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27화
이런 널 두고 내가 어딜 가겠어.
그가 머물고 간 자리마다 붉은 화인이 새겨졌다.
그가 제 안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 올 때마다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이대로 몸이 산산조각 날 것 같았지만 두렵진 않았다.
이런 황홀감 속에서 죽는다면 그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서는 그렇게 그의 품 안에서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가 절 꽉 안고, 살을 움켜쥐고, 깨물고, 몸을 치받을 때마다 처음 느끼는 고통에 온몸이 쑤셨지만 피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 역시 그의 맨살을 꽉 쥐었다.
이서는 그에 의해 제가 마모되길 바라며 밤새 그를 받아들였다.
눈을 뜨자마자 어젯밤 사랑의 후폭풍이 그녀를 덮치는 듯했다.
아래서부터 느껴지는 작열감.
또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뻐근함이 어젯밤을 상기시켰다.
“아아…….”
이서는 신음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살피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젯밤 침대부터 시작해 바닥, 창틀, 화장대 위까지. 어질러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위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침대 위 이불과 침대 시트도 깔끔하게 정리된 상태였다.
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아니었다면 어젯밤 일이 다 꿈인 줄 알았을 거다.
또 그녀를 당황하게 만든 것 하나.
달콤한 아침을 상상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을 떴을 때 저 혼자 남아 있을 줄은 몰랐는데.
하지만 호텔 객실 안에는 사람의 인기척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서는 담담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불에서 나오자 그녀의 하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서는 우선 제 몸을 덮을 만한 샤워 가운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객실 안을 맨발로 돌아다녔다.
어젯밤 엄청난 양의 폭설이 내렸던 게 무색하리만큼 하늘은 맑게 개여 있었다.
눈에 잠긴 세상만 어제 폭설이 왔다는 걸 말해주는 듯했다.
눈 덮인 모래사장 위로 파도가 하얀 포말을 일으켰고, 해변 가까이에 있는 소나무 가지에도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다.
밤새 요란스럽게 폭설을 쏟아내곤 시치미를 떼며 얼굴을 바꾼 하늘처럼,
어젯밤 이서와 살을 맞댔던 남자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이서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바닷가를 바라보았다.
눈이 따가울 정도로 하얀 세상에 이서의 눈이 절로 찌푸려졌다.
또 그 위를 천진하게 뛰어다니는 커플들을 보니 불쑥 화가 치밀었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말도 없이 가 버리는 건…….”
그가 그동안 제게 했던 말들은 뭘까.
첫눈에 반했다느니, 저에 대해 알고 싶다느니…….
말만 들으면 이보다 더 달콤한 사랑꾼이 없어 보였는데.
절 한 번 안고 난 후, 이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여느 나쁜 남자들처럼 육체적인 관계는 갖고 싶지만 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 이건가?
그의 태도에 이서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서는 제 자신이 초라해질까 봐 겉으론 아무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하룻밤 자 보려고 입에 발린 말을 하는 남자들은 널렸고, 그 역시 결국 그런 남자들 중 하나였던 거라고.
그거 한 번 해 보자고 그토록 끈질기게 제게 접근했던 거라고.
“생각할수록 황당해서 진짜. 그럼 처음부터 왜 그런 말을 한 거래?”
이서는 당황스러움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혼자 준비를 마치고 객실에서 나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문득 제 꼴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렵게 사람을 믿었건만, 결국 돌아오는 건 또 배신.
그런 제 처지가 가여워 괜히 눈물까지 차올랐다.
“아, 주책이야. 짜증나게.”
그에게 사로잡혀 강원도까지 따라왔는데.
또 그와 밤을 보내며 이런 쾌감이 계속되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었다.
제게도 온전히 제 자신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아 좋았는데.
결국 이렇게 혼자 남았으니 눈물이 나지 않고 배길까.
아무래도 제가 생각보다 최 원을 더 많이 믿었던 것 같다.
겁 많고 걱정 많은 제가 무작정 최 원의 손을 잡고 여기까지 오고, 또 그에게 제 몸을 온전히 맡긴 건 그를 그만큼 믿어서였겠지.
이서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했다.
괜찮다고, 이것도 시간이 가면 잊혀질 거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제 자신을 추슬렀다.
그때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이서는 눈물을 닦을 겨를도 없이 몸을 돌렸다.
