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31화

잠깐 나와.

그가 아무리 뛰어난 발표를 한다고 해도 행사장 분위기는 진정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뛰어난 발표를 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면, 상상도 못한 기술을 가져오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욕하는 이들의 입을 틀어막을 자신이 있었다.

“저희 LIMS에서 독자적으로 개발한 보안 프로그램 COSMOS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는 무대 위를 천천히 걸으며 준비해 온 발표를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는 갈수록 연결 접점이 넓어지고, 생성되는 데이터 또한 무한한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 보안인들에겐 신경 써야 할 보안 이슈가 무한대로 늘어나겠죠.”

그의 발표에선 대본을 달달 외우다시피 한 이재영에게선 절대 찾을 수 없던 여유가 느껴졌다.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 사람만이 장착할 수 있는 여유였다.

“이런 환경에 우리는 합리적으로 대비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보안 단계를 최소화하고 보안인들이 꼭 필요한 이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 원이 무대 위에서 씩 웃어보였다. 사람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아는 듯, 그는 유려한 말도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그 대안인 AI 보안 관제 서비스는 이벤트 발생만 감지할 뿐, 해결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뒤에 앉아 있던 개발자들은 황당한 듯 헛웃음을 쳤다.

AI 보안 관제 서비스를 개발한 곳은 재한이었다. 즉, 지금 최 원은 재한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물론 뒤에 있던 기술팀 사람들만 알아들었을 뿐, 최 원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재영은 반응도 못했다.

기술팀 사람들은 저들끼리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원론적인 말은 누가 못 해? 더 좋은 대안이 있겠냐?”

“그러니까. 우리랑 해 보자는 거야? 블랙 해커 주제에.”

이서는 그들이 구시렁거리는 말을 엿들었다.

기술팀의 최 원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에 이서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초조하고 불안한 이서와 달리 그는 당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저희 LIMS에서 개발한 COSMOS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저희는 이벤트 감지뿐만 아니라 사고 대응까지 한번에 해결하려 합니다.”

그 말에 갑자기 주위가 술렁거렸다.

무슨 말인지 통 알아들을 수 없는 재영이 이서에게 물었다.

“왜? 뭔데? 쟤가 엄청난 거 가져왔어?”

이서라고 완전히 알아들은 건 아니었으나, 분명 재한이 가진 기술력보다 한 단계 더 진보된 기술이었다.

보안 이벤트 감지뿐만 아니라 사고 대응까지 가능한 AI를 만들었다는 소리였으니까.

“COSMOS는 중요한 보안 이벤트를 어떤 팀에 할당할지까지 정합니다. 뿐만 아니라 AI가 담당자에게 대응 매뉴얼까지 전달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 가만히 있던 기자들의 손가락이 바빠졌다.

“또, 딥 러닝이 가능한 AI이니 데이터가 쌓일수록 성장 또한 스스로 해내겠죠?”

모두가 그가 가져온 COSMOS를 보고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블랙 해커라는 놈이 재한보다 몇 단계는 더 진화된 프로그램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최 원이 가져온 기술은 혁신 그 자체였다.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재한 따위는 한 번에 지워 버릴 정도로.

그의 차례가 끝났지만 회장 안엔 여전히 침묵이 감돌았다.

방금 전까진 그를 욕하는 소리만 들렸다면, 지금은 사람들이 조용히 감탄하는 소리가 회장 안을 채우고 있었다.

개중 누군가는 박수까지 보낼 정도였다.

이서는 단상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을 걸 뻔히 알면서 이 자리에 굳이 서려고 했던 그의 의도가 궁금했는데.

최 원은 블랙 해커 논란을 정면 돌파할 만큼 대단한 무기를 가지고 왔다.

그가 유능한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밤새 그의 앞날을 걱정했던 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저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이었다.

위기 따위에 겁먹기는커녕 그걸 발판 삼아 더 높게 도약하는 천재였다.

이서는 그와 저 사이에 무한한 우주가 펼쳐지는 것 같았다.

