손짓하자 제각기 날아간 갈고리들이 성벽의 안쪽에 단단히 박혔다.
성벽에 오른 이는 총 여섯.
다섯 사내의 눈이 마지막에 올라온 그들의 대장, 라벨라에게로 향했다.
사내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고 가녀린 체구였다.
들고양이처럼 몸을 웅크리고 앉은 라벨라의 투명한 황금색 눈이 웅장한 성을 훑다가 수하들에게로 향했다.
‘둘은 왼쪽, 둘은 오른쪽, 그리고 넌 날 따라와.’
소리 없이 손짓으로만 내린 지시에도 수하들은 칼같이 움직였다.
세 방향으로 흩어진 무리는 풀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여기다.’
미리 의뢰인에게 받은 정보대로 목적지에 도달한 라벨라는 툭 튀어나와 있는 발코니까지의 높이를 가늠해 보았다.
‘이 정도면 그냥 뛰어도 되겠는데?’
라벨라의 의중을 파악한 수하가 눈치껏 몸을 낮추며 제 손을 내밀었다.
라벨라의 작은 발이 수하의 손을 밟자 그는 반동을 주어 라벨라를 있는 힘껏 위로 던져 올렸다.
한 마리 작은 새처럼 날아오른 라벨라가 가볍게 발코니에 안착했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라벨라가 기척을 죽였다.
희미하게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열린 침실 문 틈 사이로 침대 위에 대자로 뻗어 있는 사내가 보였다.
라벨라는 허벅지에 고정했던 단검의 손잡이를 그러쥐었다.
좁은 문틈 사이로 라벨라의 작은 몸이 슥 미끄러져 들어갔다.
방 안에는 독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주변을 살핀 라벨라는 허리춤에 있는 헝겊을 빼내 재빨리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흐윽!”
남자가 억눌린 비명을 질렀다.
공포에 질린 남자의 눈이 침입자의 정체를 확인하려 위로 향할 때, 검은 천이 씌워졌다.
남자가 반항하지 못 하도록 발목과 손목을 묶는 데까지는 3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자신의 체구보다 훨씬 큰 사내의 몸을 짐짝처럼 짊어진 라벨라가 창문으로 가 망설임 없이 남자를 집어 던졌다.
수하들이 잡아 팽팽하게 펼쳐진 천에 남자가 먼저 떨어지고, 곧바로 뛰어내린 라벨라가 사뿐하게 천을 밟았다가 곧 바닥으로 내려섰다.
거미가 거미줄로 먹이를 묶듯이 수하 둘이 남자의 몸을 천으로 휘감았다.
‘가자.’
라벨라의 고갯짓과 동시에 파도가 밀려 나가듯 까만 인영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안의 누구도 이 침입자들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 당신들 정체가 뭐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깊은 산속.
얼굴의 천을 치우고 재갈을 풀어주자마자 퉁퉁한 얼굴의 사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사내는 겁에 질려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지만, 어둠 속에서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정체 모를 이들의 날카로운 눈빛뿐이었다.
“대장, 어떻게 처리할까?”
그중 가장 키가 큰 이가 옆구리에 찬 검을 꺼내며 물었다.
“히익! 사, 살려주세요.”
바닥에 벌레처럼 널브러져 있던 사내가 급히 무릎을 꿇으며 사정했다.
영주의 동생이라는 배경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저지른 자였다.
최근 남편이 있는 부녀자를 겁탈하는 죄까지 저지른 탓에 참다못한 영주민들이 결국 반기를 들고 말았다.
동생을 내치려던 영주는 모친의 극렬한 반대에 골머리를 썩다가 비밀리에 길드를 찾은 거였다.
그 성품 좋기로 유명한 영주가 오죽했으면 제 동생을 처리해 달라 청했을까.
“사고사로 처리해달라고 했으니까 깔끔하게 끝내자. 그리고 늑대 무리에게 던져줘.”
“알겠어, 대장.”
