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41화
나도 내 편을 가지고 싶어.
“저희 대표님이 무례했던 건 아니죠?”
그 시각, 퇴근 후 최 원을 만난 이서가 조심스레 물었다.
온종일 이재영이 그에게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렸을까 봐 신경이 쓰였다.
괜한 소리를 했을까 싶어 불안하기도 했고.
최 원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이서를 보며 씩 웃어 보였다.
“왜? 내가 때리기라도 했을까 봐?”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최 원은 걱정 많은 이서의 손을 꼭 잡았다.
“내 기분 신경 쓸 거 없어, 내 선에서 알아서 정리했으니까.”
최 원은 이서의 손을 조물거리다 이내 그녀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보들보들한 손에 입을 맞춘 것만으로도 그는 큰 만족감을 얻었다.
그녀와 이렇게 맞닿아 있는 것만으로도, 정이서가 완전히 제 것이 된 것 같았으니까.
감히 정이서가 제 것인 양 굴던 이재영에게 한 방 먹인 것 같기도 했고.
이재영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지금 정이서는 제 옆에 있다고. 또 기회가 생긴다면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때, 이서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낮에 전화로 했던 말 있잖아요.”
갑자기 그녀가 신중한 얼굴을 하는 것 보니 LIMS로 오라고 제안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솔직히 최 원은 정이서가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을 줄 알았다.
저와 같이 살자는 말에 고민도 없이 대답했던 것처럼, 직장 또한 충분히 옮길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서는 아무래도 걸리는 게 많은 듯했다.
15년간 잃어버렸던 제 삶을 찾기 위해 모든 걸 감수한다고 했지만.
단 하나, 그녀가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듯했다.
“말했다시피 엄마 약 문제가 있어요. 제가 누구랑 사는 것까진 신경 안 쓰겠지만, 재한에서 나가서 LIMS로 가면 분명 말이 나올 것 같아요.”
이서가 그늘진 얼굴로 말했다. 최 원은 더 따져 묻지 않았다.
“그래, 네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해.”
재한 제약에서 이서 엄마의 약을 개발하지 않았다는 걸 말할까도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 문제는 이재영이 곧 터트릴 것 같았다.
저는 이제 이서와 좋은 이야기만 나누고 싶었다.
얼굴을 붉히고 예민한 이야기를 하는 건 이재영의 몫이다.
저는 이서와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기에도 모자랐다.
만에 하나 제가 이 이야기를 그녀에게 하게 되더라도, 대책을 세운 뒤여야 했다.
재한 제약이 만든 치료제가 아닌 다른 치료제를 찾은 뒤에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이서는 오직 자신만 신뢰하고 의지하게 될 거다.
그렇게 계속 마음이 쌓이다 보면, 그를 원망해야 할 순간에도 쉽게 원망할 수 없겠지.
그는 먼 미래까지 철저하게 계획한 뒤에 이서의 마음을 제 손 안에서 굴리고 싶었다.
그가 원하지 않는 순간에 정이서가 그를 떠나는 일이 없도록.
확실하게 계획해야 낭패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운전하는 차는 낯선 동네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차창 밖을 보던 이서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가 묵고 있는 호텔과도 정반대 방향이었고, 이서의 집과도 꽤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최 원은 대답 대신 그저 웃음을 지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을 앞둔 사람처럼 두 눈엔 기대가 한 가득 담겨 있었다.
최 원이 도통 대답해 주지 않으니 이서는 속으로 가늠할 뿐이었다.
이서는 이제 그를 따르는 데 어떤 의심과 불안도 없었다.
그저 그와 함께 할 수 있음에 행복할 뿐.
“조심히, 천천히.”
어느 건물에 도착한 최 원은 이서의 뒤에 서서 손으로 그녀의 눈부터 가렸다.
그의 가슴에 등을 딱 붙인 이서는 그를 따라 조심히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대체 어디 가는데…….”
“쉿, 분명 깜짝 놀랄 거야.”
최 원의 목소리엔 기대감이 잔뜩 서려 있었다.
대체 어디를 가길래 이렇게 신이 난 건지.
이서는 그 상태로 한참을 걸어서야 한 자리에 설 수 있었다.
“다 왔다.”
최 원은 그녀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말했지? 네가 나한테 온다면, 난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 있다고.”
이서는 그의 속삭임에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대체 여기가 어디길래 그래요?”
그의 비장한 말에 이서는 점점 더 기대감이 커졌다.
최 원은 그녀의 눈을 가린 손을 풀어주었다.
이서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서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당황해하며 물었다.
“……뭐예요?”
이서가 고개를 돌려 최 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잔잔한 웃음만 보일 뿐, 자세한 설명을 하진 않았다.
조금만 둘러보아도, 그가 이곳에 그녀를 데리고 온 이유를 알아차릴 수 있을 테니까.
“여긴…….”
마치 모델하우스에 온 듯, 세련된 분위기를 풍기는 집 안 내부.
깔끔한 인테리어와 창밖으로 펼쳐지는 서울의 야경이 조화로웠다.
또 지금 당장 몸만 들어와 살아도 될 정도로 모든 걸 다 갖추고 있었다.
포근하고 안락한 침실, 당장이라도 요리를 하고 싶어질 만큼 다양한 도구를 갖춘 주방.
또 두 사람이 오붓하게 마주앉아 와인 한 잔 기울일 수 있는 바와 바깥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거실까지.
