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42화
내 인생을 바꿀 중요한 사람
“오늘밤엔, 나랑 있어 줄 수 있어?”
다분히 유혹적인 속삭임에 이서는 귀가 녹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그대로 그에게 완전히 안길 뻔했다.
그의 뇌쇄적인 눈빛에 이서는 입이 마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만 붉힐 뿐, 그의 제안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최 원은 절 지독히도 애태우는 정이서가 못마땅했다.
당장 같이 살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오늘밤 같이 보내자는 건데.
그가 한참 양보했는데도 여전히 대답 없는 그녀가 얄미워 최 원은 그녀의 말랑한 귓불을 어루만졌다.
어서, 빨리 대답하라고. 절 애태우는 건 여기까지 하라는 듯.
그 눈빛에 마음이 읽히기라도 한 걸까?
이서는 애써 웃음을 참다 입을 열었다.
“……좋아요, 대신.”
“대신?”
이서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샤워 좀 할게요.”
이서는 엉덩이를 뒤로 빼 그의 몸에서 살짝 떨어졌다.
그대로 그의 반경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최 원은 어림도 없다는 듯 이서의 팔을 당겨왔다.
그리고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선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의 숨결이 닿는 자리마다 발진이라도 일어나듯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이서가 몸을 웅크리자 그가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지금 충분히 향기로운데.”
남사스러운 말에 놀란 이서가 헉 소리를 냈다.
그럴수록 그는 새끼 고양이가 품속으로 파고들 듯 이서에게 치댔다.
바깥에선 그렇게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압도하는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이서는 겨우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 뭐예요. 간지러워요.”
“씻지 마, 나랑 계속 있자.”
“샤워도 안 하고 어떻게 자요?”
“그동안 씻은 적 없는데?”
그 말에 이서가 그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그동안은!”
두바이에서도, 강원도에서도…….
정신없이 타오르는 바람에 그럴 겨를이 없었다.
부끄러움에 몸을 비틀어 그의 팔에서 빠져 나온 이서가 재빨리 소파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어림도 없다는 듯 이서의 앞을 최 원이 막아섰다.
아홉 살짜리 소년처럼 입가에 장난기를 잔뜩 묻히고서.
“그럼…… 같이 샤워할까?”
“미, 미쳤어요?”
“왜?”
그는 아무 일도 아닌 양 태연하게 굴었다.
이서는 그런 그가 얄미워서 한 번 흘기고는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그는 한 걸음 떨어져 이서를 따라 걸었다.
“같이 샤워할 생각 없어요, 미쳤나 봐!”
이서가 그를 떼어놓으려는 듯 발길을 재촉했다.
“알겠어, 안 따라가. 대신.”
욕실 앞에 다다른 이서는 슬쩍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덩치 큰 남자가 애달프게 말했다.
“나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
“……난 샤워 오래 하는 편인데요?”
“난 참을성이 없는 편이야.”
그의 떼쓰는 말에 이서는 황당한 듯 헛웃음을 지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이서가 욕실 문을 닫자 심장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은 불그스름하다 못해 새빨갰다.
어둠속에서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 인간이 있을까?
최 원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이서에게 홀린 듯, 그녀를 쫓았다.
마치 달빛을 몸에 바른 듯 투명하게 반짝이는 이서의 피부.
만질 때마다 그의 손가락에도 반짝이는 분진이 묻을 것만 같았다.
은빛을 내는 반짝거림은 차디찰 것만 같았지만, 그녀의 체온은 햇볕처럼 따뜻하기 그지없었다.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은 최 원은 이서의 체온을 갈구하듯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샤워 가운 속, 그녀의 몸을 헤칠수록 뜨거워 최 원은 더 깊이 이서를 갈구했다.
최 원의 입술이 이서의 배꼽 위에 닿았다.
최 원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납작한 배를 간지럽히자 이서가 까르륵 웃었다.
“아핫핫! 간지러워요.”
이서의 웃음소리에 최 원 역시 기분이 좋아진 듯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한껏 뜨거웠던 분위기를 그녀가 웃음소리 한 번으로 바꿔 버렸지만, 그는 오히려 그녀의 호쾌한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사람들이 아는 정이서는 절대 이렇게 웃지 않을 테니까.
이것마저도 오로지 그만이 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웃기도 하네?”
“간지럽잖아요.”
“듣기 좋아, 그런 웃음소리.”
최 원은 다시 그녀의 몸에 집중했다.
동그란 배꼽 위부터 시작해 잘록한 옆구리.
그리고 동그란 골반에 그의 입술이 닿자 이서의 웃음소리는 곧 야릇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흐으읏.”
간드러지는 신음 소리에 최 원은 더욱 그녀의 몸을 힘줘 잡았다.
이 신음도 오직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것.
제 체온을 올리는 그녀의 신음 소리가 최 원은 가장 마음에 들었다.
온종일 끊이지 않고 듣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신음 소리가 멈추지 않게, 최 원은 그녀를 더욱 거칠게 다뤘다.
침실 안에 그녀의 소리가 커질수록 그의 몸도 더욱 뜨겁게 경직됐다.
