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32화
널 품에 안고 싶었어.
그는 이서를 꽉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정말? 제가 애태웠던 시간만큼, 그도 절 보고 싶어 했을까?
이제야 나타나 ‘보고 싶었다’라고 말하는 이 남자가 얄미웠다.
하지만 미련하게도 그 말 한 마디에 그동안의 미움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오히려 제게 다시 찾아와 줘서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이서를 꽉 안고 있던 그가 팔을 풀었다.
이번엔 큰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잡고선 얼굴을 천천히 확인했다.
촉촉하게 젖어 있는 이서의 눈. 그 맑게 고인 옹달샘 위엔 그의 얼굴만 가득 담겨 있었다.
“미안해, 기다리게 해서.”
그 말에 이서는 세찬 바람이라도 맞은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곤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내가 더.”
그날, 새벽에도 그에게 했던 말은 미안하다는 말 뿐이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이서가 하고 싶은 말은 미안하다는 말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 괜찮다는 듯 웃으며 제 이야기를 했다.
“이런 변명하는 거 별로지만, 포럼 준비랑 더불어 내 신변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어.”
막상 그의 말을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간의 모든 추측과 의심들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정신없이 바빴을 그의 모습만 이서의 머리에 가득 찼다.
“그래도 연락 한 번쯤은 할 수 있었는데. 네 얼굴 보면 할 일도 내팽개치고 그대로 도망치고 싶어질 것 같아서.”
평소 사람의 말을 있는 그대로 믿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이서는 지금 그의 말을 전부 믿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 역시 제 마음과 같았을 거라고, 저처럼 많이 그리워했을 거라고.
둘이 보냈던 그 시간들을, 꿈보다 더 달콤했던 그 순간들을.
“내가 더 미안해요. 나 때문에 힘들어진 것 같아서 계속 마음이 쓰였어요.”
이서는 밑으로 떨어트린 손을 올려 그의 코트 자락을 꽉 잡았다.
“어쩌면…… 일이 이렇게 될 거 라는 거 알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내가 이 회장님 성격을 모르는 게 아니었는데……. 우선 제 앞에 닥친 일만 생각하느라.”
이서는 솔직히 말했다. 그에겐 뭐든 솔직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막상 말은 하긴 했는데…… 이서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그는 큰 손으로 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서 일은 해결됐어?”
이서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그걸로 됐어.”
그의 목소리가 이서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제 마음을 그가 보듬어주는 것 같았다.
이서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그의 엄지가 눈가에 올라왔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그 눈물이 그의 손가락에 스며들어 전신에 흐르는 것 같았다.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욕구들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 작은 한 방울이, 파도를 일으켜 그를 잠식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작은 입술 위를 그대로 덮쳤다.
보드라운 그녀의 숨결이 입가에 번졌다.
그리고 마치 오랫동안 갈증에 시달린 양, 그녀를 깊게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제야 제 안에서 텅 비어 있던 부분이 온전히 채워지는 걸 느꼈다.
그간 그가 애써 부정해 왔던 욕구들이 우습다는 듯, 그녀가 주는 완전한 만족감이 그를 기쁘게 했다.
사실 처음부터 틀렸을 지도 모른다.
그날, 강원도에서 정이서를 충동적으로 안았을 때부터.
무의식적으로 정이서가 제 여자가 되길 바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이서를 원하는 마음을 더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의 연락을 조용히 지켜보던 때도, 그날 새벽 그녀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도.
또, 오늘 포럼에서 정이서를 의식한 모든 순간마다.
그는 정이서를 제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만 이 여자가 떠올랐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머릿속도 그녀와의 뜨거운 키스 한 번에 풀리는 것 같았다.
제 계획이야 다시 세우면 된다지만, 정이서를 향한 제 욕구를 부정하다간 끝내 후회하고 말 거라는 걸 확실히 깨달았다.
최 원은 이서가 도망가지 않게 꽉 잡았다.
앞으로 일이야 어떻게 되든, 우선 너를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한편 한참 술을 들이붓던 재영은 문득 옆자리가 휑한 걸 느꼈다.
재영은 풀린 눈을 하고서 주위를 살펴봤다.
“화장실 간 애가 왜 이렇게 안 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마치 사람들 사이의 외딴 섬처럼 혼자 앉아 있었다.
정이서마저 없으니 쓸쓸하고 무안하기만 했다.
“화장실이 밖에 있나?”
그는 제게 관심조차 없는 직원들을 뒤로 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또 저번처럼 길바닥에서 자고 있는 건 아니겠지?”
왜, 그때 두바이에서처럼.