누구라도 이 집에 오면 가슴 설렐 것 같았다.
아무 말 없이 집을 둘러보던 이서가 최 원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는 그런 이서의 어깨를 안고서 거실 소파에 앉았다.
“난 가족이랑 오붓하게 지냈던 기억이 없어.”
이서는 그의 사연을 기억했다.
친아버지와 함께 살 수 없었던 그의 사연을 말이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서는 마치 제 일인 양 마음 아파했으니까.
“엄마는 내 옆에 있었지만 늘 힘들어했어.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을 뺏긴 거니까. 날 갖기 전 사진 속 엄마는 싱그러운 모습인데 난 사실 그런 엄마를 본 적이 거의 없어.”
우울함에 짓눌린 엄마는 화병에 꽂힌 한 송이의 꽃 같았다.
아무리 깨끗한 물로 바꿔 줘도 엄마는 예전의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그러다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어. 그것도 혼자 병원에서. 난 그때 미국에 있었고.”
마음 아픈 그의 이야기에 이서는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최 원은 그런 이서의 손을 꽉 잡은 채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외삼촌이 엄마를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거든.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가족한테 버림받았다는 충격 때문에 오래 못 버티신 것 같아.”
이서는 그의 이야기가 남일 같지가 않았다.
그녀의 엄마도 지금 홀로 병원에서 죽음과 싸우고 있지 않나.
최 원의 어머니처럼 이서의 엄마도 긴 투병생활에 의한 우울증으로 병세가 더 심각해졌으니까.
만약 이 상태로 엄마가 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면, 이서 역시 제정신으로 살기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그가 겪었을 끔찍한 시간을 이서는 막연하게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서는 괜히 그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나마 그에게 조금의 위로를 건네고 싶었다.
“난 미국에서 처음 아버지를 만났어.”
방금 전 어머니 이야기를 할 때와 달리 아버지 이야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건조하기만 했다.
“외할아버지한테 크게 데인 일 때문인지 아버지는 나한테도 애착이 없더라고. 오히려 날 보자마자 불편해 하더라. 내가 자기 친아들인 걸 알면서도.”
이서는 그제야 어린 최 원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열 일곱의 최 원이 미국 정부 기관 서버를 죄다 해킹했던 건 일종의 반항이었던 것이다.
아직 어른의 사랑이 필요한 아이였을 텐데, 버려진 기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군에선 내 재능을 알아보고 따로 훈련을 시켰어. 정부 기관을 혼자 해킹할 정도면 쓸 만한 해커로 키울 수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어린 최 원은 혼자서도 생존하기 위해 악착같이 버텼고,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힌 뒤엔 복수를 준비했다.
저와 제 엄마를 버린 사람들에게 똑같은 고통을 선사해주고 싶었다.
그날만을 위해 가슴에 독기를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가족 같은 것엔 어떤 미련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어제 너랑 같이 있다 보니……. 나도 가지고 싶어졌어.”
최 원은 저만 바라보는 이서의 눈이 참 좋았다.
커다란 눈동자 안에 오로지 저만 담길 때, 꼭 그녀의 세상에 저만 존재하는 것 같았으니까.
“나도 내 편을 가지고 싶어.”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끝까지 제 옆에 있어 줄 사람을.
“그게 너였으면 좋겠어, 정이서.”
이서는 심장이 그대로 멈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도 바로 대답을 줄 순 없었다.
고작 어제였다, 그와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것은.
그런데 그가 이렇게 빨리 집을 구했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그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어제와 다름이 없었지만, 그게 오늘이 될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서가 망설이며 입술만 달싹거리자 최 원은 그제야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또 제가 뭐에 홀린 듯 한 발 앞서 나갔다는 걸.
왜 자꾸 이서의 앞에서는 조급해지는지.
“아직 준비가 안 된 거면 조금 더 생각해 봐도 돼.”
어쩐지 풀이 죽은 듯한 그의 목소리에 이서는 제 상황을 설명했다.
“우선 저한테 조금만 시간을 줘요. 말했다시피 아직 엄마도 의식을 못 차렸고 또 집에 설명을 해야 하니까…….”
그의 곁에 있고 싶지 않다는 말이 아닌데.
이서는 그가 혹여 오해라도 할까 봐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실망했죠? 어제는 바로 대답했으면서. 막상 집까지 구해 오니까 말을 바꿔서.”
“아니, 이해해.”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그는 옅은 미소를 보이며 이서와 눈을 맞췄다.
주체하지 못하는 내 마음이 문제지, 네가 무슨 잘못이 있겠니.
평생 복수를 위해 살아왔는데, 정이서만 보면 마음이 물러진다.
나중에 모든 걸 알게 됐을 때 그녀가 제 옆에 있지 않을까 봐.
제 허락도 없이 그녀가 사라지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러니 그전에 정이서가 최 원 없인 살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아무리 그가 원망스러워도 제 옆에서 그녀가 떠나가지 못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마음이 더 조급한 걸지도 몰랐다.
최 원은 그녀의 몸을 끌어와 세게 안았다.
그의 탄탄한 몸이 닿자 이서의 숨결도 점점 더 온도를 올렸다.
그녀의 몸을 그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훑고 지나갔다.
그녀와 진한 키스를 나눈 최 원은 살짝 입술을 떼고서 물었다.
“그럼 오늘은?”
눈을 감고 있던 이서가 나른하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오늘밤엔, 나랑 있어 줄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