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35화
널 빼앗아 올까?
현관문을 열자 이서의 향기가 훅 끼쳤다.
따뜻하고 달콤한 정이서의 향기가.
그저 집 문만 열었을 뿐인데, 마치 정이서를 품에 안은 것 같았다.
불이 켜지자 깔끔한 가정집의 풍경이 펼쳐졌다.
베이지색 톤의 가구와 따뜻한 불빛까지 더해져 보는 것만으로도 아늑함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비록 좁은 집이긴 하지만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온 최 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집이란 건 이런 걸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고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마음 놓고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 최 원으로서는 낯선 감정이었다.
외할아버지와 엄마랑 살던 대저택엔 싸늘한 기운만 감돌았고.
미국에 있을 땐, 창고 안에서 컴퓨터만 하며 살아서 사람이랑 교류할 일도 없었다.
또, 군대에서도 계속 단체 생활을 해 왔기에 더더욱 집이 주는 안정감과는 먼 생활을 했고.
평범한 가정집에 처음 들어와 본 최 원은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최 원은 혹여 저 때문에 이 평화가 깨질까 조심스레 발을 옮겼다.
이서는 갑자기 조심스러워진 그를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제 집 거실 소파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게 어색했지만, 이서는 그 사람이 최 원이라 너무 좋았다.
퇴근 후, 그와 이렇게 나란히 앉아 하루의 마지막을 장식한다는 생각에 괜히 들뜨기도 했고.
“마실 거라도 줄까요?”
“아니, 괜찮아. 그냥 옆에 있어.”
이서는 그 옆에 앉아 그의 어깨 위에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차갑지만 커다란 그의 손이 이서의 손을 덮었다.
TV도 켜지 않아 집 안엔 적막함만 흘렀지만, 이서는 집안에 감도는 침묵이 처음으로 좋았다.
늘 이서를 쓸쓸하게 만들던 적막함도, 그와 함께 있으니 심신을 안정시키는 고요처럼 느껴졌다.
또, 간혹 가다 제 손을 잡고 피식 웃는 그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콩닥거리는 제 심장 소리에 집중할 수 있어서 너무도 좋았다.
이서는 그와 이렇게 체온을 나눌 수 있는 이 밤의 모든 게 좋았다.
“……앞으로 못 보는 건가 했어요.”
문득 이서가 그간 제 마음을 꺼냈다.
그 말에 최 원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이제 혼자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또 다시 그가 사과를 건네자 이서의 마음이 많이 누그러워졌다.
“그리고 그때도 말했잖아. 이런 널 두고 내 발이 어떻게 떨어지겠냐고.”
최 원은 그녀의 말랑한 볼 위에 키스했다.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네가 있는데, 제가 감히 어딜 갈 수 있겠냐는 뜻으로 느껴졌다.
또 꿀이 떨어질 듯 저를 진득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도.
그녀를 향한 그의 애정은 어떤 불순한 이물질도 없는, 순도 100%의 사랑처럼 느껴졌다.
이서는 이제 그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냥, 난 나 때문에 당신이 곤란해지는 게 싫었어요.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나한테 다시 돌아와 줘서 고마워요.”
최 원은 이서가 제 손을 깍지를 껴 잡는 걸 보았다.
그녀는 알고 있을까?
그간 최 원을 흔들어 놓았던 건 그깟 블랙 해커 꼬리표가 아니라 정이서 본인이었다는 걸.
그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복수심을 녹일 정도로, 그녀를 그리워했던 제 마음을 통제하느라 힘들었다는 걸.
그녀가 지금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최 원은 정이서 때문에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었다.
그 소용돌이는 늘 이성적이었던 그를 한 번에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있는데, 마음이 두 손 두 발을 꽁꽁 묶는 것 같았으니까.
진짜 절 난감하게 만드는 건 무엇인지 모르면서.
또 이토록 사람을 뒤흔드는 위험한 너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너라는 사람을 ‘적’이 아닌 ‘내 편’으로 쓸 수 있을까.