이서가 아무리 애쓰고 손을 뻗어도, 그에게 절대 닿을 수 없는 우주가.

회장에 불이 켜지자 모두 질문을 쏟아냈다.

COSMOS에 대한 추가 질문이나 보안 이벤트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러다 누군가 용기를 냈는지 사람들이 정말 궁금해 했던 걸 그에게 물었다.

“현재 블랙 해커 출신이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는데, 이거 해명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기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블랙 해커한테 보안을 맡길 순 없잖아요.”

그 말에 모두 최 원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나올 대답에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최 원은 잠시 뜸을 들이다 차분히 대답했다.

“해명하지 않겠습니다. 전부 사실입니다. 어렸을 적 잘못된 선택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했습니다. 보안인으로서 죄송하다는 말씀 드립니다.”

최 원은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블랙 해커라고 인정하자 사람들은 다시 그를 손가락질했다.

어디 감히 블랙 해커가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있냐고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한창 회장이 요란스러워질 무렵,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던 한 기자가 조용히 일어나 손을 들었다.

“그런데 최 원 대표님. LEO라는 그 이름은 미국에서 쓰시던 이름입니까?”

“네. 어렸을 적 미국으로 가서 LEO CHOI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그 기자는 무언가 중요한 걸 물어보려는 듯 손을 꽉 쥐었다.

“혹시 미군 사이버보안팀에서 유명했던 그 해커, 닉네임 LEO였잖습니까. 혹시…… 그와 동일인은 아닙니까?”

기자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LEO?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미군 사이버보안팀 소속 해커, 닉네임 LEO.

그는 수없이 많은 사이버 테러를 막고, 악명 높은 블랙 해커들을 함정에 빠트려 소탕한 전설적인 화이트 해커였다.

그 전설의 해커가, 최 원이라고?

최 원은 고민하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제가 LEO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뒤에 서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무대 앞으로 뛰쳐나갔다.

전설의 그 해커가 최 원이었다니! 여기서 특종을 만날 줄이야.

기자들뿐만 아니라 평소 그를 동경하던 해커들과 개발자들도 눈을 빛냈다.

“정말 LEO가 최 원이라고? 진짜?”

재한에 있던 다른 직원들도 기함했다.

LEO의 명성이 얼마나 뛰어났냐면, 해커들에게 롤 모델을 말하라고 하면 절반 이상이 LEO를 고를 정도였다.

그들의 롤 모델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흥분을 감출 수 있을까?

몇몇 직원들은 이재영이 여기 있다는 걸 깜빡 잊은 채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뛸 정도였다.

이재영의 눈빛이 사나워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중요한 건, 그 대답 하나로 나락에 떨어져 있던 최 원의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거다.

최 원은 이제 미 정보기관을 해킹한 사악한 블랙 해커가 아니라 세계를 구한 천재 해커가 되었으니까.

자체발광 하는 최 원의 앞에서 재한의 존재는 완전히 잊혀졌다.

* * *

불판 위에서 삼겹살이 지글거리며 익었다.

불판 앞에 앉은 직원들은 모두 울상을 짓고 있었다.

모두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꾹 참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때, 용기 있는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분명 소고기 사준다고 하지 않았나? 어떻게 소가 돼지가 된 거야?”

“소처럼 일한 사람만 소를 먹을 자격이 있는 겁니다.”

소주를 마시던 이재영이 한 소리를 했다.

발끈해서 재영에게 대들려던 직원들은 왕 본부장의 눈빛에 이내 자중했다.

오늘 기술팀 사람들끼리 약속한 게 있었다. 있는 듯 없는 듯 있다가 사라지자고.

어차피 이재영 대표와 부딪쳐 봤자 난감한 건 저희들이니 말이다.

그에 모두 입을 다물었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다.

우리가 소 먹을 자격이 없다면 이재영은 이 돼지! 아니, 쌀 한 톨도 먹을 자격이 없다고!

