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13화
긴밀히 만나자는 그 말.
이서가 그의 메시지를 읽자마자 바로 전화가 왔다.
아무리 정이서라도 이번엔 종료 버튼을 누르긴 힘들었다.
이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결심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말 패치 완성하셨어요?”
-정이서 씨 만나려면 내가 부지런히 일해야겠어요. 이런 구실이 있어야 내 전화를 받아주니.
“다른 소리 마시고요. 정말 완성하신 거예요?”
-네. 완벽하게 완성했죠.
완벽하게 완성했다고?
재한 기술팀에선 일주일도 빠듯하다고 한 걸, 어떻게 하루 만에.
“혼자 하신 거예요?”
-네, 혼자 했어요.
“어떻게요? 어떻게 그걸 혼자서. 그게 가능한 일이에요?”
-이제 정이서 씨는 내 말을 전적으로 안 믿기로 했나 봐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하루 만에 가능한 일인가 싶어서요.”
이서는 혹여나 제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바로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정이서 씨가 두바이에서 말했잖아요. AI도 이긴 천재, 최 원이라고……. 그 최 원이 나라는 거, 잊진 않았죠?
어제 분명 그날 일은 잊으라고 했는데.
그는 오히려 이서가 잊기라도 할까 봐 두바이에서의 일을 들췄다.
그의 말이 마음에 들 리 없었지만, 패치가 있는 이상 이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꼬리를 바짝 내리는 수밖에.
“대표님, 혹시 오늘 시간되시나요?”
그 말에 수화기 뒤에선 얄미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왜요? 저 만나주게요?
“……네, 그럼요. 대표님과 오늘 긴밀히 만나고 싶습니다.”
-긴밀히 만나자라. 정이서 씨가 긴밀히 만나자고 하면 당장 만나러 가야죠.
이서는 아차 싶었다.
비서 일을 하다 보면 입에 붙는 단어들이 몇 개 있는데, ‘긴밀히’라는 말은 그 중 하나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또 ‘긴밀히’ 라는 말을 썼는데. 그는 그 표현을 퍽 마음에 들어 했다.
-지금 만나죠, 긴밀히.
앞으로 이 남자 앞에선 입버릇처럼 하는 말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렇게 다짐한 이서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번엔 찬바람도 이서의 열기를 끄지 못했다.
* * *
“인원 감축은 비상 상황에서 큰 타격을 준다고 하셨죠? 우리 왕유진 본부장님께서요.”
세상 일 아무도 모른다더니.
이재영과 기술팀의 전세는 완전히 역전됐다, 그것도 최 원 때문에.
총구를 들이댔던 그놈을 생각하면 아직도 짜증이 나지만.
그럼에도 그놈 때문에 떵떵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일도 용서할 수 있을 정도였다.
“또 이 인원으론 일주일도 빠듯하다고 엄살까지 부리셨죠. 우리 왕 본부장님께서요.”
밤샘 작업을 한 기술팀 직원들의 얼굴은 전부 노랗게 떠 있었다.
하지만 피곤함보다도 모욕감과 분노가 더 크게 이글거렸다.
그렇지만 다들 할 말이 없었다.
이재영에게 한 소리 해대던 왕 본부장 또한 입을 닫고 있었다.
“누군 엄살만 부리는데……. 다른 누구는 벌써, 그것도 혼자. 이걸 해결하네요. 이게 가능하네.”
재영은 패배감이 역력한 얼굴들을 보며 희열을 느꼈다.
최고 실력자라길래 그동안 대우해 줬는데, 이제 보니 그것도 아니잖아?
“이번 일을 계기로 아주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집 지킨다고 짖기만 하는 똥개 열 마리 키우는 것보다 제대로 훈련된 사냥개 한 마리 키우는 게 낫다는 걸요. 이건 뭐 시끄럽기만 하지. 집도 못 지키는데.”
왕 본부장은 모멸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다른 직원들 또한 벌게진 눈으로 이재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리 대표가 제 구실 못한다 해도 애사심을 갖고 열심히 일해 왔는데.
그 결과가 결국 똥개 취급이라니.
그들로서는 도무지 견딜 수 없는 모욕이었다.
“어쨌거나 다들 뭐라도 해 본다고 고생했어요. 여기서부턴 내가 해결할 테니까 다들 쉬세요.”
재영이 기세 좋게 기술팀 사무실을 나선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반면 기술팀엔 전에 없는 살벌한 분위기가 흘렀다.
한편 재한 시큐리티 로비.
이서는 긴장한 채로 엘리베이터 앞에서 최 원을 기다렸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는 것만 봐도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긴장하지 마. 긴장할 필요가 뭐 있다고.”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혼자 구시렁거리던 때.
그녀의 어깨 뒤로 긴 그림자가 걸렸다.
“긴장돼요?”
“앗!”
이서는 두 손으로 제 입을 막고 뒤를 돌아봤다.
아니나 다를까, 최 원이 방긋 웃으며 그녀 뒤에 서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이서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얼어 버렸다.
“어, 어디서 오신 거예요?”
어찌나 놀랐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회사 정문으로 들어왔죠.”
“아, 정문……. 차, 가지고 오시는 줄 알았는데.”
“간만에 산책할 겸 걸어왔어요. 그런데 아직 산책하기엔 춥네요.”
그가 방긋 웃을 때마다 반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과 가지런한 하얀 이가 눈에 띄었다.
이서는 그의 얼굴을 오래 보지 못한 채 서둘러 설명했다.
“보안 때문에…… 외부인은 직원 동행이 필요해서, 그래서 나온 거예요.”
