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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33화

나랑 같이 가, 제발.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최 원의 눈에 이재영이 띄었다.

몸을 돌려 부리나케 도망가는 모습도 분명히 보았다.

최 원은 그 꼴을 보고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한편 이서는 입술이 붉게 번져 있었다.

“갑자기 여기서…….”

그가 갑자기 입을 맞춘 데 놀란 듯 보였지만, 또 밝은 웃음을 감추진 못했다.

어여쁜 얼굴과 붉은 입술. 작은 얼굴 안에 아기자기하게 피어난 예쁜 열꽃.

그녀의 얼굴 곳곳에 피어난 제 흔적들이 뚜렷했다.

이제 이재영은 정이서 얼굴만 봐도 알 텐데. 이재영 혼자 발악할 걸 생각하니 퍽 만족스러웠다.

그는 이서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다 물었다.

“오늘 밤 같이 있을래?”

그는 이제 거침이 없었다.

제 마음을 인정하고, 그녀를 제 것으로 만들겠다고 결정한 이상 더는 머뭇거리고 싶지 않았다.

우선 제 마음속에 피어난 욕망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는 게 먼저였으니까.

한편 최 원의 말을 들은 이서의 얼굴은 터질 듯 빨개졌다.

그 제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평소 같았으면 무슨 소리냐고 단칼에 거절했겠지만, 한 달 간 보고 싶던 그를 밀어내긴 쉽지 않았다.

이서는 바로 대답 않고 회식이 한창인 식당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 전, 재영이 서 있던 그 자리이기도 했다. 물론, 이서는 그가 거기 있었다는 걸 알 리 없었지만.

“저 잠깐 자리만 정리하고 다시 올게요. 기다려 줄 수 있어요?”

최 원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고 대답했다.

이서는 그의 허리 위에 올려둔 손을 조용히 내렸다.

그리고 그의 품에서 나오려 몸을 움직였는데.

“……풀어줘야 가죠?”

어찌된 일인지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힘을 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를 제 품 안으로 꽉 안았다.

그러면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얼굴은 태연하기만 했다.

“왜 안 가고? 그냥 이대로 갈까?”

장난스런 그의 행동에 이서는 피식 웃었다.

“금방 올게요, 대표님은 배웅하고 와야 해요.”

그럼에도 최 원은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그녀의 얇은 허리를 꼭 안고서 그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올 거지?”

그 엉뚱한 물음에 그녀는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금방 올게요. 조금만 기다려줘요.”

최 원은 그제야 경직되어 있던 팔에 스르르 힘을 풀었다.

그가 힘을 풀자 그제야 이서는 그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따뜻했던 그의 품에서 벗어나서일까?

조금 전까진 몰랐던 찬바람이 그제야 느껴졌다.

그 찬기가 싫어 다시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지만,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선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서가 까치발을 하고서 그의 뺨에 입 맞췄다.

“조금만 기다려줘요.”

그 말을 남긴 채 이서가 식당으로 향했다.

그 자리에 곧게 서 있던 최 원은 총총히 뛰어가는 이서를 보다 슬쩍 웃음 지었다.

늘 차갑기만 하던 냉소가 아닌재미있는 일을 기대하는 듯 흥미로운 미소였다.

아무래도 방금 전, 이서의 얼굴에 피어 있던 꽃이 최 원에게도 옮겨 간 것 같았다.

“어? 정 비서.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이서가 나타나자마자 왕 본부장이 알은체했다.

왕 본부장은 턱짓으로 재영을 가리켰다.

제가 없는 동안 술을 더 마신 건지 재영은 고개를 숙인 채 고주망태로 취해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이 드셨어요? 대표님?”

이서가 그의 옆에 돌아와 앉자 재영이 급히 고개를 들었다.

“정이서?”

그가 초점이 나간 눈을 하고서 이서를 불렀다.

“네, 대표님?”

분명 정이선데…….

목소리도, 생긴 것도, 모두 제가 알던 정이서가 확실한데.

하지만 그는 늘 냉담했던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최 원의 손길이 그녀에게 닿았던 흔적이었다.

그는 버럭 화부터 내고 싶었지만, 무슨 일인지 입도 열리지 않았다.

“얼굴이 안 좋으신데. 술은 그만 드세요.”

그 대신, 퉁명스러운 말투로 다른 걸 물었다.

“너, 어디 갔다 와?”

“저 화장실에…….”

“30분 동안? 그리고 방금 화장실 다녀왔는데 텅 비어 있던데.”

이서는 갑자기 꼬치꼬치 캐묻는 재영이 이상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술에 취한 것도 모자라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구니 이서의 마음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잠깐 주위 좀 둘러봤어요.”

이서의 거짓말에 재영이 속상한 듯 또 술을 들이켰다.

