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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20/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20화

나한텐 묻지 말고 다가와.

갑작스럽게 부여된 사명이지만 그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어쩌면 제가 느끼지 못했을 뿐, 이미 자신은 이서에게 친오빠 같은 존재일지도 몰랐다.

처음 정이서를 만났던 순간을 떠올려 보자.

야무진 얼굴을 한 꼬마는 저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이렇게 불렀다.

‘오빠!’

그래, 오빠라고.

이서는 처음부터 저를 친오빠처럼 생각한 거다.

그리고 저 역시도 무의식적으로 정이서를 애틋하게 생각했었던 거고.

걸 깨닫고 나니 이재영은 제가 이서를 위해 발 벗고 나설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이서가 돌아왔다.

그에 재영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불렀다.

“이서야!”

이 회장과 자리가 끝난 후, 정신없이 걷던 이서가 그 소리에 멈칫했다.

뭐라고?

처음엔 아빠가 절 부른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이재영이 부른 거였다.

‘이서야’라고.

이서는 들어선 안 될 말이라도 들은 양 이맛살을 구겼다.

반면 재곤은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제게 차마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저 난감하고 초조한 얼굴로 이서를 빤히 바라볼 뿐.

재영은 이서의 살벌한 기운에도 굴하지 않고 물었다.

“괜찮아? 아버지한테 많이 혼났어?”

그러면서 재영은 그녀의 어깨에 팔까지 두르려 했다.

하지만 이서는 그 틈을 용납하지 않고 곧장 한 발 물러섰다.

재영과는 손끝조차 스치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예전 같았으면 이서의 이런 반응에 재영도 성을 냈을 텐데.

조금 전 오빠로서의 책임감으로 중무장한 재영에게 이런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니었다.

“아버지가 크게 뭐라고 하셨어? 너무 걱정하지 마. 오빠가 잘 말씀드릴게.”

이서는 이번엔 미간을 좁혔다.

제게 친한 척하며 ‘이서야’하고 부른 것도 화가 나는데.

이제 뭐라고?

오빠라고?

게다가 저만 믿으라는 저 얼굴은 또 뭐야.

안 그래도 이 회장의 민낯을 보고 온 이서였기에 이재영이 답지 않게 착한 척을 해대는 것도 못마땅했다.

하지만 이재영은 그런 이서의 마음도 모른 채 함부로 얼굴을 붉혔다.

한 번도 제 자신을 ‘오빠’라고 지칭해 본 적 없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보니 나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회장님이랑 저는 이야기 끝났습니다. 대표님께서 따로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이서는 이재영의 달라진 태도에 대해 묻기도 싫어 곧장 선을 그었다.

“어?! 끝? 무슨 끝?”

재영이 재차 되물었지만 이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쫓아오는 재영에게 이서가 귀찮다는 듯 말했다.

“전 회장님이 따로 시키신 일이 있어서 지금 나가봐야 합니다.”

“아버지가 따로? 지금?!”

”네, 전 맡기신 일 끝내고 바로 회사로 복귀하겠습니다.”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이서가 타려고 하자 재영이 허둥지둥했다.

“아, 잠깐! 외투도 없이 어딜 가려고 그래?”

그는 자신이 입고 있던 코드를 재빨리 벗었다. 그리고 이서의 어깨에 멋지게 올려주려고 했는데.

“야! 정이서!”

이서는 그런 재영의 호의도 무시한 채 닫힘 버튼을 눌렀다.

코트를 들고 있던 재영은 이서가 사라지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 옷 가져가래도!”

하지만 이서는 귓구멍이라도 막힌 양 쌩하니 내려가 버렸다.

재영은 멍청한 얼굴로 그 자리에 서서 코트를 들고 있었다.

“아니, 오빠가 옷을 벗어주면 입어야지.”

재영은 다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이쯤 하면 오빠 놀이에 흥미가 떨어질 만도 했는데.

“나 추울까 봐 옷도 안 받네.”

이상한 착각과 더불어.

“그럼 갔다 오면 저녁이라도 사줘야지.”

여전히 이서를 걱정하는 오빠 역할에 흠뻑 심취하고 있었다.

병원 밖으로 나오자마자 억센 바람이 이서를 할퀴고 지나갔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 모두 절로 몸을 웅크렸지만, 외투도 입지 않은 이서는 추위도 느껴지지 않는 양 곧은 자세로 걸었다.

버텨야 한다, 버텨야 해…….

아직도 엄마를 생각하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지금 눈물을 흘리며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이서는 우선 무작정 택시에 올라탔다.

“어서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이서가 조용히 말했다.

