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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28/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28화

너라는 변수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재영은 이른 아침부터 분주했다.

휴일인데도 그는 밖에 나갈 채비를 하느라 바빴다.

“어디가? 오늘 휴일인데.”

거실에서 이 회장과 과일을 먹던 손 여사가 밖을 나서는 재영에게 물었다.

재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잠깐, 회사에 일이 있어서요.”

“그래? 근데 왜 너 혼자 가? 정이서는?”

손 여사의 물음에 재영이 대충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 회사에 가 있으라고 했어요. 다녀올게요.”

재영은 그 말만 남긴 채 서둘러 집을 나섰다.

기사까지 물린 재영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이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지 이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평소 통화 연결음 두 번을 넘기지 않는 이서였는데.

몇 번을 전화해도 소용없자 재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자나?”

재영은 이번엔 정재곤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통화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재깍 재영의 전화를 받았다.

-네, 도련님. 이른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정 실장님 어디세요?”

-저 아직 집인데. 무슨 할 일이라도.

“아뇨, 아저씨가 아니라……. 정이서, 집에 있어요?”

-이서요? 이서, 도련님이랑 같이 있는 거 아닙니까? 집에 안 와서 재한가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그 말에 재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전화도 안 받고 어제 집에도 안 들어간 거야?

다 큰 여자애가 대체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 거지.

그러다 문득 이서가 병원으로 간다던 말이 떠올랐다.

“주말이라 병원에서 밤 샌 거 같네요.”

-제가 병원에 연락해 얼른 이서한테,

“아뇨, 제가 잠깐 병원에 가려고요.”

-도련님께서요?

오히려 잘 됐다.

마침 병원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서 어머니 병문안을 가서 손도 좀 잡아주고.

잠도 제대로 못 잤을 정이서한테 밥도 사 주고 기분 전환 겸 드라이브라도 시켜줘야지.

그동안 오빠 노릇 못하고 망나니처럼 굴었다고 한들 앞으로가 더 중요한 거 아니겠는가?

이제라도 못다 한 오빠 노릇 좀 하고, 이서에게 제 이미지를 탈바꿈해야지.

제 계획이 술술 풀리는 것 같아 재영은 절로 신이 났다.

재영은 병원 앞 꽃집에 가서 커다란 꽃바구니를 사고, 이서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고 의료진들에게 돌릴 과일 바구니도 하나 구매했다.

양 손 가득 든든히 챙긴 재영이 당당한 걸음걸이로 병원에 입성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 올라오자마자 간호사에게 덜미가 잡혔다.

“저기요. 보호자 분.”

짜증이 잔뜩 느껴지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아보니 저번에 봤던 그 간호사였다.

이서를 안아주며 위로해 주던…….

“아?! 이서 친구 분?!”

현주는 재영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방긋거리는 재영과 달리 낯빛이 사나웠다.

하지만 현주가 무어라 하기 전, 재영이 한껏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이서, 어딨어요?”

“이서요?”

“정이서 병원에 없어요?”

“이서가 아침부터 병원에 왜 있겠어요.”

“어젯밤에 병원에 왔잖아요.”

“면회 시간 끝나고 바로 돌아갔죠.”

그 말에 재영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했다.

뭐야, 병원에도 없다고?

그럼 도대체 어딜 간 거지.

집에도 없고 병원에도 없으면 대체…….

“그럼 이서 어딨는데요.”

그 말에 현주는 답답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야 모르죠. 제가 이서 비서도 아닌데. 이서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게다가 이 간호사는 왜 제게 툴툴거리는 건지.

제게 쌓인 게 많은 듯 태도가 사나웠다.

하지만 지금 간호사의 태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우선 정이서를 찾는 게 먼저였으니까.

재영은 양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를 현주에게 건넸다.

“이 꽃바구니는 이서 어머니 머리맡에 놔 주시고, 그리고 이 과일은 가져가서 나눠 드세요.”

“네?”

“이서 오면 꼭! 제가 가져왔다고 전해 주시고. 또 이 과일 바구니도 어머니 잘 부탁드린다고 제가 직접 의료진들께 드렸다고 꼭! 전해 줘야 돼요.”

현주는 그런 재영을 한심하게 보며 쌀쌀맞게 답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요.”

“네? 왜요?”

그에 현주가 한쪽 벽을 가리켰다.

‘꽃, 과일 절대 반입 금지’

“중환자실에 꽃이나 과일은 절대 반입금지입니다.”

“아니, 그래도 슬쩍…….”

“슬쩍이고 뭐고 안 된다고요. 보호자 분. 가져가세요!”

현주의 사나운 불호령에 재영은 꽃바구니를 든 손을 제 쪽으로 물렸다.

하지만 여전히 과일 바구니를 든 손은 현주 쪽에 내밀어져 있었다.

“그럼 과일이라도.”

“저희 의료진은 환자 보호자로부터 어떤 답례도 받지 않습니다.”

재영이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구겼다.