최 원은 장식장 안에 있는 작은 가족사진을 발견했다.
지금보다 한참 어린 정이서. 그리고 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젊은 남자와 여자.
이서가 아주 어린 시절 찍은 가족사진처럼 보였다.
최 원은 이서의 아빠, 젊은 정재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족 옆에서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정재곤을.
오래 전, 제 앞에서 울부짖던 목소리가 귓전에 맴돌았다.
‘내가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그런데 우리 딸 살리려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평생 날 용서하지 마. 용서하지 마.’
그는 평생 용서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말대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의 상황을 출구 없는 구렁텅이 에 빠트리고, 나아가 그에게서 가장 소중한 것을 뺏고 싶었다.
그의 딸, 정이서를 말이다.
정이서가 제 아버지가 한 추악한 짓들을 알게 된다면, 그때도 그녀는 정재곤을 아버지로 생각할까?
정이서 성격에 평생 그를 원망할 가능성이 컸다.
그 딸을 이용해 그의 죄를 낱낱이 밝히고 그를 벌하고 싶었는데.
최 원은 지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의 딸을 제 옆에 두고 싶었다.
정재곤은 제 딸이 그의 ‘적’의 편에 서서 자신을 벌한다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그래, 생각만 해도 끔찍하겠지. 아마 제가 했던 짓을 평생 후회하며 피눈물을 흘릴 거다.
어떻게 봐도 그의 계획은 완벽하기만 했는데.
관건은, 정이서였다.
그녀가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면 아버지 정재곤을 틀림없이 원망하겠지만.
그럼 최 원은? 그녀는 복수에 자신을 이용한 최 원을 원망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아마 최 원 또한 정이서를 잃게 될 가능성이 컸다.
그때 가서 제 마음이 지금과 같지 않게 시들해진다면 상관없을 테지만.
만약, 그때에도 지금처럼 정이서를 원하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내가 좋아?”
최 원의 물음에 이서가 바로 대답했다.
“좋아요. 많이.”
그는 그녀의 마음을 가늠해 보고 싶었다.
과연, 그 홍역을 치르고도 정이서가 제 옆에 있을 가능성이 있을지 따져 보고 싶었다.
모든 복수가 끝난 후에도, 제가 미련한 감정에 휘둘릴 순 없었으니까.
“나랑 같이 살 수 있을 만큼?”
“……네?!”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있던 이서가 몸을 들어 최 원을 바라보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서는 가슴이 쾅쾅 뛰었다.
“응? 여기서 가족들이랑 말고, 나랑 다른 집에서 단둘이 살 수 있을 정도로. 날 좋아해?”
이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같이 살자는 이 말을 이렇게 불쑥, 그것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한단 말인가?
마치 그는 이서에게 좋아하는 음식이 뭐인지 묻는 것처럼 담백하기만 했다.
그 무드 없는 질문에도 이서의 마음은 모터를 단 것처럼 흔들렸다.
이서에게 이 집은 특별했다.
10년 간, 재한의 지하방에서 생활하다가 어렵게 구한 집이었으니까.
처음 이 집을 구했을 땐, 정말이지 뿌듯했다.
재한가 눈치 볼 필요 없이 가족끼리 오붓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했다.
아빠의 빚도 정리 된 상태였고, 무엇보다 이 집을 구했을 땐 금방이라도 엄마가 나아서 집에 돌아올 것만 같았다.
그렇게 희망이 가득 찬 집이었는데.
“네.”
이서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대답했다.
최 원의 예상과 달리 이서의 대답은 단호했다.
제 말을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 같았는데, 정이서는 무슨 마음인지 그에게 ‘네’라고 답했다.
오히려 그녀의 대답에 최 원이 놀란 듯 보이자 이서가 제 이야기를 했다.
그에겐 아직 하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이 집이…… 저한테 특별하죠. 15년 전에 아빠가 하시던 사업이 망했는데, 그때 엄마도 쓰러지셨어요. 아직도 치료제가 없는 불치병에 걸리셨거든요.”
