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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19/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19화

이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회장님, 제가 알아듣게 잘 설명하겠습니다.”

정재곤이 서둘러 말했지만, 이주협은 싸늘했다.

“내가 정 비서랑 따로 이야기를 한다는데. 정 실장이 왜 끼어들지?”

그 말에 정재곤도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재영 역시 아버지의 기세에 눌려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따라오지.”

그 말만 남기고서 이주협은 발길을 돌렸다.

이서 옆에 있던 현주도 굳은 얼굴이었다.

고압적인 인간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존재 자체만으로 숨이 턱 막힐 줄이야.

하지만 이서는 오히려 덤덤히 그 뒤를 따랐다.

“이서야, 괜찮겠어?”

현주의 말에 이서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우리 엄마 좀 잘 봐줘, 현주야.”

“그건 걱정 말고. 네 걱정만 해.”

현주는 이런 때 아무 말도 없는 이재영이 그저 한심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한 마디 해 주면 좀 나을 텐데. 아무리 아버지가 무섭다고 한들 그저 눈치만 슬슬 보고 있는 이재영의 꼴에 현주의 속이 뒤집혔다.

저런 걸 대표라고 오랫동안 모셔 왔을 이서가 짠했다.

정작 이서는 이런 상황이 익숙했다.

아버지마저도 한숨만 뱉을 뿐, 딸을 위해 나서지 않는데 애초에 이재영에게 기대를 할 리 만무했다.

여기서 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묵묵히 이 회장을 따랐다.

이주협 회장이 들어간 곳은 병원장실이었다.

이 회장의 등장에 병원장은 인사만 남기고 부리나케 제 방을 비워줬다.

이 회장은 마치 제 자리인 양 상석에 앉으며 말했다.

“앉아라.”

문 앞에 서 있던 이서는 그가 가리킨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어렸을 땐, 이 회장과 단둘이 있는 게 제일 무서웠다.

그의 한숨 한 번에도 그 자리에서 벌벌 떨기 십상이었으니까.

절대 제게 매를 들거나 크게 혼을 내진 않았지만, 그는 사람의 가장 약한 부분을 콕 집어내는데 도가 튼 사람이었다.

어린아이라도 봐주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다 큰 그녀에게 예외를 둘 리가 없었다.

이서를 바라보던 이주협 회장이 핸드폰을 꺼냈다.

그는 이서도 전화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소리를 키웠다.

얼마 안 가 수화기 뒤에선 깍듯한 인사가 전해졌다.

이 회장은 곧장 본론부터 물었다.

“김 이사. 정 실장 와이프 신약. 그거 어디까지 진행됐지?”

-정 실장님 와이프 신약이요?

이 회장은 답답한 듯 재촉했다.

“저번 달에 나한테 직접 보고했던 거 기억 안 나나? 신약후보물질 개발 끝나서 전임상 단계라고.”

-아, 아……. 그렇죠. 맞습니다. 제가 그렇게 보고 드렸죠. 워낙 개발 중인 신약들이 많아서.

“그래서 임상까진 얼마나 걸리지? 한시가 급하니 빨리 서둘러 줬으면 좋겠는데.”

-아, 그게 아무래도 신약 개발이라는 게……. 시기를 장담할 수가 없어서.

“우선 그 약에 총력을 다 해. 일 년 안으로 쓸 수 있게. 모든 인력 동원해서라도. 알겠지?”

-네, 네. 회장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회장은 그 말을 듣고선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이게 대답이 됐냐는 듯 이서를 바라보았다.

이서도 따로 할 말이 없었다.

신약이 개발 중인 건 맞는 것 같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회장이 제게 확인까지 시켜줬으니 약속대로 신약은 나올 것이다.

관건은 그 일 년을 엄마가 버틸 수 있느냐는 건데.

이서는 손을 꼭 잡고선 그저 하늘에 기도할 뿐이었다.

제발, 한 번만…….

제가 뭘 감수해도 좋으니 엄마만큼은 살려달라고 말이다.

“네 질문엔 대답이 됐으니 이젠 내가 너한테 물을 차례지.”

분명 이서는 신께 기도를 드렸는데. 이 회장은 마치 제가 이서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었다.

“네 아버지를 원망하는 건 너희 부녀 일이니 내가 끼어들 일은 아니지만, 넌 왜 재한까지 원망하는 거냐?”

“제가 흥분해서 그랬습니다. 그렇게 들렸다면 죄송합니다.”

이 회장은 한쪽 눈살을 찌푸렸다.

“원래 사람이 사지에 몰릴수록 본심이 드러나는 법이지. 난 그 말이 네 본심이라고 생각한다.”

“아닙니다, 회장님.”

이 회장은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 내 웃었다.

어렸을 땐, 벌벌 떨며 한 마디도 못 하던 게 이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술술.

그동안 너무 오냐오냐한 거다, 제가.

그러니 이렇게 주인 무서운 줄도 모르고 기어오르는 거겠지?

귀엽고 가여워서 매까진 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가만히 손 놓고 있다간 주인도 못 알아보고 덤벼들지도 모른다.

그 전에 본때를 보여주는 게 좋겠지.

“보통 신약 개발에 드는 비용 10조, 들이는 시간은 15년에서 20년 이상. 이 모든 건 내가 정 실장을 믿고 너를 예뻐했기에 했던 투자였다. 그런데 넌 재한을 원망하고 탓해.”