호텔에서 자고 있었다고 했지만, 분명 술에 취해 바깥에서 잤다고 재영은 아직까지도 확신하고 있었다.
재영은 갈지자로 걸으며 식당 문을 나섰다.
얼마나 술을 마셨는지 아스팔트 바닥이 울렁거렸다.
“아씨, 추운데.”
재영은 몸을 웅크린 채 가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쩌겠는가? 저희들이 사라지든 말든 신경도 안 쓰는데.
재영은 여기서 이서를 챙길 사람은 저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화장실에도, 가게 앞에도 이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서가 보이지 않자 초조했다.
얼마나 가게 앞을 서성였을까?
재영은 가게에서 조금 더 떨어진 공터까지 나왔다.
시간이 늦은 모양인지 불 꺼진 가게들만 보일 뿐, 정이서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재영은 버럭 짜증을 내며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무슨 여자애가 주사가 있냐.”
정이서에게 전화를 걸려고 할 때, 문득 재영의 시선이 한곳에 걸렸다.
공터 안, 커다란 가로수 아래 서 있는 남자에게로.
그리고 그 앞에 긴 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보였다.
취중이라 피사체가 자꾸 일렁거렸다.
재영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고개를 흔든 뒤, 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15년이었다. 제가 정이서와 같이 지낸 시간이. 아무리 취했다고 한들 재영이 정이서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어?”
놀란 재영이 짧게 소리쳤다.
그쪽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던 재영이 또 멈췄다.
그리고 얼이 빠진 채, 정이서가 남자의 코트 자락을 꽉 잡는 걸 보았다.
정이서가 왜? 정이서가 왜 저 남자랑 딱 붙어서 서 있는 거지?
정이서가 남자랑 딱 붙어서?
어? 정이서가 남자랑 같이 있다고?!
정이서가, 정이서 주제에 어떻게 남자를 만난다고.
재영은 직접 제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부정했다.
말도 안 되는 일 아닌가, 정이서한테 남자라니? 그것도 제가 아니라 다른 남자를 옆에 둔다고?
하지만 그런 재영을 비웃듯, 정이서와 남자의 얼굴이 포개졌다.
그건 누가 보아도, 정이서가 외간남자와 키스를 하는 광경이었다.
재영은 마치 바람 난 아내라도 목격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쌩 하니 부는 바람이 그를 밀기라도 한 걸까?
그 자리에 가만 서 있던 재영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에게로.
“어떤 새끼랑, 대체 어떤 새끼랑 붙어먹는지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해야,”
분노로 가득 차 중얼거리던 재영이 또 얼마 못 가 걸음을 멈췄다.
이서와 입술을 뗀 남자가 몸을 바로 세웠다.
방금 전엔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남자의 얼굴을 이번엔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재영은 머릿속으로 그의 이름을 떠올리기 전에, 입으로 먼저 그 이름을 뱉었다.
“……최 원?”
제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고 재영은 더욱 화들짝 놀랐다.
잠깐만, 최 원이라고?
최 원이랑 정이서가 왜……? 두 사람이 왜, 어째서?
정이서가 제정신이라면 최 원이랑 키스를 할 리 없는데?
지금 제가 미워하다 못해 죽이고 싶어 하는 그놈을, 정이서가 그놈을 만난단 말인가?
재영은 제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눈을 비볐지만, 그 남자는 분명 최 원이 맞았다.
그리고 이서는 저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던 웃음까지 걸고 있었다.
그때 마침 최 원이 재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재영은 설마 그가 저를 볼까 봐 몸을 휙 돌렸다.
방금 전, 본때를 보여야 겠다는 기세는 어디가고 재영은 그저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재영은 그대로 식당으로 돌아갔다.
마음속에서 울컥 울분이 솟구쳤지만, 당장 어찌할 수도 없었다.
재영이 혼자 안으로 들어오자 왕 본부장이 물었다.
“정 비서 찾으러 간 거 아니에요?”
왕 본부장의 말에 재영은 대꾸도 없이 술잔을 비웠다.
그에 놀란 왕 본부장과 다른 직원들이 눈치를 살폈다.
설마 저희들이 하도 무시를 해서 화가 난 걸까? 아님, 바깥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꼭 못 볼 거라도 본 사람처럼, 얼굴이 검게 굳어서는.
왕 본부장은 그런 재영을 한심하게 바라보다 말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정 비서는 술 한 모금도 안 했으니까. 정신도 말짱한데 무슨 일이 있진 않겠죠.”
그 말에 재영은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정이서의 자리에 술잔이 놓여 있지도 않았다.
그럼, 맨정신으로 최 원이랑 키스를 한 거라고?!
재영의 심장이 더욱더 차갑게 굳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