소리도 없이 어찌나 서럽게 울었는지 코끝이 빨개져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이서를 버리고 갔던 그, 최 원이 나타났다.
침실 쪽을 살피던 그는 이내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이 푹 젖어있는 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왜 울고 있지?”
어제와 달리 그의 말이 짧아져 있었다.
하지만 이서는 그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얼른 샤워 가운으로 눈을 꾹 눌렀다.
“아, 아뇨. 안 울었는데.”
맨날 우는 꼴만 보여주네, 창피하게.
그런데 갑자기 왜 나타난 거지?
옷과 소지품이 전부 없어졌길래 혼자 가 버린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그가 다시 나타나니 창피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울었는데? 왜?”
어떻게 말하겠는가.
일어나니 네가 없어서 울고 있었다고.
이서는 얼른 감정을 추스르곤 멀쩡한 척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 원은 뭐가 문제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일찍 눈이 떠져서. 주위 산책할 겸 구경하다 온 건데. 너무 곤히 자길래 깨우지도 못 했어.”
그러면서 그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흔들었다.
“오는 길에 커피랑 빵도 사왔는데.”
“아…….”
그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설마 내가 두고 간 줄 알았어?”
“아니, 일어나 보니 흔적도 없길래.”
“그래서 울었고?”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냥…….”
이서가 말을 잇지 못하자 최 원은 손에 쥐고 있던 커피와 빵을 탁자에 내려놓고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최 원은 큰 손으로 이서의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내가 그 정도로 쓰레기는 아닌데.”
“누가 그런 말을 했어요?”
“내가 혼자 가 버렸다고 생각했으면서.”
“그게 아니라 전화도 안 받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길래…….”
“전화?”
그는 이서에게서 살짝 몸을 떼고 코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정이서, 부재중 4통.’
액정에 뜬 그녀의 이름을 보고선 그가 아차 했다.
“어제 무음으로 해놓은 걸 깜빡 했네.”
이서는 그제야 생각났다.
밤새 눈 구경이나 실컷 하며 누구의 전화도 받고 싶지 않다면서 그가 핸드폰을 무음으로 설정해 두었던 걸.
그것도 깜빡한 채 그가 절 두고 간 줄 알고 엉엉 울었다니.
이서는 제가 어린아이라도 된 것 같아 민망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변한 제 자신이 창피하고 낯설었다.
이서는 민망한 마음에 코를 씰룩이다 문득 물었다.
“그런데 왜 말 놔요?”
이서의 허리를 안고 있던 최 원이 그 물음에 눈썹을 치켜 올렸다.
“어제부터 계속 놨는데. 그땐 아무 말 않더니?”
“……그야 어젠.”
“어젠?”
“어젠 분위기가 그랬으니까.”
“왜? 어제랑 분위기가 다를 게 뭔데?”
그가 이서를 놀리듯 말꼬리를 잡고 물었다.
“어젠…….”
적당한 말을 찾던 이서는 실실거리고 있는 최 원을 보고 어깨를 툭 쳤다.
“지금 나 놀리는 거죠?!”
“아니, 어제랑 분위기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해서.”
“놔요.”
이서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그는 어림도 없다는 듯 이서를 번쩍 안아들었다.
샤워 가운 밑으로 드러난 이서의 두 다리가 자연스레 그의 허리를 안았다.
어젯밤 계속 그를 그렇게 안았던 것처럼.
두 사람의 숨결에 사그라들었다고 생각했던 불씨가 다시 훨훨 살아났다.
최 원은 이서를 침대에 눕히곤 입고 있던 코트를 툭 벗어 던졌다.
그가 침대에 누운 이서를 내려다보며 씩 웃어 보였다.
“이런 널 두고 내가 어떻게 발이 떨어지겠어.”
밤새 네 숨소리에도 몸이 달아 찬바람을 맞으며 밖에 있었던 거지.
몇 시간 동안 정신을 다잡았는데…….
“이제 정이서 네 옆에만 가도 내 몸이 고장나는 거 같아.”
이건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잡아야 할지 감이 안 올 정도로.
하지만 지금은 피하고 싶진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된 거, 성이 찰 정도로 정이서를 취해야지.
그가 제 셔츠 단추를 툭툭 풀며 침대 위에 올라갔다.
셔츠 뒤로 드러난 그의 조각 같은 몸에 이서도 다시 긴장했다.
하지만 이서 역시도 그를 원했기에 제게 스미는 그를 순순히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