이재영과 이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걸 모두 알았는지, 다들 힐끗 시선을 던졌다.

정 비서가 자리를 비운 게 그렇게 화가 날 일인가? 다들 이재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표님, 불편한 거라도 있으세요?”

이서의 물음에 재영은 한숨만 지을 뿐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서도 이제 지쳤다.

이재영이 이러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마음을 바꾸는 이재영한테 질릴 대로 질린 이서도 더는 묻지 않았다.

자세를 바로 하고 앉은 이서는 그저 회식 자리가 얼른 끝나길 바랄 뿐이었다.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 남자, 최 원을 생각하면 마음이 급했으니까.

“조심히 들어가세요.”

회식을 마친 직원들이 식당 앞에서 인사를 나눴다.

취해서 비틀거리는 재영 대신 이서가 인사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이서가 재영을 잡으려고 하자 재영이 그녀의 손길을 피했다.

그리곤 비틀거리며 주차장 쪽으로 혼자 걸어갔다.

“……다른 대표님들은 2차 가라고 카드라도 주던데. 혼자 술만 퍼먹곤 삐져가지고.”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말에 제가 다 민망했다.

하지만 이서 역시도 재영의 속을 가늠할 수가 없었기에 한숨만 쉴 뿐이었다.

“간다고? 어디?”

차에 올라타던 재영이 몸을 돌리더니 이서의 손목을 휘어잡았다.

깜짝 놀란 이서가 재영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표님, 이것 좀 놓고.”

“어디 가냐고.”

재영이 화가 난 얼굴로 이서에게 따지듯 물었다.

“……어디 가겠어요. 여기서 집으로 가는 건데.”

“안 돼.”

“네?”

“안 된다고. 나랑 같이 가.”

“대표님이랑 저희 집에요?”

“지금 내가 말장난하는 것처럼 보여?”

“…….”

“나랑 같이 본가로 가.”

무슨 일인지 계속 억지를 부리고 화를 내는 재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본가로 들어가자고? 제 집이 뻔히 있는데 재한가에 갈 이유는 없었다.

이서는 불쑥 화가 났다.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왜 저한테 화가 나셨어요?”

“왜 화가 났냐고?! 야, 정이서!”

재영은 속에서 펄펄 끓는 화를 배출하듯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말씀하세요. 제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너, 너! 네가 어떻게…….”

그런데 무슨 일인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가 최 원이랑 키스를 한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네가 어떻게 나를 배신하고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냐고 묻고 싶었는데!

꿀이라도 먹은 양 입이 딱 붙어버렸다.

얼굴만 벌게질 뿐, 아무 말도 않는 재영을 보고 이서가 한숨을 쉬었다.

또 술에 취해 저만 잡는 거다.

포럼에서 LIMS에게 완전히 묻힌 화풀이를 또 제게 하는 거다.

굳이 듣지 않아도 뻔했다.

15년 간, 그에게 질리도록 당해 왔던 이서가 이재영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술에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은 저도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내일 제가 본가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때 말씀해 주세요.”

이서의 사무적인 말에 재영은 답답하기만 했다.

대체 왜 제가 정이서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말하면 되는데, 네가 날 배신했다고. 최 원을 만나면서 어떻게 재한의 비서를 할 수 있냐고.

그 말을 하며 정이서를 몰아세우면 되는 일인데…….

어쩌면 재영은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있는 지도 몰랐다.

그 일로 정이서를 추궁하고 몰아세우면, 그녀가 영영 떠날 수 있다는 걸.

이재영이 알게 됐다고 이서가 최 원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걸.

오히려, 그가 아닌 이재영의 손을 놓을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을 지도 모른다.

재영은 바들바들 떨리는 제 손을 꽉 쥐고선 다시 이서를 잡았다.

“그럼 집까지 내 차 타고 가. 데려다 줄 테니까.”

“전 진짜 괜찮습니다. 여기서 바로 가는 버스도 있고요.”

“타고 가!”

재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그래진 그의 눈엔 금방이라도 눈물이 차오를 듯했다.

“이제 나 같은 건 신경도 안 쓰여? 네 안중에도 없냐고!”

씩씩 분에 차 숨을 내뱉는 소리만 허공에 맴돌았다.

이서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재영을 바라보았다.

재영은 제 분노에도 전혀 흔들림 없는 이서를 보며 더 마음이 무너졌다.

그녀는 그가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다.

이렇게 화를 내고 억지로 붙잡아 놓아도 정이서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없을 거다.

그녀의 눈 안엔 최 원이 가득 차 있었다. 재영은 그걸 똑똑히 보았다.

완전히 달라진 이서를 앞에 두고, 재영은 금방이라도 울 듯 애절한 목소리로 빌었다.

“타고 가. 제발, 정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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