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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24/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24화

폭설 속으로 나랑 갈래?

전화를 끊은 후, 10분도 되지 않아 그가 나타났다.

거리에 서 있던 이서는 최 원의 차를 바로 알아봤다.

차에 타자마자 최 원이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이서는 따뜻한 차 안 공기에 몸을 녹이며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

“대표님이랑 저녁 식사했어요.”

대답하자마자 아차 싶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어요? 그러면 저랑…….”

하지만 이미 이서가 이재영과  저녁 식사를 했다는 걸 그가 알아버린 뒤였다.

“아뇨, 난 괜찮아요. 이미 배부를 텐데요, 뭐.”

그렇게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질투심이 역력했다.

“이재영 대표랑 둘이 저녁도 해요? 꽤 친해 보이네요.”

이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드렸다.

“그런데 이 대표는 모르나 봐요?”

“네? 어떤 걸요?”

“이 회장이 이서 씨한테 어떤 숙제를 내 줬는지.”

제 아버지가 얼마나 야비한 인간인지 아들인 이재영도 알아야 하지 않나?

말 없는 이서를 보니 이 회장은 여전한 것 같았다.

멍청한 제 새끼만 싸고도는 그 천박한 부성애가 말이다.

또 이재영은 정이서가 무엇을 감수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갖은 생색은 다 낼 거고.

최 원은 굳이 보지 않아도 그러한 상황들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밑에서 겨우 버티고 있을 정이서도 눈에 훤했다.

마치 이 회장을 경험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의 차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대교를 지났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진 여느 남녀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그때 작게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기상 특보를 전했다.

[오늘 자정부터 강원도에 폭설이 내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폭설은 내일 새벽이면 잦아들겠지만…….]

기상 특보를 듣던 최 원이 뭔가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우리 강원도 갈래요?”

“네?!”

그의 뜬금없는 제안에 놀란 이서가 되물었다.

“지금요?!”

“네, 지금.”

폭설이 온다는데 지금 강원도를 가자고?

보통 기상이 안 좋으면 피하기 마련인데.

사납게 눈발이 날릴 곳으로 굳이 가자고 하는 그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그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눈 구경도 간만이지 않아요? 천천히 눈 쌓이는 거 보면서 머리도 비울 수 있고.”

황당한 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광경이 보고 싶기도 했다.

소리 없이 조용히 내린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풍경을.

폭설이 세상뿐만 아니라 제 머릿속도 포근히 덮어줄 것 같아서.

그곳에선 왜인지 모르게 아무도 절 찾지 않을 것 같아서.

이서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가 보죠.”

이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최 원이 차를 돌렸다.

고속도로 쪽으로 빠지는 도로를 타며 이서는 진짜 강원도를 가는 거구나 실감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즉흥 여행.

그것도 아직은 낯선 남자와 단둘이 떠나는 즉흥 여행은 확실히 떨리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이서는 가보고 싶었다.

눈이 펑펑 쌓인 강원도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했고.

그와 보내는 밤은 어떨지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으니까.

강원도, 강릉.

강릉에 들어오자마자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새까만 밤하늘에 하얀 눈송이가 별처럼 쏟아지자 절로 감탄이 터졌다.

“와, 예쁘다.”

서울에서 보던 눈과는 어쩐지 분위기부터 다른 것 같았다.

도시에 질퍽하게 떨어지는 눈과 달리 이곳의 눈은 땅에 내려와서도 새하얗고 빛이 났다.

나뭇가지와 지붕 위, 그리고 길 곳곳에도 내려앉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서는 추위를 잊었는지 차창을 열고 목을 길게 뺐다.

깊게 들이마시는 공기에서 차가운 눈 냄새와 함께 짭조름한 바다향도 느껴지는 듯했다.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 답답했던 속이 시원해졌다.

해수욕장 앞에 차를 세운 최 원은 내리기 전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의 목이 훤한 게 마음이 쓰였는지 뒷좌석에 있던 제 목도리를 꺼냈다.

“어, 괜찮은데. 대표님 하세요.”

“이서 씨가 해요. 괜히 감기까지 걸리면 내가 속상하니까.”

최 원은 마치 제 목인 양 이서의 목에 야무지게 목도리를 둘러줬다.

마치 그가 제 목을 끌어안고 있는 듯, 턱 밑에서 그의 향기가 물씬 올라왔다.

또 썰렁하던 목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온기가 좋아 저도 몰래 웃음을 보였다.

이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가 앞으로 달려왔다.

“굽 높은 구두 신었으니까 내 손 잡아요. 눈이 쌓여서 미끄러워요.”

거절이 습관인 이서가 괜찮다고 할까 봐 그가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서는 미처 거절할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그와 손까지 맞잡게 되었다.