“누가 정이서 친구 아니랄까 봐 꽉 막혀선. 가져온 성의를 봐서 그냥 가져가요.”

“꽉 막히다뇨? 보호자 분?!”

현주가 제 귀를 의심하며 정색했다.

“이건 꽉 막힌 게 아니라 이곳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입니다. 규칙을 어겨서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면 안 되죠.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성인인데 이걸 하나하나 가르쳐 드려야 하나요?!”

언제 재영이 이렇게 혼나 본 적이 있을까?

집에서도 오냐오냐 컸고, 사회에 나와서도 이서가 모든 뒤치다꺼리를 해 줬는데.

게다가 재한 그룹의 상속자라는 걸 알면 모두 제 앞에서 고분고분해지기 마련인데.

이 간호사는 제가 누군지 알면서도 전혀 물러섬이 없었다.

게다가 철저히 ‘보호자’란 호칭을 썼다.

이재영이 재한 그룹 3세든, 대통령 아들이든 어림도 없다는 것이었다.

성질이 난 재영이 버럭 화를 내려고 입을 열자 현주는 더 단호한 목소리로 똑 부러지게 말했다.

“안 됩니다! 얼른 가지고 가세요, 얼른!”

재영은 두 다리를 딱 벌리고 선 현주를 보고 이내 포기했다.

이 간호사는 제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아 보였다.

재영은 그대로 뒤를 돌아 구시렁댔다.

“정이서 친구니까 봐 주지, 정이서 친구니까.”

그 말을 얼핏 들은 현주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나도 우리 이서 상사라 이 정도만 하는 거야.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게 까불어.”

현주는 조용히 읊조리곤 이를 꽉 깨물었다.

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건만. 이제라도 이재영의 기를 꺾어놓은 것 같아 속이 시원했다.

* * *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 분위기는 어제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다소 어색했던 어젯밤과 달리 서울로 돌아오는 차 안엔 이서의 웃음소리가 가득 했으니까.

또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서 피어나오는 열기는 차 안을 훈훈하게 했다.

이서는 맞잡은 그의 손을 보며 슬쩍 웃었다.

저를 꽉 잡고 있는 손아귀 힘까지 괜히 이서를 설레게 했다.

그 때문에 온종일 울었다 설렜다……. 널뛰는 제 마음이 주책맞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마음속을 간지럽히는 이 감정들이 싫지 않았다.

서울에 첩첩산중으로 쌓여 있을 문제들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아무래도 어젯밤에 내린 눈이 제 마음에도 수북이 쌓인 듯했다.

이서는 이 눈이 영영 녹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살아생전 처음 느껴보는 울렁거림이 짜릿하기만 했다.

그 감정에 사로잡혀 있어서일까?

평소 눈치 빠른 이서라면 그의 미묘한 표정 변화도 알아차렸겠지만.

서울로 향할수록, 눈 없이 황량한 겨울 풍경이 나타날수록.

그의 표정이 천천히 얼어가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앙상한 나무들로 뒤덮인 풍경이 나타나자, 그는 꿈에서라도 깬 듯 그녀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서가 그런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해요?”

“일이 많이 틀어진 것 같아서.”

“무슨 일이요?”

“오랫동안 계획했던 일?”

이서는 허전한 손을 보다 이내 제 두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담담하게 말했다.

“어떤 문제든 계획대로 되는 일은 없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자꾸 길을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문제 자체를 바꾸기도 하니까.”

“많이 겪어봤나 봐?”

“그럼요. 26년 사는 동안 한 번도 처음 계획대로 된 적이 없는데요.”

“난 아주 오랫동안, 치밀하게 계획한 일인데.”

이서는 그 말에 어림도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런 일일수록 더 변수가 많아요. 세상이 얼마나 얄궂은데.”

이서가 오랫동안 꿈꿔온 것들 중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있나.

엄마가 퇴원하면 같이 살 집도 얻었는데, 엄마는 의식도 없고.

심지어 아빠와는 크게 사이가 틀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화목하고 끈끈할 것만 같던 가족들마저도 결국 오랜 비극 앞에선 힘을 못 쓰는데.

이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그를 격려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요. 때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새로운 길을 열어 줄 수도 있잖아요.”

이건 사실 이서가 이번에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인생에 갑자기 끼어든 그가 제게 상상도 못한 길을 열어 주었듯.

그의 오랜 계획에 나타난 변수가 다른 해법을 내놓을 지도 몰랐으니까.

“그러길 바라고요.”

이서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제 계획에 끼어든 변수가 해 주는 조언이라니.

최 원은 어림도 없다는 듯 웃었다.

“글쎄. 난 계획대로 가고 싶은데.”

내가 너한테 끌렸던 건, 딱 여기까지.

여기서 더 너를 욕심내면 안 된다는 건 확실히 알았다.

정이서와 이 이상 엮인다면, 그 남자가 아니라 자신이 더 난감해질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최 원은 눈 속에서 벗어나서야 비로소 제 감정을 다잡았다.

이제 다신, 정이서를 만나지 않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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