개발부터 운영까지 모두 기술팀에서 도맡아 하고 있고, 한 달 동안 이재영에게 기술 수업을 한 것도 이들이다.

그런 그들의 노고를 싹 다 지운 채, 예민한 식사 문제까지 건들며 그들을 비난하다니.

모두 한 톨 정도 남아 있던 회사에 대한 정마저 이제 싹 털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재영은 여전히 푸념 중이었다.

“난 정말 이해가 안 가. 최 원이 우리처럼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재한이 뭐가 모자라서 그런 걸 못 만드는데?!”

그에 옆에 있던 이서가 재영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대표님, 다들 고생했는데 오늘은 그만하시고,”

“그만? 어떻게 그만해. 나 너무 속상한데.”

이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다 다시 소주를 들이켰다.

마음 같아선 이서도 취할 정도로 술이 마시고 싶었다.

이서가 답답해하며 한숨을 쉴 때, 앞에 앉아 있던 왕 본부장은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보였다.

이서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왕 본부장에게 말이라도 걸어볼까 했지만 그만 두었다.

어차피 여기서 저와 이재영은 불청객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저 명목상 자리만 지키다 조용히 빠져 주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며.

시간은 흘러 기술팀 사람들은 저희들끼리 회식을 즐겼다.

이서와 재영은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재영은 술이라도 먹으니 좀 낫겠지만, 맨정신인 이서에겐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그때, 이서의 손에서 핸드폰이 진동했다.

이서가 민첩하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던 이서의 얼굴이 단번에 바뀌었다.

핸드폰 액정에 뜬 이름 때문이었다.

‘최 원 대표님’

최 원? 최 원이라고?!

영영 절 만나주지 않을 것 같던 남자가 왜 이제야?

이서는 놀란 마음에 우선 핸드폰을 엎어 두었다.

제가 잘못 본 건 아닌가 싶어 다시 확인했지만, 분명 최 원의 전화였다.

왜지? 왜 전화를 한 거지?

그렇게 기다렸던 전화가 왔는데 막상 이서는 조마조마했다.

그는 저와 잘해 볼 마음이 없으니까.

분명 다른 용건 때문에 전화했을 거란 걸 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이서는 그의 전화를 받고 싶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건 우선 그와 말 한 마디라도 섞어 보고 싶었으니까.

이서는 엉덩이를 들썩거리다 재영의 눈치를 봤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소주만 벌컥벌컥 마시고 있는 재영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전화가 끊겼다.

손 안에서 진동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자 이서는 더욱 초조해졌다.

우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5분 뒤에. 아니, 1분 뒤에 연락을 주겠다고 메시지라도 남기려던 찰나. 그에게서 먼저 메시지가 도착했다.

‘지금 재한 회식 장소 앞인데. 잠깐 나올 수 있어?’

이서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지금, 그가 이 식당 앞이라고?

깜짝 놀란 이서는 목을 빼 밖을 살폈다.

진짜 여기 앞에 있다고? 최 원, 그가? 왜 여기까지 찾아온 거지?

이서의 마음도 급해지기 시작했다.

이서는 재영이 다시 술잔을 비울 때를 기다렸다 벌떡 일어났다.

“저 잠시 화장실 다녀오겠습니다.”

몽롱한 재영은 손만 내저었다.

동시에 이서는 서둘러 식당 밖으로 나갔다. 어찌나 마음이 급한지 발걸음이 갈수록 빨라졌다.

한창 빠르게 걷던 이서는 저 멀리 서 있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녀는 검은 실루엣만으로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코트에 손을 찔러 넣고 조용히 저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이서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를 재차 확인했다.

맞다, 그녀가 그토록 그리워했던 최 원이.

이서는 우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이서의 정신을 맑게 깨우는 것 같았다.

꿈일까 했던 마지막 의심까지도 날린 뒤에야, 그녀는 다시 그에게 걸어갔다.

이서가 급히 다가오자마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그녀를 당겨 품에 안았다.

이서는 그제야 그가 다시 제게 돌아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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