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34화
네 옆에선 한 번도 나인 적 없는걸?
결국 이서는 재영과 같은 차에 탔다.
재영이 그렇게까지 사정하는데 거기서 더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제가 더 했다간 이재영이 그 자리에서 울 것 같았다.
이서는 느꼈다.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재영은 엄청 불안해하고 있다는 걸.
그는 가시를 바짝 세운 고슴도치처럼 한껏 예민해져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이유에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방법이 없었다.
우선 이재영은 제 상사였고, 내키지 않더라도 그를 따라야 했다.
재영의 옆에 앉은 이서는 차창 밖을 보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조용히 핸드폰을 켜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요. 사정이 생겨서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이서의 마음은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졌다.
이번에도 그와의 약속을 멋대로 깨버린 것 같았다.
아쉬움과 미안함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요즘 너 이상해.”
이서의 행동 하나하나를 지켜보고 있던 재영이 말했다.
방금 전과 달리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제가요?”
재영의 눈은 짙게 쌍꺼풀이 져 있었다. 그 눈이 꼭 이서를 꿰뚫어보는 것 같았다.
이서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보는 것처럼.
“꼭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거 같아.”
이서는 어쩐지 제 마음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재영이 저렇게 쳐다봐도 제 속을 들여다볼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찔렸다.
이서는 그런 속내를 감추고 겉으론 덤덤히 이야기했다.
“업무 중에 그랬다면 주의하겠습니다. 요즘 일이 많아서 그랬나 봐요.”
평소와 같은 대답과 표정.
방금 전 최 원과 부둥켜안고 있던 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재영은 정이서가 절 속인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을 거다.
재영은 그런 이서가 낯설기만 했다.
제 말이라면 죽는 시늉도 했고, 제겐 거짓말은커녕 입바른 소리만 해대던 정이서였는데.
까탈스럽고 예민한 이서가 귀찮기는 했지만, 그래서 재영은 더 이서를 믿었다.
세상이 전부 저를 속여도, 정이서는 끝까지 제게 진실만을 말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제가 믿던 정이서는 어디로 간 거지?
정이서의 탈을 쓴 낯선 여자가 제 옆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업무 외엔? 회사 밖에선 무슨 생각을 하는데?”
이서는 슬슬 이재영의 칭얼거림이 귀찮았다.
“제가 퇴근 후에도 대표님이랑 회사 생각을 하면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요?”
“예전에 넌 그랬어.”
“…….”
“회사 밖에서도 내 생각만 했다고. 내 걱정만 하고 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애가,”
“그럼 정이서는요?”
“뭐?”
“이재영의 그림자 말고 정이서도 살아야 하잖아요. 이제.”
이서가 다부지게 말했다.
그 결연한 태도에 당황해서 얼버무리던 재영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아니, 진짜……. 내가 너한테. 야, 누가 너보고 정이서로 살지 말래? 그냥 예전에 하던 것처럼 내 옆에서,”
“대표님 옆에선 전 정 비서예요.”
“…….”
“전 한 번도 이재영 옆에서 정이서로 산 적 없어요.”
내 옆에선 정이서로 산 적이 없다고?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에 재영의 입이 떡 벌어졌다.
재영이 충격에 빠지든 말든, 이왕 말이 나온 것 이서는 더 분명하게 말했다.
“정 비서로서의 역할에는 최선을 다할 테니 저한테서 정이서의 삶까지 빼앗진 말아주세요. 저도 그 정도는 부탁드려도 되잖아요.”
이토록 단호하다니.
재영은 아직도 충격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문득,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에서 정이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때가 되면 사라질 거라고.
좋은 남자가 생기고 그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면, 더 이상 이재영 옆에 있지 않겠다던 그 말.
그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고 생각해 흘려들었는데 지금 보니 오판이었다.
정이서는 언제든 제 옆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이대로 조금만 더 방심하다간 손도 쓰지 못하고 최 원에게 이서를 뺏길 거다.
되돌릴 수 있을까?
제 옆에 정이서를 꽁꽁 묶어놓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단호한 정이서의 얼굴을 보니 이미 때를 한참 놓친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서를 집 앞에 내려준 후, 재영의 차는 곧장 도로를 내달렸다.
가로수 밑에 서 있던 이서는 멀어지는 차를 보며 한숨지었다.
“내가…… 너무 막말을 했나?”
갑자기 말도 안 되는 떼를 쓰는 게 짜증나 평소와 달리 너무 솔직했던 것 같다.
원래 같았으면 중간에 이서가 꼬리를 내렸겠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15년 동안 이재영의 그림자로 살아온 것도 지긋지긋한데.
평생을 그렇게, 제 자신을 버리고서 이재영의 그늘 아래서 살라고?
이서가 가장 피하고 싶은 미래를 제시하는데, 가만히 들어주고 있기가 힘들었다.
이서는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리를 뒤로 넘겼다.
할 말을 해서 속이 시원하긴 한데, 또 솔직하게 제 마음을 말한 건 처음이라 불안했다.
머리가 무거워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데 정수리가 어딘가에 툭 부딪혔다.
아프진 않았지만 단단하면서도 말랑한 묘한 느낌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걱정이 많아도 앞을 보고 걸어야지.”
“어?”
최 원, 그가 뒷짐을 진 채 이서 앞에 떡하니 서 있었다.
