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38화
보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한 법.
재영은 어떻게든 이서의 마음을 돌리는 데 집중하기로 했다.
당장 오늘부터 이서의 마음에 쏙 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완전히 달라진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하지만 세상일은 재영이 생각하는 것만큼 녹록치 못했다.
출근하자마자 왕 본부장이 봉투 수십 개를 가지고 재영을 찾아왔다.
재영은 테이블 위에 쏟아지는 봉투를 멀뚱히 보다 물었다.
“이게 뭡니까?”
왕 본부장은 별 일 아니라는 듯, 평소와 같은 태도로 대답했다.
“대표님이 부리던 똥개들 사표입니다.”
“……네? 뭐라고요?!”
“기술팀 인원 절반 이상이 오늘 단체로 사표를 제출했다는 말씀 드리는 겁니다.”
재영은 왕 본부장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멍한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기술팀 직원들이 단체로 사표를.”
재영이 눈을 깜빡이며 왕 본부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이며 더 충격적인 사실을 일렀다.
“지금 재한에 남은 기술팀 인원으론 절대 업무 소화 못 합니다.”
여전히 이재영이 말귀를 알아먹지 못하자 그녀가 테이블을 탁탁 치며 정확히 말했다.
“대표님, 제 말 듣고 계시죠? 재한 시큐리티가 멈췄다고요.”
* * *
“저희 계획이 아주 잘 먹힌 것 같은데요? 벌써 보내온 이력서만 해도…….”
아침부터 미주는 꽤나 신이 나 보였다.
어제 제 공작이 이렇게 빨리 결과를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어젯밤, 최 원이 이서의 집에서 그녀와 달달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미주는 재한 기술팀끼리 모인 회식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우연을 가장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어머, 재한 시큐리티 분들이죠? 오늘 포럼에서 뵌 익숙한 얼굴들이 계셔서. 어쩜, 여기서 다 만나지. 저는 LIMS의 유일한 직원이자 LEO 팀장과 함께 미군 사이버 보안팀에서 일했던 개발자, 유미주라고 해요.”
우연 치곤, 너무 대사가 준비된 티가 났지만. 뭐, 상관없었다.
기술팀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데 성공했으니까.
그들은 LEO라는 대단한 해커와 일하는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다.
그녀는 아주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고.
지적인 분위기에 예쁜 얼굴을 한 미주가 싱긋 웃을 때마다 모두가 헤벌쭉 웃었다.
“저희가 한국에 온 이유요? 저희 팀장이, 그러니까 LIMS 최 원 대표님께선 예전부터 한국 시큐리티 시장에 관심이 많았어요. 플랜 시큐리티부터 시작해…….”
“COSMOS 개발은 저와 최 대표님의 야심작이죠. 미군에 있을 때부터 준비한 건데, 그걸로 두바이 뱅크도 저희에게 마음을 돌린 거랍니다. 아하하!”
“LIMS에 저희 둘 밖에 없냐고요? 그러게요. 여기서 사람 구하는 게 쉽지 않네요. 재한 기술팀 분들처럼 유능하고 멋진 분들을 구하고 있긴 한데. 그냥 오다가다 연락이라도 주세요. 부담 갖지 마시고. 재한 분들이라면 그냥 문 열어드리죠. 아하하핫!”
미주는 준비했던 명함을 착착 돌렸다.
다행히 그곳엔 이재영도 없었고 왕 본부장도 없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안 그래도 회사에 진절머리를 치고 있던 기술팀 사람들은 미주의 말에 꽤나 관심을 보였다.
물론, 재한에서 받는 것보다야 많이는 못 받겠지만. 그들은 LIMS의 성장 가능성을 보았다.
천재 해커 LEO가 이끄는 회사라니.
띨띨한 이재영의 재한이 가라앉는 배였다면, 최 원의 LIMS는 이제 막 조선을 끝낸 고급 크루즈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니 미래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술자리에 있던 직원들은 미주의 명함을 가슴에 품으며 저마다 꿈을 꿨다.
“정말 재한이 별로긴 한가 봐요, 이렇게 죄다 탈출할 정도면. 뭐, 우리야 타이밍 완전 나이스지만. 그럼 저는 이 넓은 사무실을 채울 쇼핑을 좀 해보겠습니다.”
우선 자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 앞으로 최 원의 LIMS는 더 커질 테니까.
앞으로 대성해 나갈 LIMS를 생각하니 미주의 가슴이 뛰었다.
역시, LEO를 믿고 한국으로 온 보람이 있다고.
제 우상이자 정신적 지주인 그가 또 해낼 줄 알았다고 미주는 생각했다.
한편, 최 원은 미주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새로운 집’ 뿐이었으니까.
위치부터 크기, 구조, 인테리어, 그리고 안전까지 신경 쓰다 보니 따질 게 꽤나 많았다.
“아, 이걸 살 바엔 돈을 조금 더 보태서 이 의자를 사야지. 아니지, 이것도 별론가? 재한에선 무슨 의자를 썼지?”
미주는 의자 쇼핑에 한창이었다.
최 원도 마찬가지였다.
돈은 상관없으나 그녀에게 딱 좋은 집을 찾느라 머리가 아팠다.
이게 좋으면 저게 별로고, 다 좋다 싶다가도 치명적인 단점이 하나씩 있었다.
두 사람은 결정을 하지 못하고 짜증스런 한숨을 쉬었다.
“아유, 됐어요. 중요한 건 의자가 아니죠. 중요한 건 기업 환경 아니겠어요? 열심히 일하고 싶고, 성장하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거.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게 중요한 거지. 재한과 달리.”
