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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29/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29화

사람을 좋아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거라면.

그와 헤어진 뒤, 이서는 집이 아닌 병원으로 향했다.

간신히 마지막 면회 시간에 맞춰 들어간 거라 중환자실엔 의료진들만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이서의 하얀 손이 엄마의 손을 꼭 잡았다.

엄마의 손은 마치 겨울의 나뭇가지처럼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엄마. 나 왔어.”

이서는 엄마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하지만 엄마는 꿈쩍도 않고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엄마의 검은 얼굴에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웃음 지으며 활기찬 목소리로 속삭였다.

“엄마, 오늘은 날씨가 더 춥더라. 곧 2월인데, 언제 추위가 물러가려나.”

현주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중환자들이 의식이 없는 것 같아도, 감각은 살아 있다고.

이렇게 손을 잡거나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다 느낀다고.

그래서 이서는 최대한 밝게 속삭였다.

엄마가 쓰러지기 전날, 제가 한 말에 눈물 짓던 엄마의 모습이 마음에 콱 박혀 있어서.

그 죄책감에 이서는 억지로라도 밝게 웃었다.

“엄마. 엄마 퇴원하면 우리 같이 강원도 가자. 어젯밤에 잠깐 다녀왔는데 좋더라. 바다도 멋지고.”

최근 이서가 겪었던 일 중 좋았던 일이라곤 어젯밤 일 뿐이었다.

무작정 떠난 여행이었지만, 최근 들어 가장 많이 웃은 하루였다.

이서는 어젯밤 그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어젠 다른 세상에 간 것 같았어. 세상이 온통 하얀 눈이 쌓여서 인가? 아님…….”

최 원, 그 남자랑 웃고 떠드는 시간들이 현실감이 없었던 걸까.

마치 꿈을 꾼 것 같은 밤이었다.

“……엄마.”

이서는 ‘최 원’의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수상하게만 생각했던 남자에게 지금은 속절없이 끌린다고.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가 좋다고.

감정을 제어하기 힘들어 무서운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함부로 그의 이야기를 꺼낼 순 없었다.

그와 만나는 게 꼭 죄 짓는 것 같았으니까.

그가 동종 업계에 있는 회사의 대표라서?

그도 아니면, 이서의 상황에 연애는 사치라?

그렇게 생각해 보니…….

“나한텐 그 사람을 좋아하면 안 되는 이유만 있네.”

그걸 분명 알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가 제 마음을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 이서는 제 마음속에서 그를 내쫓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허공을 보던 이서가 속삭였다.

“엄마, 그래도 나 좋아하는 남자가 생겼어.”

산소 호흡기를 쓴 이서의 엄마가 대답할 리 없었지만,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안고 처음으로 제 마음을 털어놓았다.

“최 원, 그 남자가 너무 좋아. 엄마.”

* * *

[엄마 만났어요.]

어제 저녁에 보낸 문자에 그는 아직 답장이 없었다.

피곤해서 답장이 없는 거라 생각했는데.

아침에도 답이 없는 걸 보니 마음이 뒤숭숭했다.

“아직 안 일어났나 보지.”

하지만 출근을 하고 점심시간이 지난 뒤에도 그에게선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이서가 일에 집중 못하고 핸드폰만 쳐다보는 걸 재영도 느낄 정도였다.

“왜? 아줌마 때문에?”

재영의 말에 이서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 엄마도 아픈 와중에 남자 연락이나 기다리고 있다니.

아무리 남자가 처음이라고 해도 정도를 알자. 정이서, 정도를.

한편 재영은 하루 종일 이서의 주위만 어슬렁거렸다.

어떻게 한번 말이나 붙여볼까 타이밍만 살피며.

이서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재영이 쌩하니 달려와 이서 옆에 섰다.

그리고 핸드폰을 확인하고 있는 이서를 보고 쓱 물었다.

“근데 어제 어디 갔었어? 병원엔 없던데.”

언제 탄 거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온 재영 때문에 적잖이 놀란 이서가 어깨까지 튕겼다.

“응?”

재영이 끈질기게 묻자, 이서는 적당히 둘러댔다.

“집에서 오래간만에 푹 쉬었어요.”

“집? 집에 있었던 거 확실해?”

그 말에 이서가 이상한 눈으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네. 확실한데요?”

이서의 말에 재영의 낯빛이 굳어졌다.

거짓말, 집에도 없었고 병원에도 없었으면서.

왜 저한테 거짓말을 하는 거지?

언제 정이서가 제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제게 거짓말을 했다고 화낼 수도 없어 이를 꽉 깨물고 참았다.

그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조용히 내려가고 있는데, 앞쪽에서 직원들이 숙덕거렸다.

“방금 뜬 뉴스 봤어요? 저희 패치 만들어준 최 원 대표! 그 대표가 사실 악명 높은 블랙해커래요!”

그 말에 핸드폰만 보고 있던 이서가 재빨리 고개를 들었다.

또 그런 이서를 못마땅한 듯 지켜보고 있던 재영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요?”

“아, 깜짝이야!”

뒤에 이재영이 있는 줄 몰랐던 직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영은 사람들 사이로 얼굴을 쏙 빼며 물었다.