짜증이 나 있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고서.
이서는 제 앞에 나타난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주위를 살폈다.
“여기 어떻게 알고…….”
분명 제가 사는 아파트 앞인데.
이 남자가 여길 어떻게 알고 나타난 걸까?
“이 대표 차 따라왔는데. 거기서부터 계속 지켜보고 있었거든.”
“아…….”
최 원은 이서의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대뜸 옷소매를 걷어보았다.
하얀 가로등불 아래 이서의 얇은 팔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방금 전에 이재영이 세게 잡던데. 괜찮아?”
다 보고 있었구나…….
보이고 싶지 않았던 모습까지 보인 것 같아 이서는 창피한 마음만 들었다.
“가서 도와주고 싶었는데. 내가 끼어들면 네가 더 곤란해질 것 같아서.”
“잘했어요. 별 일 아니었거든요.”
별 일 아니긴.
이재영이 언성을 높였던 것까지 다 들었을 텐데.
하지만 이서는 굳이 그에게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제가 재한가에서, 또 이재영에게서 어떤 취급을 받는 사람인지 그가 알게 된다면 비참할 것 같았다.
그저 그의 앞에선 온전히 정이서이고만 싶었다.
최 원은 이서의 팔이 멀쩡한 걸 보고 다시 소매를 내려주었다.
그리고선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그녀와 발 맞춰 함께 걸었다.
어두운 가로등 밑, 최 원은 눈을 반짝이며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대로 헤어지긴 아쉬워서. 우리 그동안 오래 못 봤잖아.”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는 듯, 이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잠깐 만나는 걸로 그동안의 그리움이 채워질 리 있을까?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를 생각하며 한 달 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데, 아마 밤새 안고 있어도 부족할 것 같았다.
이서는 제 손을 잡고 있던 그의 품에 꼭 안겼다.
그리곤 그의 코트 안으로 두 팔을 넣고 그의 허리를 꼭 안았다.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선 그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요람에 있는 것처럼 이서는 더없이 안정감을 느꼈다.
그가 제 품에 안긴 이서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여기서 이러면 동네 사람들이 정이서 연애중이라는 거 다 알지 않을까?”
그들이 부둥켜안고 있는 곳은 이서의 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늦은 밤이라 주위에 행인은 없었지만, 또 귀신 같이 누군가에 눈에 띌 진 모르는 일이었다.
그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 이서가 뒷걸음질 쳐 주위를 살폈다.
그리곤 살짝 민망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나도 모르게 그만.”
부끄러워하는 이서가 귀여운 듯 최 원이 다시금 그녀를 당겨 제 품에 안았다.
다시 그의 품으로 쏙 빨려 들어간 이서가 놀라 소리쳤다.
“뭐예요?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요.”
이서의 말에 최 원이 얄밉게 속닥거렸다.
“여긴 내 동네는 아니니까. 누가 보든 상관없지.”
이서는 그의 얄궂은 말에 화가 나기는커녕 그저 웃겼다.
그 말을 하는 그가 꼭 꾀 많은 여우처럼 보여서.
“가만 보면, 말을 참 잘하는 것 같아. 듣다 보면 어이가 없는데 내가 또 넘어가 있어요.”
두바이의 한 바에서 그를 만나 같이 자리를 했던 것도, ‘한 시간’만 시간을 내달라는 말 때문이었다.
결국 그 한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오게 된 것처럼, 최 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사로잡혀 지금까지 왔으니까.
“그래?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칭찬 맞지?”
“맞아요, 매사 신중한 내가 지금 최 원 씨를 내 집 앞에서 안고 있으니까.”
철벽을 치는 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이서였는데, 어느새 그에게 홀딱 넘어가 이러고 있지 않는가.
최 원은 뿌듯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선 그녀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럼 이건?”
그의 작은 속삭임에 이서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오늘 밤 같이 있기로 한 건, 언제 넘어가 줄 건데?”
그 간지러운 속삭임에 이서가 금세 얼굴을 붉혔다.
“아, 정말!”
괜히 투정 부리듯 말했지만, 입가에 번진 미소를 보면 이미 진작 넘어간 것 같았다.
최 원은 그녀를 따라 피식 웃음을 지었다.
강원도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날,다신 정이서를 만나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게 무색할 만큼.
최 원은 정이서의 웃음 한 번에도 따라 웃을 정도로, 그녀에게 흠뻑 젖어 있었다.
이런데 어떻게 그녀를 더 밀어낼 수 있을까.
물론, 그녀와 저 사이에 얽힌 문제들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금 당장은 그 모든 문제들도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 원, 그 답지 않게.
한편, 아무것도 모르는 이서는 그저 그와의 달콤한 시간에 빠져 있었다.
매사를 꼼꼼하게 생각하던 이서는 사라지고, 당장 최 원 그만 생각했으니까.
“오늘 밤 우리집에 아무도 없는데.”
이서는 제가 무슨 정신으로 이런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빠와 저만 살고 있는 집.
엄마 외에 누구도 들어온 적 없는 집에, 감히 그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다니.
그런 집에 그를 들이는 게 어떤 의미인 줄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러고 싶었다.
제가 가장 아끼고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에서 최 원 그와 함께 하고 싶었다.
최 원을 제 공간에 초대해 보여주고 싶었다.
“어때요? 우리 집에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