이서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서와 달리 그는 혹여 이서가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이서의 한 발 한 발에 집중했다.

그 역시 구두를 신고 있어 미끄러울 법 했으나, 그가 먼저 눈 위에 발을 내딛고 제 발자국이 찍힌 자리에 이서가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배려했다.

이서는 그렇게 그의 각별한 배려 속에서 눈 쌓인 모래사장을 어렵지 않게 걸었다.

새하얗게 눈이 쌓인 모래사장 위.

분명 사람은 둘이었지만 눈 위에 남아 있는 건 한 사람의 뿐이었다.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는 두 사람만의 이야기를 꽁꽁 감춰 주었다.

코끝이 얼얼할 정도로 추운 겨울 바다.

한바탕 내리는 눈과 거친 바람에 뼈가 시릴 정도로 추웠지만, 두 사람의 얼굴엔 웃음꽃이 만개해 있었다.

그리 웃기는 대화도 아닌데도 두 사람은 서로 눈만 마주쳐도 소리 내어 웃었다.

맞잡은 두 손에는 추위도 물리칠 만큼 훈훈한 열기가 감돌았다.

싸늘한 겨울이 민망해 할 정도로 두 사람에겐 봄기운이 가득했다.

그렇게 끝없는 모래사장 위를 한창 걷던 중.

갑자기 무슨 생각이었을까?

이서는 그의 손을 놓고선 무작정 바다 쪽으로 뛰어갔다.

놀란 최 원이 짧게 소리쳤지만 이서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매서운 파도를 맨몸으로 맞을 기세로 거침없이 달렸다.

그 역시 바로 이서의 뒤를 빠르게 쫓았다.

푹신한 눈 위를 지나 파도가 쓸고 간 곳은 질퍽했다.

이서는 그 위에 서서 어깨를 들썩였다.

파도가 이서의 발을 덮칠 듯하자 최 원이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안고 들어올렸다.

그리곤 이서의 몸에 족쇄를 채우듯 제 품에 꼭 안았다.

이서가 웃음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젖기라도 할까 봐 그렇게 걱정돼요?”

정말 제 속도 모르고.

왜인지 사실 더 안 좋은 상상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별 말 없이 그녀를 더 세게 안았다.

제가 이렇게 꽁꽁 묶지 않으면 큰 사고라도 벌어질 것 같아서.

그냥…… 이렇게 안아줘야 할 거 같았다.

제 허리를 감싼 그의 팔에 힘이 세게 들어가자 이서가 말했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걱정 안 해요.”

“왜요? 내가 바로 바다로 뛰어들 거 같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서는 몸을 비틀어 그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이서의 얼굴엔 장난기가 가득했지만 그럼에도 그는 긴장했다.

그런 그를 놀리려는 듯, 이서가 휙 몸을 돌려 앞으로 도망갔다.

최 원 역시 바쁘게 이서를 쫓아왔다.

이서는 눈을 한 움큼 쥐어 들었다.

“조심해요.”

뒤에서 쫓아오던 그가 말했다.

이서가 어깨를 으쓱이며 그에게 눈을 던졌다.

그는 잽싼 순발력으로 이서가 던지는 눈을 족족 피했다.

어느새 눈싸움이 시작된 바다.

이서는 무아지경으로 눈싸움에 빠졌고, 최 원은 눈을 피하며 어떻게든 그녀를 잡으려 했다.

이서의 어린아이 같은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와 어우러질 때쯤.

“으앗!”

아니나 다를까 이서의 몸이 뒤로 기우뚱 넘어갔다.

그에 최 원이 빠르게 그녀 쪽으로 달려가 손을 뻗었다.

허공에 뻗친 그녀의 손을 잡긴 잡았는데.

한 발 늦은 건지, 최 원은 그녀에게 이끌려 함께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눈 위에 뒤통수를 박고 누운 이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행히 모래사장 위로 쏟아져 머리가 아프진 않았지만, 무슨 일인지 몸 위가 묵직했다.

이서가 눈을 뜨자 그가 그녀의 허리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로 제 상체를 팔로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역시 당황한 얼굴로 이서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눈 위에 쏟아져 내린 윤기 나는 긴 머리.

또 눈처럼 새하얀 얼굴 위에 꽃이 핀 듯 예쁜 홍조까지.

그런 색의 대비 때문일까?

어둠 속에서 그녀의 아름다움도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눈 안엔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그가 숨을 삼키며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게, 조심하라고 했잖아.”

그 순간 유독 그녀의 붉은 입술이 눈에 띄었다.

무슨 생각이었을까?

평소엔 계산된 행동이 아니면 절대 하지 않던 그였건만.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키스했다.

그것도 아주 거칠게.

이서를 잡아먹기라도 할 듯 거칠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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