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12화

이래도 내 전화 안 받을 건가?


결국 뒷좌석에 앉은 건 재영 혼자였다.

삐딱하게 앉은 재영은 운전석에 앉은 이서를 노려봤다. 얼굴엔 기분 나쁜 기색이 역력했다.

“호텔을 예약해? 정말 걔랑 호텔에 집어넣을 생각이라도 한 거야?”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서는 재영의 짜증이 의아했다.

“그분 마음에 드신 거 아니셨어요? 갑자기 안으시길래 마음에 드신 줄 알고.”

“마음에 안 들었거든? 그냥 하루 같이 논 거거든? 그리고 넌 처음 본 사람이랑 호텔 가냐?”

재영이 불쑥 내뱉은 말에 이서는 저도 모르게 찔려 헛기침을 했다.

“대체 사람을 뭐로 보고.”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그리고 거기서 그 여자가 달라붙으면 네가 떼어줘야 하는 거 아냐? 왜 멀뚱히 보고만 있어? 어?”

“제가요?”

“어! 내가 싫은 티 팍팍 냈잖아. 그런데 넌 눈 한번 깜빡 않고 보고만 있더라.”

“……제가 거기서 뭘 어떻게.”

“내가 그 여자랑 진짜 호텔까지 가면 어쩌려고?”

이서는 도무지 재영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제가 뭘 어쩔 일이 아닌데요. 대표님 사생활이 제가 어떻게 할 사안도 아닐뿐더러,”

“야! 정이서!”

재영이 버럭 소리치자 이서가 눈을 치켜떴다.

술에 취했으면 곱게 갈 것이지.

한밤중에 퇴근한 사람 불러놓고 떼를 쓰는 게 정말이지 짜증났다.

거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까지 나불거리니 화가 나지 않고 배길까.

반면 재영은 답답해 돌아가시기 일보직전이었다.

어떻게 여자애가 저래?

어떻게 절 다른 여자랑 호텔에 집어넣을 생각을 하냐고.

제게 어떤 마음도 없는 듯 태연하게.

재영은 눈을 치켜뜬 채 룸미러로 이서를 노려봤다.

정말 익숙함에 속아 제가 어떤 놈인지 잊기라도 한 거야?

잘생긴 것도 모자라 귀엽기까지 한 얼굴에 큰 키,

거기다 많은 여자들이 안기고 싶어 하는 좋은 몸매.

그것만 해도 재수 없는데 무려 재벌 3세나 된다는 걸, 정말 잊은 거냐고.

일생에 한 번 만나도 기적 같은 남자가 제 옆에 떡하니 있는데.

제가 다른 여자를 만나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 구는 정이서가 황당했다.

그걸 모르니 저한테 매번 퉁명스럽게 굴지.

재영은 혀를 차며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쯧.”

제가 다른 여자를 만나면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겠지.

아, 내가 보석을 몰라보고 그동안 함부로 대했구나 하면서…….

재영은 훗날 이서가 땅을 치고 후회할 모습을 상상하며 혀를 찼다.

“쯧. 진짜 널 어떡하냐.”

반면, 이서는 재영의 작은 소리마저 거슬린다는 듯 조용히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내 걱정할 시간에 제발 제 앞가림이나 똑바로 하라고!

* * *

-어제도 늦게 퇴근했어?

수화기 속 힘없는 엄마의 목소리에 이서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응. 어젠 꼭 엄마 깨어 있을 때 가려고 했는데. 미안해.”

-다음부턴 엄마 자고 있어도 깨워. 우리 딸 얼굴 보고 싶다.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힘들어 하면서.”

-그럼 우리 딸이랑 밤새 떠들면 되지.

엄마의 살가운 말에도 오히려 이서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마음이 아팠다, 엄마가 저만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고 싶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일이 터지는데 이서가 어딜 갈 수 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잠시 전화 통화할 시간도 없이 일이 지뢰처럼 펑펑 터졌다.

핸드폰 화면에 뜬 문자에 이서의 머리가 띵 울리는 것 같았다.

‘다수의 고객사에서 모자이크 취약점에 대한 손해 배상을 요구함.’

어제 고객사마다 전화를 돌려 입에 단내가 나게 떠들었건만.