“아, 그래요?”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 보였다.
어젠 절 잊어달라던 그녀가 오늘은 마중까지 나와 절 기다리는데.
그녀의 기다림이 싫을 리가.
“그럼 같이 올라갈까요?”
이서는 뻣뻣하게 움직이며 앞서 나갔다.
그녀의 뒤통수를 보던 최 원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걸린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대표실. 재영은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제 매무새를 확인했다.
그때 보니 최 원 그놈.
인정하긴 싫지만 키도 저보다 조금 더 크고, 몸도 저보다 조금 더 좋아 보이던데.
거기다 저만큼은 아니지만 얼굴도 꽤 잘생긴 축에 속했다.
“아, 나도 잘생긴 얼굴인데 오늘은 쫌.”
어제 먹은 술 때문에 눈 밑에 생긴 다크서클이 영 거슬렸다.
마음 같아선 내일 만나자고 하고 싶었지만.
한 시가 급한 일이라며 정이서가 요란을 떠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모시는 대표님의 심사가 엉망인 건 중요하지 않은 지, 그저 패치, 패치 거리며 유난을 떠는 게 웃겼고.
“진짜 나중에 얼마나 후회하려고. 쯧.”
또 나중에 정이서가 땅을 치고 후회할 걸 생각하면…….
“조금 더 자세히 알려줘야 되나?”
그런 오지랖을 부려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재빨리 제자리로 튀어가 앉았다.
만약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재영이 날아올랐다고 생각할 정도로 재빠른 몸짓이었다.
하지만 재영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세를 잡고 앉았다.
책상 위에 놓인 결재 서류와 평소엔 쓰지도 않는 만년필을 집어 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표님, LIMS 최 원 대표님 오셨습니다.”
문 밖에서 이서의 목소리가 들리자, 재영은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낮게 말했다.
“들어오세요.”
그 소리에 이서가 조용히 대표실 문을 열었다.
재영은 결재 서류를 보는 척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서의 발소리를 샜다.
또각, 또각, 또각.
문에서부터 제 책상까지는 대략 스무 걸음.
이서가 열 걸음 정도 걸어왔을 때에 맞춰 재영은 서류 위에 사인을 멋지게 남겼다.
만년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가 꽤나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스무 걸음 째 이서가 낮은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대표님. 최 원 대표님 오셨습니다.”
그 말에 재영은 가볍게 고개를 들고 이서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부드러운 웃음을 보이며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정 비서. 수고 많았어요.”
“…….”
이서는 하마터면 그의 이마에 손을 올릴 뻔했다.
아까 나몰라라 소파에 누워 헛소리만 해대던 사람 맞아?
지금은 둘도 없이 스윗한 상사처럼 굴고 있는 걸 보니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진심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서는 순간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영은 다시 한 번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은 정장 재킷 단추를 잠그며 아직 대표실 문 앞에 서 있는 최 원에게로 향했다.
그는 여유롭게 걸어가면서도 재빠르게 최 원을 위아래로 훑었다.
사격장에서 봤을 때와 달리 오늘 그는 비즈니스맨의 면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포마드로 깔끔하게 넘긴 머리와 그의 다부진 체형을 더 돋보이게 만들어 주는 블랙 코트.
그와 더불어 자신감 넘치고 결의에 차 있는 얼굴까지.
누가 보면 재한만큼이나 큰 회사를 운영하는 능력 있는 대표라고 생각할 법한 모습이었다.
물론 재영의 눈엔 가소롭기 그지없었지만.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꿇리고 싶지 않은 재영이었다.
저야말로 재한 시큐리티의 주인이자 재한 그룹의 하나뿐인 후계자 아니겠는가?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우러러보는 제 존재를 증명해 주는 공간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재영은 어깨를 쭉 펴고 먼저 악수를 청하려 손을 뻗었다.
“최 대표, 어서 오세요. 재한에 온 걸 환영해요.”
최 원은 제 앞에 뻗친 재영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굳은 살 하나 없이 하얗고 가느다란 손.
고생이라곤 한 적 없이 큰 왕자님의 손이었다.
최 원 역시 활짝 웃으며 재영과 악수를 했다.
그런데 어찌나 힘을 줬는지 안 그래도 하얀 손이 백지장보다 더 새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곧게 펴져 있던 재영의 어깨가 옆으로 살짝 비틀릴 정도였다.
“앗! 흐음…….”
하마터면 악! 소리가 날 뻔 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제 품위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재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곤 다시 짜증이 잔뜩 실린 눈으로 최 원을 노려보았다.
이 새끼 뭐야?
누가 손가락뼈를 전부 부러트릴 심산으로 악수를 하나?
하지만 악수를 세게 했다는 이유로 화를 낼 수도 없고.
재영은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얼굴로 최 원을 바라보았다.
재영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는 걸 보던 최 원이 모른 척 말했다.
“다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 대표님.”
재영의 손을 더 꽉 쥔 최 원이 이번엔 사무실을 둘러보았다.
지금 뭐하는……!
이 새끼,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재영은 손가락이 바스라질 것 같은 아픔에 이로 제 입안 살을 꽉 씹었다.
“사무실이 참 멋집니다. 대표님처럼요.”
사무실을 다 둘러본 최 원은 그제야 손에 힘을 풀었다.
재영은 재빨리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을 뺐다.
대표실이 아니었다면 진작 따졌겠지만.
이곳의 주인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야 하는지라 아무 소리도 하지 못했다.
하여튼, 이 새끼랑 만나면 기분이 구리다.
도대체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새끼와는 끝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할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