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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37/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37화

언제나 그랬듯, 넌 계속 내 옆에 있어.

최 원은 비릿하게 웃었다. 오래간만에 그를 보니 쾌감까지 일었다.

꽤 시간이 지난 일인데, 저를 한 번에 알아보다니.

하기야, 제가 한 짓이 있으니 찔리긴 하겠지.

하늘도 분개할 짓을 해놓고 자신을 잊었다면, 그건 사람도 아닐 테니까.

최 원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정재곤에게 꼭 복수를 할 생각이었다.

그건 아무리 정이서라도 막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만약 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빈다고 한들, 그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정이서를 단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복수만이 눈물과 분노로 얼룩졌던 제 삶을 보상해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불쌍하게 가버린 엄마를 위해서라도. 최 원은 멈출 수 없었다.

차에 탄 최 원은 차창 밖으로 이서의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제 품에서 깊게 잠들어 있던 그녀가 떠올랐다.

아직도 그녀가 제 품에 안겨 있는 듯 그녀의 온기가 생생했다.

‘나중에도 당신과 함께하는 게 내 행복이라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또, 그녀가 제게 보여줬던 확신도.

그녀가 했던 말들은 오래 물고 있어도 단물이 배어나왔다.

그 달콤한 맛을 음미하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자꾸 그녀의 말을 되새김질하게 됐다.

정이서는 최 원에게 이제 그런 존재였다.

같이 있으면 그 달콤함에 빠져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그녀와 떨어져 있으면 자꾸만 그녀가 떠올랐다.

이젠 24시간, 365일.

온종일 그녀를 안고 있어도 물리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자 최 원은 빨리 움직이고 싶어졌다.

어차피 정재곤에게서 정이서를 뺏어 오는 게 소기의 목적 아니었나?

그녀 역시도 저와 함께 하길 원하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는 날이 밝으면 정이서와 함께 살 아주 멋진 집을 먼저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그녀를 빨리 데리고 올 수 있는 집으로.

* * *

“도련님. 전 이제 도련님 옆에 있을 수가 없어요.”

이서가 제 옆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재영은 텅 빈 제 옆을 보고 당황했다.

“안 돼. 내 옆으로 와. 어?”

재영이 그녀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서는 뒷걸음질 쳤다.

“전 이제 갈 거예요.”

“어딜 간다는 거야, 날 두고.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

재영은 사정했지만, 이서는 어림도 없다는 듯 뒤를 돌았다.

재영은 그녀를 잡기 위해 뛰듯이 걸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서는 잡히기는커녕 제가 다가갈수록 더 멀어졌다.

“이서야,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이서는 들은 체도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앞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최 원, 그 새끼였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재영은 더 불안함을 느꼈다.

“안 돼, 안 된다고.”

이서는 보란 듯이 최 원의 손을 잡았다.

최 원은 이제 꿈도 꾸지 말라는 듯 이서를 품에 안았다.

재영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최 원 옆에서 더 행복해 하는 정이서.

제 옆에선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예쁜 미소가 그의 곁에선 당연한 듯 흘러나왔다.

“이서야!”

재영이 목 놓아 그 이름을 불렀지만 소용없었다.

정이서는 이미 떠났다.

“이서야, 안 돼. 가지마! 내가 잘못했어!”

재영은 식은땀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고약한 악몽에서 벗어난 그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하, 하. 꿈이다. 꿈이야. 꿈도 하필 이런 꿈만.”

재영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이런 거지같은 꿈을 꿔서 기분이 뭣 같다고 해야 할지, 아님 정이서가 떠난 게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하지만 재영은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곤 괴로워했다.

그때, 인기척을 느낀 가사도우미가 재영의 방에 조용히 들어왔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재영은 괜찮다며 손을 저었다.

“그런데…… 도련님. 지금 내려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

가정부는 뭔가 난감한 일이 일어난 것처럼 발을 동동거렸다.

안 그래도 거지같은 악몽 때문에 기분을 잡친 재영은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요?”

“아니, 그게……. 사모님한테 정 비서가 혼쭐이 나고 있어서.”

“……엄마가요? 이서를? 왜요?”

재영이 그 말을 듣고 바로 일어났다.

“도련님 의전에 문제가 있다고…….”

“아, 씨. 진짜.”