최 원은 미주의 말을 그제야 귀 기울여 들었다.
“그렇지, 사람 마음을 잡는데 중요한 건 보이는 게 아니지. 오히려 안 보이는 게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거지.”
……재한과 달리.
문득 어제 이서의 말이 떠올랐다.
재한 제약에서 신약을 만들어 준다고 했다고.
그것 때문에 정이서가 재한에 붙잡혀 있는 거고.
또, 이주협이 정이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도 신약 때문이겠지.
그런데 그걸 진짜 만들려고 했을까, 재한에서?
속이 시꺼먼 이주협이 순순히 그걸 만들어주겠다 했다고?
그건 그저 정재곤과 이서를 잡아두는 목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 원은 손가락 끝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쇼핑 중인 미주를 불렀다.
“미주야, 의자가 중요한 게 아니야.”
“맞아요. 의자가 중요한 게 아니죠.”
미주는 영문도 모른 채 어깨를 으쓱였다.
최 원은 그런 미주를 보다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나 또 나쁜 짓하고 싶은데.”
그에 미주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쁜 짓? 아니, 이제 블랙 해커의 오명을 벗고 개발자들의 영웅으로 거듭난 분이 왜 또 그런 생각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주는 오히려 신이 나 보였다.
미주는 바로 쇼핑 창을 끄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이제 우리끼리 있는 날도 오늘까지예요. 내일부터는 우리도 자긍심 있는 보안인으로서,”
“알겠어. 오늘만.”
미주가 입꼬리를 씰룩였다. 재미있는 게임을 앞둔 사람처럼.
“그래서 어딜 털면 되는데요?”
“재한 제약. 재한 제약 몰래 들어갔다 나오자.”
* * *
기술팀의 대거 이탈로 재한은 다른 비상사태를 맞이했다.
이재영은 굳은 얼굴을 하고서 상석에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엔 왕 본부장과 팀장급들이 앉아 있었다.
이재영은 속이 말이 아니었다.
오늘부터 어떻게든 정이서를 잡아보려 열심히 하려 했는데.
그런데 시작부터 직원들의 대거 이탈이라니.
이것들이 뒤통수를 때려도 유분수지.
“아니, 말이 됩니까? 이게. 회사가 위기인 시기에 집단 퇴사라니.”
영업 방해로 고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왕 본부장은 그런 재영을 보며 조소했다.
회사 직원들을 똥개 취급할 땐 언제고 이제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꼴이라니.
물론 책임자로서 왕 본부장 또한 난감했지만, 한편으로는 직원들이 대거 이탈한 게 속 시원하기도 했다.
“본부장님은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뭘 하셨습니까? 네?! 직원들 멘탈 관리도 본부장님 몫 아닙니까?”
“멘탈 케어요? 대표님이 기술팀에 오셔서 훼방만 안 놓으셨어도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왕 본부장이 삐딱하게 대꾸했다.
“뭐라고요? 지금 내 탓이라는 거예요?”
“아주 책임이 없진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전적으로 이재영 책임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왕 본부장은 최대한 정제된 언어를 썼다.
“과도한 업무와 경직된 기업 분위기. 성과를 내도 그에 합당한 보상도 보람도 없는 기업에서, 누가 더 머물고 싶겠습니까?”
이재영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럼? 우리만큼 보상해 줄 수 있는 회사는 있고?! 다들 어디로 갔는데요? 예?!”
그 말에 다들 난감한 얼굴을 했다.
왕 본부장도 어제 일을 전해 들었다. 제가 먼저 자리를 뜬 사이 LIMS의 직원 하나가 나타나 명함을 돌린 이야기를.
다들 서로 눈치만 볼 뿐, 대답은 하지 못했다.
“왜 말을 못 해요? 어딘가 갈 곳이 있으니까 단체로 사직서를 제출했을 거 아닙니까? 예?! 어디 외국계 회사? 아니면…….”
재영이 추궁하는 말에 결국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아, LIMS로…….”
“뭐요? 어디?”
“최 원 대표 회사. LIMS로 간 것 같습니다.”
“최 원? LIMS?!”
그 이름에 순간 재영은 뒷골이 당겼다.
또 그 새끼야? 또?!
사사건건 제 인생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는 그 새끼!
“LIMS? 그 코딱지만 한 회사가 뭐가 좋다고.”
“아무래도 이 업계에서 LEO는 전설과도 같은 존재니까요. LEO와 한 팀이 된다는 데 의의를 둔 직원들이 많을 겁니다.”
한 쪽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서는 새삼 그의 입지를 실감했다.
그와 함께 일할 수 있는 게 영광이라니, 이서로선 상상하기 힘든 이야기였다.
또,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모두에게 인정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했다.
그때, 재영이 이서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최 원이랑 자리 좀 만들어! 정 비서.”
“네?!”
최 원이랑 만난다고? 최 원이랑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이서가 그를 말리려는데, 재영이 말을 번복했다.
“됐어, 네가 연락하지 마. 나한테 연락처 넘겨. 내가 직접 연락할 거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최 원에게 이재영이 직접 연락을 한다고?
하지만 이서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재영이 다그치듯 말했다.
“앞으로 최 원이랑 소통은 내가 직접 할 거야.”
이서는 재영이 정말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별 수 있을까.
이재영이 괜히 최 원을 난감하게 만들면 안 될 텐데.
이런 생각을 하던 이서는 문득 이제 제가 재한이 아닌 최 원을 먼저 걱정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