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18화
그녀의 작은 어깨
“대, 대표님. 저 지금 가봐야 할 거 같습니다.”
아까와 달리 이서는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에 멀뚱히 앉아 있던 재영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뭔데?”
방금 전, 이서에게 어젯밤에 울었냐며 장난 섞인 말투로 추궁하던 것과 달리 재영은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왜?”
이서의 마른 몸이 파르르 떨리자 재영은 겁까지 날 정도였다.
정이서는 감정이 없는 인간이었다.
물론 어릴 때엔 엉엉 울며 제게 악을 쓸 때도 많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론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인 적 없는데.
재영의 두 손이 이서의 어깨 위에서 멈칫했다.
한들거리는 하얀 블라우스 밑으로 보이는 이서의 어깨가 오늘따라 더 여려 보여서.
제 작은 손길에도 으스러질 것만 같아, 함부로 만질 수도 없었다.
재영은 고개까지 숙여가며 다시금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차분하게 말해 봐.”
큰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하던 이서가 한숨을 터트리듯 말했다.
“엄마가…… 엄마가.”
이서의 입에서 나오는 ‘엄마’라는 단어에 재영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재영의 머릿속 이서의 엄마는 늘 아픈 사람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불치병을 앓고 있고, 재한 제약에서 그 약이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
언제든 최악의 상황이 닥칠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오늘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재영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서가 더 말을 잇지 못하자 재영이 얼른 제 외투를 챙겼다.
“우선 가자. 가서 확인해.”
재영의 말에 이서가 고개를 저었다.
“저, 저 혼자 다녀올게요. 병원 간다고 말씀드리고 가려고…….”
재영은 이 와중에도 비서 노릇하려는 정이서가 답답해서 버럭 화를 냈다.
“넌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중요해? 그리고 이 정신으로 어떻게 혼자 간다는 거야. 제발 좀!”
코트를 입은 재영은 답답한 마음에 거칠게 이서의 손목을 낚아챘다.
평소 같았으면 이서도 그를 극구 말렸겠지만.
당장은 머릿속에 핵폭탄이 터진 것 같아 이서도 여러가질 따질 경황이 없었다.
이서는 그저 재영이 이끄는 대로 따라갈 뿐이었다.
“현주야. 엄마는? 엄마는 괜찮아?”
중환자실 앞.
이서는 현주를 발견하자마자 엄마부터 찾았다.
현주는 덜덜 떨고 있는 이서를 보며 말했다.
“아침부터 계속 발작을 하시더니 아예 의식을 잃으셨어. 지금 중환자실에 계신데……. 미안하다, 이서야.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유일하게 잡고 있던 희망의 끈이 탁 끊기는 것 같았다.
이서가 휘청거리자 뒤에 있던 재영이 바로 그녀를 잡았다.
“이서야!”
“정이서. 괜찮아?”
재영은 제 몸으로 이서의 등을 단단히 받쳤다.
처음이었다.
정이서와 이렇게 몸을 가까이 맞댄 건.
바르르한 떨림이 그대로 재영에게 전해졌다.
그녀의 따뜻한 몸을 안고 있으니 느낌이 사뭇 이상했다.
“내 잘못이야, 내가……. 내가 어제 엄마한테 화내면 안 됐는데. 내가 엄마한테 화내서……. 내가 우리 엄마 울려서.”
어젯밤 찾아와 괜히 엄마의 속을 후벼 판 것 같아서.
그냥 차라리 아빠는 잘 있다고.
바쁜 일 때문에 못 오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아빠가 여전히 엄마를 걱정하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줄 걸.
뭐가 잘났다고 그렇게 몰아붙였을까.
엄마도 다 알고 있었을 텐데.
하얀 거짓말이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이 모든 게 제가 만든 상황이었다. 이서는 발밑이 탁 꺼지는 것 같았다.
이서의 몸에 다시금 힘이 풀리려고 하자 재영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정이서. 네가 지금 여기서 이러면 어떡해.”
“으흑…….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우리 엄마 저렇게 만든 거야.”
결국 보다 못한 현주가 재영에게서 이서를 당겨와 제 품에 안았다.
현주는 이서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그게 어떻게 네 잘못이야. 그동안 정말 바빴잖아. 너 자신도 보살피기 힘든 만큼.”
이게 어떻게 이서 잘못일까?
현주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에서 최대 피해자는 정이서였다.
신약을 빌미로 이서를 꽁꽁 가둬둔 재한가 때문이고.
평소엔 이서에게 눈곱만큼도 관심 없으면서 여기서 위선을 떨고 있는 이재영 때문이지.
현주는 이서의 뒤에서 어쩔 줄 모르는 재영을 찌릿 노려봤다.
마음 같아선 무슨 염치로 여기까지 온 거냐며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아직 신약을 포기할 수가 없으니 현주도 분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줌마 괜찮으실 거야. 강한 분이시잖아.”
