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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23화

오빠 아니라 도련님

재영이 이서를 데려간 곳은 유명 셰프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이었다.

예약도 어렵다는 이곳에 저를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서가 의문스럽다는 듯 재영을 보자 그가 뿌듯한 얼굴을 했다.

“감동 받을 필요는 없어.”

감동?

이게 감동 받은 사람 표정으로 보이나?

대체 왜 이러는 건지 궁금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제가 보고 싶은 대로만 보는 이재영이었다.

“이 셰프 알지? 요즘 요리 프로그램에도 많이 나오는 그 셰프 레스토랑이야. 여기 일반 사람들이 오려면 두 달은 기다려야 된다.”

그는 메뉴판을 들고서 계속 떠들어댔다.

그 장황한 말, 결론은 이거였다.

“나니까 바로 자리 준 거고.”

“네, 대표님. 대단하세요.”

이서는 영혼 없이 대꾸했다.

그럼에도 재영은 계속 우쭐거리며 말했다.

“앞으로 내가 널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서는 재영이 계속 제 잘난 맛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제 제 모습을 보고 절 불쌍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걸 보고 되지도 않는 동정을 품는 건 더 참아 줄 수가 없었다.

“어제 그렇게 우는 거 보니까 마음이 안 좋더라고. 네 사정 뻔히 아는데 내가 너무 일만 시킨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이서는 재영이 대놓고 저를 가엽게 여기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태도가 상대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이재영은 죽어도 모르겠지?

“앞으로 네가 내 옆에서 편하게 일했으면 좋겠어. 나를 친오빠라고 생각하고 뭐든 힘든 일 있으면 말해.”

하다하다 친오빠?

15년 동안 그들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또 절 어떻게 대했는지 잊어버린 걸까?

그걸 기억한다면 제게 ‘친오빠’라는 말은 절대 못할 텐데.

“대표님, 저 정말 괜찮습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안 써 주셔도 돼요.”

“아냐,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신경 써 주겠냐?”

“아, 아뇨. 저 정말 괜찮아요.”

이서가 계속 사양하자 재영의 안색이 변했다.

“이서야, 사람이 호의를 베풀면 그냥 ‘네’ 하면 좋잖아. 왜 끝까지 ‘네’란 말을 못 해?”

“정말 괜찮으니까요. 대표님 안 그래도 바쁘신데 저까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부담스럽고요.”

“하, 진짜.”

재영은 메뉴판을 내려놓고선 눈을 꾹 감았다.

아무래도 좋은 사람 컨셉도 쉽지 않은 것 같았다.

평소에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배려심 깊은 인간의 가면을 쓰는 게 어디 쉬울까.

“넌 내가 잘 해 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

이서는 이제야 이재영이 제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이 한결 놓였다.

느끼한 말들로 저를 괴롭게 하는 것보다 이렇게 사사건건 짜증내고 제멋대로 구는 게 오히려 편했으니까.

“이러니까 내가 너한테 상냥하게 못 굴었던 거야. 사람이 마음을 쓰면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지. 넌 이렇게 꼭 삐딱선을 타잖아.”

자기 성격이 애초에 저 모양인 것도 제 탓을 하다니.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사려 깊지 못했습니다.”

“앞으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도움 필요하면 도와달라고 말하라고. 왜 괜히 옆에 있는 사람까지 나쁜 사람을 만들어?”

가만히 그 이야기를 듣던 이서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실소했다.

그 웃음에 재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여기 웃을 타이밍 아닌데 왜 웃어?”

저도 찔리긴 하는 걸까.

이서는 괜히 화부터 내는 이재영이 웃겼다.

이 와중에 자신을 나쁜 사람 만들었다며 역으로 이서를 탓하는 게 이재영다워서.

착한 척을 하려 해도 이재영은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웃음이 난 거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재영은 그 대답에 또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모든 걸 초탈한 듯, 제 말에 성의 없이 대답하는 정이서가 기분 나빴다.

재영은 끓어오르는 화를 죽이려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안 그래도 벼랑 끝에 몰린 앤데.

저까지 꼬치꼬치 따져 물을 필요는 없지.

저는 정이서와 달리 여유롭고 마음 넓은 인간이니까.

“그래. 우선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밥부터 먹자. 뭐 먹을래?”

그 말에 이서는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뉴판엔 듣도 보도 못한 요리가 잔뜩 적혀 있었다.

사실 이서는 이런 것들보다 어제 먹었던 그 전복죽이 떠올랐다.

헛헛했던 속을 금세 따뜻하고 든든하게 채워줬던 그 전복죽이.

“어? 뭐 먹을 거냐니까? 맛있는 거 많아서 고민하는 거야? 다 시킬까?”

“아뇨, 저는 파스타면 될 것 같습니다.”

이서는 만만한 메뉴를 골랐다.

하지만 이재영은 그런 것조차 짜증이 나는지 인상을 구겼다.

“더 맛있는 거 많잖아. 스테이크 종류도 많이 있고.”

“그래도 전…….”

“아, 진짜 답답하네. 주문할게요.”