재영은 잠옷 차림으로 헐레벌떡 방 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밑에서 손 여사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다.

“응?! 네가 제대로 하는 게 뭐야? 이 대표 얼굴 상한 것 봐. 밥도 제대로 안 챙겨주고. 우리 재영이가 너한테 잘해 주니까 이게 뵈는 게 없지.”

급히 계단을 내려간 재영이 이서의 앞을 막아섰다.

“엄마!”

재영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 목소리 어찌나 신경질적인지 손 여사의 입이 그대로 닫혔다.

“엄마, 진짜 왜 그래! 왜 내 사람을 잡는 건데!”

손 여사는 아들이 큰소리를 쳤다는 걸 믿을 수 없어 두 눈을 깜빡였다.

“얘가 내 비서지, 내 안색 관리하는 사람이야? 내 밥 챙기는 사람이냐고! 왜 내 사람한테 자꾸 이러는 건데! 엄마가 왜!”

“재영아. 그래도 비서니까.”

“내 비서야, 내 사람이라고. 앞으로 내 허락 없이 정이서한테 한 마디도 하지 마.”

재영은 뒤에 서 있던 이서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곤 곧장 그녀를 데리고선 위층으로 올라갔다.

재영이 어찌나 크게 소리를 질렀는지 대저택 안엔 그 여운이 전히 남아 있었다.

손 여사가 완전히 얼빠질 정도로 말이다.

“아니, 왜 나한테…….”

재영이 큰소리치는 걸 들은 모양인지 이 회장도 밖으로 나왔다.

그는 그 자리에 멀뚱히 서 있는 손 여사와 사라진 재영을 번갈아보았다.

“저 새끼 왜 저래?”

이 회장의 말에 손 여사가 울상지었다.

“여보, 우리 재영이 괜찮은 거 맞아요? 이제껏 나한테 큰소리 한 번 친 적 없는 앤데. 왜 갑자기 정이서 편을…….”

손 여사는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이주협 회장과 손 여사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차마 입으로 낼 순 없지만, 두 사람 모두 같은 생각 중이라는 듯.

설마…… 삼십 년 넘게 옆에 두고 키워온 아들이었다.

그 마음을 부모인 그들이 모를까?

이 회장이 이를 악물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저 미친 새끼.”

“대표님, 이러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제가 손 여사님한테 죄송하다고,”

“됐어. 가만있어. 내가 술 처먹고 다니느라 안색이 이런 게 네 잘못이야?!”

간만에 맞는 말을 하긴 했는데, 이서는 바른 말을 하는 이재영이 오히려 무서웠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큰일 난다던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 건지.

“꼼짝 말고 내 방에서 기다려. 나 씻고 금방 준비해서 올 거니까.”

재영은 그 말만 남긴 채 욕실로 들어갔다.

이서는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서 조용히 의자에 앉았다.

이제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출근 준비까지? 예전엔 늦장 부리는 데에만 두 시간은 기본으로 썼는데.

“……내일은 해가 서쪽에서 뜨려나?”

갑자기 달라진 재영이 걱정될 정도였다.

“오늘부터 나 열심히 일할 거야.”

차에서 아침 브리핑을 하던 이서는 재영의 말에 긴장했다.

“재한 시큐리티 대표로서 열심히 일할 거라고. 기술팀이랑도 안 싸우고 일도 더 열심히 배울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묻고 싶었으나, 이서는 굳이 묻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잘 생각하셨어요.”

어차피 얼마나 갈지 모르는 각오였다.

또 며칠 이러다 말겠지…… 생각하며 재영을 무시했다.

“그러니 너도 계속 내 옆에 있어.”

그 말에 문득 어제 재영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다른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제 옆에만 있으라고.

이재영은 은연중에 제게 그렇게 강요하고 있었다.

어젯밤엔 술에 취해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빙빙 둘러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서는 대꾸 없이 말을 돌렸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는데 입에 발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재영은 속이 상했다.

그렇게 싫은가? 내 옆이.

정말 제 옆에선 한 번도 정이서였던 적이 없었던 거야?

그럼 최 원 그 새끼 옆에선? 그 새끼 옆에선 정이서로서 그렇게 웃는 거고?

재영은 여전히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 일을 수면 위로 올려 이서를 자극하는 대신, 제가 달라지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더 오래, 정이서를 제 옆에 잡아둘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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