열기에 부풀어 오르고, 딱딱하게 굳었다. 더 뜨겁게, 계속해서 그의 몸의 온도를 올렸다.
평생 꽝꽝 얼어붙어 있던 그의 마음까지도 열기에 녹아 물방울이 뚝뚝 맺힐 정도였다.
이서가 주는 열기만큼 복수가 내뿜는 냉기도 세력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것처럼 끊임없이 그를 상기시키고 긴장하게 했다.
정이서에게 빠져 네가 할 일을 잊지 말라고, 너는 반드시 그들의 가슴에 칼을 꽂아 넣어야 한다고 말이다.
고기압과 저기압이 세력 싸움을 할 때마다 그의 가슴엔 천둥번개가 쳤다.
그때, 그의 다리 위에 앉아 있던 이서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녀는 물기에 젖은 두 눈으로 최 원을 마주보았다.
그 커다란 눈이 얼마나 반짝거리는지, 망망대해에서 홀로 떠돌던 그에게 등대가 되어주는 것 같았다.
여기라고, 최 원 네가 올 곳은 여기라고 끊임없이 반짝였다.
이서는 그의 힘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다 문득 입을 열었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나 여기 있으니까.”
침대 위에서 하기엔 뜬금없는 말이었지만, 최 원은 그 말에 긴장이 쭉 풀리는 것 같았다.
“흐읏, 당장 같이 살지 않아도, 또 재한에 내가 있어도……. 흣, 난 당신 거예요.”
“정이서.”
한 손으론 이서의 골반을 꽉 잡고 다른 손으론 이서의 등을 고정시킨 최 원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답지 않게 어찌나 목소리가 애달픈지, 이서는 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난 끝까지 당신 편 할 테니까 불안해하지 마.”
이서의 그 말 한 마디에 최 원의 마음에 불었던 돌풍이 뚝 꺼지는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을 휘젓던 천둥번개도. 평생 그가 품었던 냉기도 뚝 꺼지는 것 같았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최 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서야.”
이서가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그를 꽉 안았다.
그녀의 온기에 최 원은 이대로 녹아 없어져도 좋을 것 같았다.
평생 꿈꿔 왔던 복수도 이제는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없을 것 같았다.
미친 짓인 걸 알면서도, 그냥 정이서만 있다면 이대로 좋을 것 같아서.
“정이서.”
“응?”
“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넌 절대 상상도 못할 거야.”
최 원은 이서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앓았다.
밤새 그녀의 사랑을 확인한 최 원은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이리저리 튀었던 걱정들과 염려들도 깨끗이 지워졌다.
최 원에게 정이서란 마법 같은 존재였다.
그녀는 그가 평생 꿈꿔 오지 않았던 걸 꿈꾸게 하는 것도 모자라,이제 그의 마음에 품었던 복수심도 한결 누그러트렸다.
만약 그의 복수에 이서까지 다친다면. 그래서 그녀가 떠나게 된다면…….
“이제 그걸 상상하기 싫은데.”
그녀를 묶어 놓기 위해 별별 짓을 다하고 있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안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잠든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매만지며 그녀를 확인했다.
“네가 완전히 내 것이 되길 원해.”
넌 계속 내 편이 되어 준다고 했지만, 그럼에도 도망치지 않는다는 보장을 원해.
그러기 위해선 난 너에게 족쇄를 채워야 할까?
최 원은 한숨을 쉬며 문득 재한에 묶여 있는 정이서를 떠올렸다.
괴로움에도 엄마의 약 때문에 못하고 있는 정이서를 떠올렸다.
그녀가 괴로워할 거라는 건 알지만.
그걸 이용하면 제가 이주협과 똑같은 쓰레기가 된다는 걸 알지만.
“너만 묶어둘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을 정한 최 원은 이내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나갔다.
그는 핸드폰을 한참 만지작거리다 결심한 듯 전화를 걸었다.
몇 번 신호음이 울렸을까? 수화기 너머에선 영어로 기분 좋은 인사가 들렸다.
-LEO, 오랜만이야. 살아 있는 건 맞지?
그에 최 원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가 없으니 보안이 심히 걱정되는 걸? 돌아올 생각은 없어?
“없어, 지금 여기 생활에 무척 만족하고 있거든.”
-모두 너만 기다리고 있는데, 아쉬운 소식이네. 그런데 왜? 만족스러운 생활도 제쳐두고 나한테 전화를 한 이유는 뭐야?
“혹시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나?”
-물론, 내가 도움이 된다면 기쁘지.
쿨한 반응에 만족한 듯 최 원이 싱긋 웃음을 지었다.
“내가 신약 하나를 찾고 싶은데.”
-신약? 너 어디 아파?
“아니, 나 말고 꼭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
-그래, 내가 한번 알아보지. LEO 네가 하는 부탁인데 내가 꼭 해결할 수 있으면 좋겠네.
최 원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나한텐 정말 중요한 일이야.”
내 인생을 바꿀 만큼 아주 중요한 일.
그러니 제발 그의 손에 그녀가 잡히길, 그는 간절히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