재영은 한숨을 쉬며 뒤에 있던 점원을 불렀다.

그리곤 파스타를 먹겠다는 이서의 말은 깡그리 무시한 채, 무겁고 비싼 음식들만 잔뜩 시켰다.

“힘들 땐 단백질을 먹어야지. 파스타로 되겠냐?”

재영이 만족스러운 듯이 말했다. 이서는 이제 따로 대꾸도 안 했다.

이렇게 제 마음대로 할 거면 다른 사람이나 불러서 먹지.

괜히 마음도 없는 사람 불러 앉혀선 신종 고문이나 하고.

재영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계속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재영의 말을 듣느라 이서는 스프조차 제대로 입에 넣지 못했다.

“그러니까 힘든 일 있으면 서로 도와야지. 내가 그동안 오빠로서 너 많이 도와줬잖아.”

‘오빠’라는 말에 더 참을 수 없어진 이서가 입을 열었다.

“도련님.”

“왜?”

이서의 ‘도련님’이라는 호칭에 자연스럽게 대답한 재영이 인상을 썼다.

“아, 진짜 무슨 도련님이야.”

“저한텐 계속 도련님이셨는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성의 없던 이서의 말이 냉담해졌다.

“사람에겐 각자의 위치가 있는 법이라고 회장님께 배웠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도련님을 오빠라고 부르겠어요?”

그동안 재한에서 정이서에게 강요했던 것들을, 이번엔 이서가 재영에게 정확히 일렀다.

재영은 손을 멈췄다.

이서의 뼈 있는 말에 다시 화를 내려 했는데.

문득 오래 전 이서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 오빠? 내가 왜 네 오빠야? 한 집에 살면 너랑 나랑 가족이라도 되는 거 같냐? 넌 하인이고 난 주인이야. 그러니까 나한테 깍듯하게 도련님이라고 불러. 또 오빠라고 부르면서 나한테 친한 척하면 네 아빠랑 여기서 내쫓길 줄 알아.’

그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서가 저를 ‘오빠’라고 부를 때마다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을 듣던 어린 이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재영은 순간 목구멍으로 넘겼던 음식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굳이 그걸 인정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재영은 모른 척 하며 뻔뻔하게 입을 뗐다.

“네가 날 도련님이라고 부르긴 했어도. 난 항상 널 친동생처럼 대했잖아.”

이서는 안 그래도 없던 밥맛까지 뚝 떨어졌다.

이서가 아무 말 없이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재영을 바라보았다.

언제 저를 친동생처럼 대했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재영이 그 표정에 발끈했다.

“왜?! 내가 뭘 못 해 줬는데. 내가 너한테…….”

그런데 무슨 일인지 재영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지금 여기서 끊기면 안 되는데.

그런데 왜지?

왜 할 말이 없는 거지?

분명 저는 정이서한테 못 해 준 게 없는데.

“그러니까…….”

재영은 혀라도 마비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적절한 때에 다가온 점원이 물었다.

“음식은 입에 맞으십니까?”

재영은 옳다구나 싶어 재빨리 대답했다.

“너무 맛있네요. 셰프한테 아주 만족한다고 전해 주세요. 이서 너는? 너는 어때?”

그에 이서는 재영을 흘기다 대답했다.

“제 입에도 아주 맛있습니다.”

웨이터는 웃음을 남기고 테이블을 떠났다.

그리고 둘 사이에 깊은 정적이 찾아왔다.

재영이 바쁘게 기억을 되짚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정이서에게 잘 해 줬던 게 분명 있는데.

하지만 머릿속에 지우개라도 있는 듯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정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머릿속이 깨끗했다.

방금 전만 해도 바쁘게 떠들던 재영의 입이 꾹 닫혔다.

어찌됐건 이서는 조용히 식사를 할 수 있어 만족했다.

* * *

엄마는 여전히 산소 호흡기를 쓴 채로 의식이 없었다.

이서는 엄마의 차가운 손을 붙잡고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엄마와 저에게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며.

중환자실 면회 시간이 끝난 후, 이서는 병원을 나섰다.

이서의 긴 한숨이 희뿌연 자취를 남기며 하늘 위로 날아갔다.

이서는 제 한숨이 흩어진 밤하늘을 보며 코트를 더욱 단단히 여몄다.

이 겨울밤을 홀로 버티기 위한 각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때, 이서의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앞으로 나아가던 이서의 발이 제자리에 멈췄다.

이서는 코트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바로 꺼내 보았다.

‘LIMS 최 원 대표님’

온종일 이서를 심란하게 했던 그가 드디어 연락을 준 거다.

그 이름을 보자마자 이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서는 제가 그의 전화를 이토록 기다렸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서는 숨을 고르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디에요?

“아, 저…… 집에 가고 있었어요.”

-그래요? 나도 이제 퇴근했는데.

그가 퇴근했다는 말에 왜 제가 설레는지.

이서는 입꼬리를 올리며 그가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만날래요?

저번에 그가 부탁했던 말이 떠올랐다.

보고 싶을 때, 언제든 찾아가도 되냐던 그 말.

이서가 뜸들이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네,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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