최 원은 이서의 상황을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몰랐다.
늘 정재곤만 생각했지, 그의 아내가 아직까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는 건 몰랐으니까.
“아빠랑 지금 재한의 이주협 회장님은 고등학교 동창이셨어요. 집도 잃고, 빚쟁이한테 쫓기던 아빠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주협 회장님한테 갔죠.”
최 원도 의문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정이서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재한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을 텐데. 왜 정이서까지 이재영 옆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아빠는 이주협 회장님 밑에서 일하면서 빚을 어느 정도 해결했어요. 그것도 모자라 이주협 회장님은 엄마의 치료제 개발까지 재한 제약에서 해주겠다고 선뜻 말씀하시더라고요.”
엄마 때문이었다. 정이서가 이재영에게 옴짝달싹 못하게 붙들려 있던 이유가.
“그래서 저도 보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재한에서 일하고 있고요. 뭐, 이런 사정으로 가족들끼리도 자주 못 만나요. 아빠도 아직 이주협 회장님 옆에 있고, 또 저도.”
이서는 이 집에서 매일같이 쓸쓸함을 마주해야 했다.
고단함에 지쳐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밤에도, 이서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래서 오늘, 이 집에서 그와 온기를 나누는 이 밤이 이서에겐 너무도 따뜻했다.
그와 함께 하루를 마칠 수 있다면, 이제 더는 쓸쓸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근데 재한에서 날 경계하고 있잖아. 네가 나랑 같이 산다고 하면 이주협 회장이 그냥 넘어갈까?”
이재영의 적이 될 수 있는 놈들은 미리 아킬레스건부터 자르고 보는 인간이 이주협인데.
이재영 옆에 있는 정이서가 최 원을 만난다고 하면……. 굳이 보지 않아도 그가 펄펄 뛸 게 분명했다.
“어머님 약도 있고. 나랑 이렇게 만나는 건 몰라도, 같이 산다고 하면…….”
최 원은 그녀의 의중을 떠보듯 물었다.
설렘 가득했던 이서의 얼굴에 순식간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이서도 걱정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이주협을 생각하면, 아직도 겁이 났지만.
“벌써 15년이에요, 제가 재한 때문에 제 삶을 포기하고 산 게.”
이서는 마음에 큰 멍울을 안고 사는 사람처럼 자주 울컥 했다.
엄마를 살리는 것도 좋고, 재한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도 좋지만, 가끔 제 삶에 회의감이 드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지금껏 그녀가 제 삶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초콜릿을 재한에게 가져다바친 게 몇 개인가.
이번에도 제가 아닌 재한을 우선으로 생각한다면, 그녀는 영영 정이서로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지금은 이주협 회장보다도 그게 더 겁이 났다.
“이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최 원은 이서에게서 결연한 각오를 보았다.
“힘든 일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지금은 다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중엔?”
“나중에도 당신과 함께하는 게 내 행복이라면,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그래?”
최 원이 보기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와 함께 하기 위해 용기를 내본다는데, 그가 기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한 발 한 발 정이서를 제 옆으로 끌어오면, 종국에 정이서는 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최 원은 불쑥 이서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두 사람의 입술이 가까웠다.
최 원은 이서의 뜨거운 숨을 느끼며 말했다.
“나도 자신 있어, 널 행복하게 해 줄 자신.”
도톰한 서로의 입술이 간지럽게 닿았다.
최 원은 그녀와의 키스를 앞두고 다시 한번 제 마음을 확고히 했다.
“네가 감당했던 걸, 후회하지 않게 해 줄 자신이 있어. 정이서.”
네가 내 ‘적’이 아닌, 내 ‘편’이 되어 준다면, 나도 너에게 그에 상응하는 선물을 줘야지.
최 원은 그 맛보기를 보여주듯, 이서에게 아주 달콤한 키스를 선사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