현주의 위안에도 이서의 눈물은 멈출 줄 몰랐다.
재영 역시 이서의 뒤에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도련님? 이 시간에 여기 어쩐 일로…….”
언제 왔는지 정재곤이 세 사람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도 이서는 현주의 품에 안겨 엉엉 울기 바빴다.
재영은 그런 이서와 정재곤을 번갈아 보다 대신 대답했다.
“위독하시다는 소식 듣고 바로 왔어요. 이서 혼자 보내면 안 될 거 같아서…….”
재영의 말에 정재곤의 낯빛이 갑자기 날카로워졌다.
그는 다짜고짜 버럭 화부터 냈다.
“정 비서! 지금 이 시간에 대표님 모시고 나와서 뭐하는 추태야?”
재곤의 꾸짖음에 현주와 재영이 화들짝 놀랐다.
엄마가 생사를 헤매고 있는데. 딸인 이서가 제정신일 수 있을까?
오히려 재곤의 꾸짖음에 얼굴이 뜨거워진 건 이재영이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이서한테 그러지 마세요.”
“도련님. 비서라면 어떤 순간에도 모시는 분부터 생각해야죠. 사적인 일에 휘둘려서 도련님 앞에서 못난 꼴을 보여드렸습니다. 정 비서, 이제 그만 울어.”
재영이 괜찮다고 말하려던 찰나 이서가 몸을 돌렸다.
흐리멍덩했던 아까와 달리 이서의 눈엔 짙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눈물에 젖어 있던 목소리도 날카로웠다.
“그런 정 실장님은 여기 왜 계신 겁니까? 가족보다 더 소중한 분 모시러 가셔야죠.”
“정 비서!”
“평소엔 코빼기도 안 비추다가 이제서야 나타난 이유가 뭔데요? 우리 엄마 숨 넘어 가려고 하니까 그제서야 찾아온 이유가 뭐냐고!”
살기가 역력한 이서의 말에 정재곤 뿐만 아니라 재영까지도 화들짝 놀랐다.
이서는 어제 다 못했던 말들을 모조리 꺼내 들었다.
사람들이 쳐다보든 말든 상관없었다.
이 남자만 믿고 있다가 다 엉망이 됐는데.
제 아버지의 가슴에 제 손으로 대못을 박는 걸 누구든 볼 테면 보라지.
“가족을 위해 살았다고? 모든 게 다 우리 때문이었다고? 거짓말하지 마. 당신은! 애초에 가족 같은 건 없었어. 나랑 엄마가 속은 거야.”
이렇게 독살스러운 말로도 이서의 마음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평소 참아 왔던 말들을 다 쏟아내면 좀 나아질 것 같았는데.
또 막상 아빠의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짜증이 났다.
그럼에도 이서는 멈출 수가 없었다.
“난 당신만 믿었어. 조금만 버티면, 내가 조금만 참으면……. 엄마 신약도 받고, 우리 가족도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말만 믿고 버텼어. 근데 이게 뭐야? 대체 우리한테 남은 게 뭐냐고!”
정재곤은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서가 다음에 뱉을 말이 뭔지 정재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만해.”
“뭘 그만하는데. 이 말도 듣기 싫어?”
“이서야, 제발.”
이서가 말을 할수록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해질 걸 알기에 재곤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뭘 아는데?”
하지만 그의 애원은 이서의 울분을 틀어막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 말만 믿고 재한에 있으면 신약이 나오긴 하는 거야? 우리 엄마 살 수 있는 거냐고.”
“정이서!”
“애초에 그딴 신약이 있기나 한 거냐고!”
비명 같은 말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현주는 입술을 잘근 씹으며 부녀의 얼굴을 바쁘게 살폈고, 재영은 이서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아 멀뚱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지? 왜 정이서가 재한가를 원망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지.
길바닥에 나앉을 뻔한 부녀를 살려준 게 재한이었고, 이서의 엄마를 위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들여 신약 개발까지 하고 있는데.
거기다 정이서는 제 옆에 있는 걸 만족해하지 않았나?
어디 가서 이런 좋은 직장을 얻는다고.
늘 재한에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지금 그녀의 말에서 재한에 대한 원망이 느껴지는 건지.
재영의 의문이 길어질 때쯤, 복도에 무거운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정재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서 역시 천천히 제 쪽으로 다가오는 실루엣을 발견했다.
정재곤 뒤에서 이서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
어쩌면 이서의 질문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정 비서.”
이주협의 묵직한 목소리에 재영도 깜짝 놀라 몸을 튕겼다.
오히려 이서보다 재영이 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재영은 그래도 이서를 위해 제가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어리숙한 재영보단 그의 아버지가 더 빨랐다.
“나랑 따로 이야기가 필요하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