“회장님, 그게…….”

“어디서 토를 달아!”

이를 꽉 깨문 이 회장 앞에서 이서는 모멸감을 느꼈다.

저에게 던지는 말,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이 회장이 저를 개보다 못하게 여기는 게 느껴져서.

평소에 절 딸처럼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이 회장 말마따나 사람의 본심은 이런 때 더 잘 드러나는 거 아니겠는가?

“죽을 뻔한 걸 안쓰러워서 살려줬더니 이제 와서 은혜도 모르고.”

이게 그의 본 모습이었다.

그간 제게 살갑게 대했던 위선에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서는 엄마를 생각하며 잠자코 그 모욕을 견뎠다.

“네가 이따위 마음을 품고 있는데 내가 네 어미 약을 줄 수 있겠니?”

“회장님, 그건 처음부터 저희 아버지랑 약속된 일이었습니다.”

“네 아버지랑 약속? 네가 그동안 받은 것도 잊고 약속을 논해?”

그는 이서의 말이 가당치도 않다는 듯 조소했다.

“난 네 아버지한테 할 만큼 했다. 어린 널 데리고 빚쟁이들한테 쫓겨 도망 온 걸 흔쾌히 받아준 것도 모자라 널 이만큼 키울 때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지. 그 뿐이냐? 네 아비 앞으로 있는 억대 빚도 갚아줬어. 내가 약 안 내놓는다고 네 아버지가 나한테 뭐라 할 수 있는 입장이냐?”

이서는 입술을 달달 떨었다.

아니다, 분명 그가 약속했다.

재한에서 재한가 사람들을 위해 산다면 엄마를 살려 주겠다고.

아빠에게 그런 약속을 하는 걸 분명히 들었는데!

그런데 이제 와 입을 싹 씻고 다른 말을 하다니.

“약을 받고 싶니? 그럼 그에 상응하는 노력을 해야지. 이서야.”

끔찍한 사실은 그가 휘두르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이 꼴을 보고도 이주협 회장을 따라야 한다니.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서에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서의 마음을 읽었는지 이주협의 입술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 * *

“괜찮겠죠?”

재영은 초조한 듯 복도를 어슬렁거렸다.

의자에 앉아 있던 정재곤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괜찮을 리가.

15년 간 이주협의 옆에 있었던 정재곤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그가 이서에게 무슨 말을 할지 생각하면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저로도 충분한데, 저만 감수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 제 딸에게까지 이 굴레를 물려줬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정재곤은 딸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자신은 손발이 칭칭 묶인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하, 분위기 보니까 한 소리 들을 것 같던데.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굳이 그러셔야 되나.”

재영은 쪼르르 달려가 가만히 앉아 있는 정재곤 옆에 앉았다.

“많이 혼나진 않겠죠? 아저씨.”

재곤이 쓰게 웃었다.

“글쎄요.”

“제가 잠깐 다녀올까요? 그래도 제가 말씀드리면 기분이 풀리실 거 같은데.”

그 말에 정재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히 이재영이 어설프게 끼어들었다간 이 회장의 화만 더 돋울 수 있었다.

“이서 마음잡으라고 회장님께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하시는 것뿐입니다. 괜찮아요.”

“그래도…….”

정재곤은 제 마음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결국 재영의 손까지 잡았다.

“도련님. 우리 이서가 살갑진 못해도 도련님만큼은 진심으로 모셨습니다. 정말 도련님을 가족처럼 생각하고 정성으로 모신 거 알고 계시죠?”

재영은 그 말에 놀랐지만, 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제 옆에 있던 정이서였다.

살갑진 못해도 그동안 동고동락하며 보낸 시간을 어떻게 무시할 수 있을까.

“알죠. 제가 어떻게 모르겠어요.”

“저와 제 아내 없으면 이서는 이 세상에 혼자입니다.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애예요.”

재영은 목 놓아 울던 이서를 떠올렸다.

평소엔 감정 따윈 없는 목석같이 굴어 몰랐는데.

이제 보니 평범한 여자들과 다름없이 여리고 약한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의지할 곳이 필요한 것 같았다.

“도련님. 이런 말씀 듣는 게 부담스러우실지 모르지만 저희 이서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없으면 도련님이라도 꼭…….”

“아저씨. 왜 그렇게 약한 소리를 하세요. 아저씨가 계시면 되는데.”

아니, 가만…….

이서에게 정말 필요한 건 제 넓은 가슴과 힘이 아닐까.

실상 정 실장보단 재한의 후계자인 제가 더 의지가 될 텐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자 재영은 저와 이서 사이가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대표와 비서의 사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서로 의지해 온 가족 같은 사이.

아니, 그것도 아니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저씨. 걱정 마세요.”

순간 재영의 눈빛이 사뭇 비장해졌다.

꼭 정재곤의 사위라도 된 것처럼 그의 손을 꽉 잡은 재영이 말했다.

“이서,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책임?

정재곤은 재영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엉뚱하니 큰 뜻 없을 거라 생각하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반면 재영은 책임감을 느꼈다.

그래, 책임.

정이서를 책임질 수 있는 건 저 하나뿐.

이제 정이서가 고통 받지 않게 제가 책임지고 도울 생각이었다.

책임…….

그 말을 곱씹던 재영의 얼굴이 더없이 발그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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