“히익!”
라벨라의 차가운 지시에 사내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사, 살……!”
말을 끝맺기도 전, 누군가가 휘두른 검에 사내는 바닥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사내의 피가 바닥으로 번질 때쯤, 라벨라의 금안이 번뜩였다.
“……수고를 덜었네.”
“그러게.”
포위를 점점 좁혀오는 살기를 느끼며 라벨라와 수하들은 제각기 말에 올라탔다.
먼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을 내는 두 쌍의 눈동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늑대 무리였다.
*
신속하게 말을 몬 일행은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마을 근처에 도착했다.
영주의 성에서는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이건 뭐, 너무 싱거운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린 수하 중 하나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으며 투덜거렸다.
“대장까지 나서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마지막에 만난 늑대 무리 때문에 귀찮을 뻔하긴 했지만, 강렬한 피 냄새에 취한 늑대들은 다행히 라벨라의 일행을 쫓아오지 않았다.
이젠 영주에게 일이 깔끔하게 끝난 걸 확인시켜주고 잔금을 받기만 하면 됐다.
“비싼 의뢰였으니까 성의는 보여줘야지.”
말의 궁둥이를 툭툭 쳐준 라벨라가 씩 웃으며 복면을 벗자 백금발의 긴 머리칼이 굽이치며 흘러내렸다.
달빛을 받은 새하얀 피부와 금안이 머리칼만큼이나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 자도 어지간히 속을 끓였나 봐? 그렇게 거액을 내놓은 걸 보면. 그렇지?”
“망나니 동생을 둔 게 죄지 뭐.”
수하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말을 보태며 얇은 가죽 갑옷을 벗고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대장. 일도 빨리 끝났는데 시원하게 한 잔 어때? 응?”
마을로 들어가는 길, 가장 덩치가 큰 페시니가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리는 시늉을 하며 군침을 삼켰다.
생각만으로도 즐거운지 덥수룩한 턱수염에 덮인 입술이 귀밑까지 벌어져 있었다.
“나는 씻고 잘 거야, 너희들끼리 마셔.”
“에이, 대장. 재미없게 왜 이래? 대장이 빠지면 무슨 재미야.”
“흥, 또 나 혼자 남겨두고 다 취해서 뻗으려고 그러지? 귀찮아. 난 빼 줘.”
“그때 한 번 그런 걸 가지고. 대장 생각보다 뒤끝이 길다니…… 미안, 미안.”
라벨라를 놀리려던 페시니는 라벨라가 제 허벅지의 단검으로 손을 가져가는 걸 보고는 바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럼 우리끼리 마셨다고 나중에 삐지기 없기야?”
“됐거든?”
페시니가 여관 2층 계단을 오르는 라벨라의 뒤에다 대고 소리치자, 라벨라가 새침한 얼굴로 콧방귀를 꼈다.
“…….”
그러다가 생각이 바뀐 듯, 몸을 돌린 라벨라가 다시 계단 몇 칸을 내려왔다.
“왜, 대장? 마시려고?”
페시니가 기대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 내가 쏘는 거야.”
“우하하, 대장 최고!”
라벨라가 휙 던진 돈주머니를 받아든 페시니가 그 안을 열어보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적당히들 마셔.”
픽 웃은 라벨라가 가벼운 마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여관 안주인에게 목욕물도 부탁해놨겠다, 느긋하게 씻고 숙면을 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벨라의 계획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송두리째 박살이 나고 말았다.
“잠시만요, 좀 나와 보셔야겠어요!”
씻기 전에 무기를 정돈하던 라벨라는 문을 쾅쾅 두들기는 안주인의 목소리에 한쪽 눈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죠?”
“같이 온 일행들이 밑에서 싸우고 있어요! 주변에 말릴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어떻게 좀 해주세요! 이러다 여관 다 부서지겠어요!”
이미 몇 번 묵으면서 친분을 쌓은 터라 당장에 라벨라를 쫓아온 모양이었다.