“누가 블랙해커라고요?”

“어어, 대표님. 그게……. 지금 IT 뉴스에 기사가 하나 떴는데.”

그 말을 한 직원이 핸드폰으로 기사를 보여주었다.

재영은 눈을 크게 뜨고 그 기사를 살폈다. 옆에 있던 이서 역시 까치발을 들고선 기사를 확인했다.

‘신생 시큐리티 기업 대표가 블랙 해커 출신?! 도둑에게 정보 보안 맡기는 꼴인가?’

‘미, 정부 기관 턴 블랙해커 LEO CHOI. 한국에 와서 버젓이 시큐리티 대표로 신분 세탁.’

재한 시큐리티 사람이라면 기사의 주인공이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기사를 본 이서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이게 어떻게…….”

분명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만 한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런데 어째서 이런 기사가 뜬 거지?

분명 그는 재한을 도와줬는데, 왜 최 원의 발목을 잡는 건지 이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서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르길 반복하는 듯했다.

그 역시 절 믿고 정보를 준 건데.

일이 왜 이렇게.

한편, 재영은 한참 동안 기사를 보다 반 박자 늦게 소리를 질렀다.

“진짜 최 원이 블랙해커라고?”

재영은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짜고짜 패치를 가져다 주길래 제게 잘 보이고 싶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래서 아버지가 걱정하실 때도 별 일 아니라고 가볍게 넘겼는데.

그런데 아버지의 염려대로 그 새끼가 블랙해커라면…….

재영이 호들갑을 떨며 이서를 닦달했다.

“우리 패치는? 그 새끼가 우리한테 준 패치. 그거 문제없는 거 확실해?”

이재영의 물음에 이서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차분히 대답했다.

“……우선 제가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재영은 이서의 말에 한숨지었다.

“패치에 문제 있으면 진짜 아버지한테 나 죽는데.”

이서는 막상 재영에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줘야 할지 몰랐다.

최 원이 블랙해커 출신이었다는  정보를 어디서 뿌렸는지.

아니, 애초에 최 원과 제가 왜 엮이게 된 건지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

그 이후로 최 원은 연락이 없었다.

그간 이서가 밤낮 없이 연락했지만, 그는 이서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가 묵고 있던 호텔에도 찾아가 보았지만, 외부인에겐 투숙객 정보를 줄 수 없다는 말만 답만 들었을 뿐 그가 거기 있는지조차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렇게 며칠간 집착이 심한 애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의 행방만 쫓아다닌 것 같다.

어쨌든 그를 한 번이라도 봐야 이 초조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아서.

그는 저를 믿고 정보를 줬는데, 이서는 도리어 그를 위험에 빠트리고 말았다.

물론 사과로 이 사태를 수습할 수 없다는 건 알았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은 것도 제 이기심이라는 걸 알았고.

그럼에도…… 이기적이라고 비난해도 좋으니 한 번만이라도 그를 보고 싶었다.

자다가도 번쩍 눈을 떠 몇 번이고 핸드폰을 확인하다,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짜 미안해요. 사과라도 하고 싶은데 문자 보시면 연락 주세요.]

스크롤을 올리니 온통 제가 보낸 문자뿐이었다.

이 메시지를 읽긴 하는 건지.

도무지 잠들 수 없는 이 밤, 이서는 그대로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향했다.

이른 다섯 시, 일찍 출근이라도 할까 생각했지만.

이서는 결국 그에 대한 미련을 지우지 못하고 이상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엔 해마저도 추위에 게을러지는지 아직도 하늘은 푸르스름했다.

또 평소 사람들과 차로 북적거리는 거리도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최 원이 있는 호텔 앞에 도착한 이서는 멍하니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대로 끝인 걸까?

이렇게 인사 한 번 못 해 보고, 난생 처음 마음을 열었던 남자와 멀어져야 하다니.

괜스레 서러운 마음이 밀려와 코끝이 매워졌다.

아무리 제 삶이 얄궂더라도 그에게 고맙다, 미안하다 말 한 마디 할 수 있는 기회도 주지 않다니.

이서의 마음속에 속상함이 또 한 꺼풀 쌓여갔다.

발걸음을 돌리려던 그때, 호텔에서 눈에 익은 사람이 걸어 나왔다.

이서는 자리에 멈춰선 채 그를 바라보았다.

꿈에서도 그리워하던 그 사람, 최 원이었다.

이서의 걱정과 달리 그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예전보다 더 근사해진 모습이었다.

정장 차림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최 원은 한쪽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처음엔 잘못 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스치듯 보더라도 그녀가 정이서라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꽁꽁 언 거리에서 두 남녀도 얼어버린 듯 그 자리에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최 원이 뭐라 입을 떼기도 전,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이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최 원은 당황했다.

당연히 그녀의 입에서 원망의 말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녀는 오히려 제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정말 미안해요.”

이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그를 보자 온갖 감정이 밀려와 미안하다는 말밖엔 나오지 않았다.

또 그에게 묻고 싶은 말도 아주 많았지만…….

결국 이서는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에게서 멀어질수록 이서의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사람을 좋아하는 게 이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안 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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