“우선 출발해주세요.”

“네?”

“제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요. 목적지가 생기면 말씀드릴 테니 우선 어디든 가 주세요.”

택시 기사는 의아했지만 곧 차를 움직였다.

이서는 묵묵히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얼굴과 달리 여전히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네가 널 재영이 옆에 둔 이유를 아니?”

방금 전, 병원장실에서 이 회장은 이서에게 큰 숙제를 내주었다.

무려 엄마의 약을 걸고서 말이다.

이 회장은 결연한 이서를 보며 말했다.

“너보다 더 능력 좋은 비서들은 얼마든지 있다.”

기분이 좋진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저보다 능력 있는 비서들은 재한 그룹 안에서도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재영이 옆에 널 둔 이유는 그저 어렸을 때부터 네가 재영이를 잘 따랐기 때문이야.”

그것 또한 예상했던 일이었다.

능력 있는 비서들은 많겠지만, 이재영을 하나부터 열까지 맞춰 줄 비서는 찾지 못했겠지.

어렸을 적부터 이재영을 도련님처럼 받들어 모신 정이서였다.

이서가 이재영에게 맞춤 제작된 비서라서 재한에서도 이서를 계속 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재한에 불순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 같은데. 이런 널 계속 재영이 옆에 둬야 할까?”

이서는 따로 토를 달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가진 적 없다고 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괜히 말을 보태 또 불호령을 듣고 싶진 않았다.

“재한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너한테 네 엄마 약까지 우리가 줘야 하고?”

“제가 어떻게 해야 회장님께서 제 마음을 믿어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회장은 이서가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그제야 웃음 지었다.

“요즘 재한 시큐리티에 정체 모를 놈이 어슬렁거린다며. 두바이 뱅크도 그놈이 가로채고.”

저건 분명 최 원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여기서 그의 이름이 나오자 이서는 더욱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최 원. 또 최 원일까.

얄궂은 운명을 원망하며 말이다.

“뭐 하는지도 모르는 똥파리가 왔다 갔다 거리는데. 가만히 손 놓고 있는 비서가 어디 있니?”

“이번에 최 원 대표가 모자이크 취약점을 보완할 패치를 만들어 줬습니다. 그렇게 의심을 품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둔한 것. 아무런 목적 없이 대뜸 그걸 만들어 주겠니? 게다가 뭐 하는 줄도 모르는 놈이 준 건데 그걸 어떻게 믿고 써.”

이주협 회장은 이서를 다그쳤다.

“재영이한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내가 판단한다. 넌 수상한 놈들 뒷조사를 잘 하면 되고.”

이 회장이 쐐기를 박듯, 손가락으로 이서를 가리켰다.

“네 엄마를 살리고 싶으면 네 자질을 증명해.”

이서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해커들조차 그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일반인인 제가 어떻게 그 남자의 정보를 샅샅이 긁어모으겠는가.

그럼에도 딱 하나의 방법.

어제 저녁 그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에 대해서 궁금한 건 뭐든 알려줄 수 있으니까…….’

그는 자신에 대해 뭐든 알려줄 수 있다고 했다.

물론 그가 말했던 건 남자 최 원에 대한 걸 거다.

해커로서 그가 뭘 했던 사람인지, 위험한 사람은 아닌지 뒷조사를 도와주겠다는 게 아니라.

이서는 속으로 갈등하며 끙 소리를 냈다.

“그런 걸 나한테 알려줄 일도 없고.”

제 꿍꿍이를 숨기고 그에게 다가간다면 또 모를까.

하지만 제게 호의를 가지고 다가온 사람인데. 그런 그를 속이고 이용할 수 있을까.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사람으로서 하면 안 되는 짓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엄마가 중환자실에 있는 이 상황에서 다른 방법이 있을까?

이서의 마음속에 갈등이 일었다.

그를 속일 자신이 없었지만, 엄마를 포기할 용기는 더욱 없었다.

결국 이서가 핸드폰을 들었다.

‘최 원 대표님’

마음을 굳게 먹은 이서는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신호음보다 제 심장소리가 더 요란하게 들렸다.

그리고 얼마 안 가 그가 전화를 받았다.

-더 오래 고민할 줄 알았는데 연락이 빨리 왔네요.

이서는 제 입술을 씹다가 말했다.

“대표님, 오늘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오늘요?

“네, 오늘…….”

-그럼요, 얼마든지.

그가 기분 좋게 웃으며 말했다.

-나 만나고 싶으면 묻지 말고 찾아와요.

정이서한텐 언제든 문이 열려 있다는 듯한 그의 말에 이서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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