“싸우고 있다고요?”
“네에!”
라벨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되묻자 여주인이 발을 동동 굴렀다.
어디 가서 사고치는 녀석들은 아닌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라벨라는 튜닉 한 장만을 걸친 채 안주인을 따라갔다.
“!”
계단을 다 내려가기도 전, 상황을 확인한 라벨라가 이를 악물었다.
부서진 테이블과 깨진 잔들,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쏟아진 술.
펍 내부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손님들은 모두 겁에 질려 밖으로 도망친 모양이었고 난장판의 한가운데에는 주범인 페시니가 숨을 시근덕거리며 서 있었다.
“뭐 하는 짓이야!”
“……대, 대장.”
라벨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자 곰처럼 큰 페시니가 아차 싶은 얼굴로 어깨를 움츠렸다.
“너희는 안 말리고 뭐 했어?”
라벨라가 화가 잔뜩 난 눈으로 수하들을 하나씩 노려보자 다들 시선을 피하며 딴청을 부렸다. 믿었던 칸피덴까지도.
“대장? 저 조그만 여자가?”
그때 빈정대는 목소리가 난데없이 끼어들었다.
“그 입 닥쳐!”
페시니의 격한 반응을 보니 페시니와 시비가 붙은 자인 모양이었다.
라벨라는 페시니가 바락바락 소리치는 상대에게 시선을 옮겼다.
테이블 위에 걸터앉은 남자가 꼰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어둠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까만 머리칼에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그런데, 남자가 맞긴 한가?
라벨라는 여인보다 더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멀쩡하네?’
난장판이 된 펍 내부를 다시금 훑은 라벨라가 남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페시니와 이 정도로 판을 벌였으면 죽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중상은 입었어야 했다.
그런데 남자는 다치기는커녕 굴러다니던 사과 한 알을 집어 아삭아삭 베어 먹는 여유까지 보였다.
남자도 라벨라가 신기하기는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남자의 내리깐 눈이 노골적으로 라벨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보겠지.
모든 이가 찬양하는 외모조차 제 무기로 사용하는 라벨라가 이해한다는 듯 조소했다.
“……저기.”
라벨라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제게 홀린 남자를 입안의 사탕처럼 굴리는 것쯤이야 쉬웠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대신 사과할 테니까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는데.”
“그쪽이 대장이야?”
하지만 남자는 라벨라의 천사 같은 미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어라, 안 먹혀?’
“……보시다시피?”
수긍하는 라벨라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올라섰다.
“흐응, 그래.”
검지로 제 입술을 톡톡 건드리던 남자가 들고 있던 사과를 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어쩌지? 그쪽이 대신 사과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는데.”
픽 조소한 남자가 오만하게 턱을 치켜올렸다.
“……뭐?”
라벨라의 미간에 주름이 잡힐 때였다.
“저 곰 같은 자식이 날 여자로 착각했다고. 이런 모욕은 난생처음이라서 말이야.”
“…….”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털보 자식이.’
사태의 원흉을 알게 된 라벨라가 페시니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여인이나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라벨라가 특히나 철저하게 단속하는 부분이었다.
“아,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냥 술 한잔하자고 권유했을 뿐이야. 그리고 저 키를 봐! 어떻게 여자로 착각했겠어?”
화들짝 놀란 페시니가 흠흠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넌 이따 보자.’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내 불찰이야. 어떻게 하면 마음이 풀릴까?”
눈으로 페시니에게 경고를 준 라벨라가 어린 동생을 달래듯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 의뢰가 다 마무리된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소란을 일으켜 봐야 좋을 게 없었다.
“흐음.”
남자의 시선이 라벨라의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를 눅진하게 훑어 내렸다.
물기가 촉촉하게 남아있는 금발 머리와 튜닉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다리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나랑 데이트 한 번 해주면?”
“…….”
그럼 그렇지.
흡족해진 라벨라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