한편으로는 재한을 마냥 기다려줄 수만은 없는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갔다. 보안이 달린 문제니.

“어, 엄마. 내가 급하게 업무가 생겨서.”

-어, 그래. 몸 관리 잘하고. 엄마 잘 있으니까 너무 걱정 마.

오늘은 꼭 만나자고 말하려고 했는데.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오늘은커녕 이번 달 내내 엄마의 얼굴을 보긴 힘들 듯했다.

“엄마, 사랑해.”

이서는 울상을 지으며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재한 시큐리티가 또 한번 들썩였지만, 정작 대표실은 고요했다.

전날의 숙취 탓에 재영은 소파에 누워 낑낑거리고 있었다.

속이 부대껴 물도 먹히지 않았다.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데, 정이서가 대표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왜. 뭐.”

문이 열리고 정이서의 특유의 걸음걸이 소리가 들렸다.

바닥을 가볍게 치듯 톡톡 걷는 그녀의 가벼운 발소리.

소파에 누워 있던 재영은 눈만 떠 이서를 올려다보았다.

정이서는 한쪽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지금 고객사마다 취약점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법무팀에 말해.”

“법무팀에서도 움직이고 있지만 대표님께서 먼저 움직이시면…….”

“내가 여기서 뭐.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데. 기술팀에서 일주일 걸린다잖아. 패치 완성되면 알아서 조용해지겠지.”

“그래도 대표님이 고객사에 직접 말씀해 주시면…….”

“아! 진짜!”

재영의 거친 반응에 가만히 서 있던 이서가 한 발 물러섰다.

제가 무슨 말을 했다고 다짜고짜 짜증을 내는 건지.

어제 술을 잘못 먹었나.

이서는 속으로 비아냥거렸지만 입으론 차분히 말했다.

“대표님. 저희가 시간을 충분히 벌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기술팀에서도 마음 놓고 패치를 만들 수 있겠죠?”

소파에 앉은 재영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이서야, 넌 왜 한 치 앞만 봐?”

“네?”

“대표인 내가 성급히 약속했다가 기술팀에서 해결 못하면?”

“…….”

“그럼 재한 대표인 나까지 거짓말쟁이로 매도되는 거 아냐. 그럼 기업 이미지가 어떻게 되겠냐?”

그렇다고 대표가 손 놓고 있는 게 답이 될 순 없을 텐데?

대표가 돼서 어떻게든 책임을 면피하려고만 하다니.

이서는 이런 재영에게 진절머리가 날 대로 나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어떻게든 타일러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걸.

“그래도 대표님.”

하지만 재영은 이제 듣기도 싫다는 듯 다시 벌러덩 누워 버렸다.

“더 말하지 마, 골 아파. 나가. 난 안 할 거니까.”

이서는 이를 꽉 깨물었다.

정말 제게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재영을 흠씬 때리고 싶었다.

그간 쌓였던 걸 풀려면 하루도 부족할 테지만…….

그래도 딱 한 대만 때린다면 속이 다 시원해질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서의 마음엔 재영에 대한 분노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우선 지금은 들어먹질 않으니 나중에 다시 타이르기로 한 뒤, 이서는 물러났다.

그때 문득, 돌아서는 이서를 보며 재영이 흘리듯 한마디 했다.

“정이서, 제발 앞에 있는 것만 보지 마. 지금 너한테 중요한 게 패치 같아?”

“네? 패치가 안 중요하면 뭐가…….”

“네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거, 진짜 모르겠어?”

일생일대의 기회?

그게 지금 저한테 와 있다고?!

이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에 재영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뭐 보이지도 않으니 네가 어떻게 잡겠냐. 그걸.”

재영은 다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나가.”

이 정도로 말했는데 못 알아들으면 정말 답도 없는 거다.

어차피 후회는 정이서의 몫, 저는 해 줄 만큼 해 준 거다!

* * *

잠시 바람을 맞기 위해 이서는 옥상 문을 열었다.

차디찬 겨울바람이 이서의 볼을 세게 할퀴는 것 같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욱 터질 뻔한 화를 가라앉히기에 제격이었으니까.

하지만 속에서 끓어오르는 천불은 좀처럼 꺼지지가 않았다.

이서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선 세게 발을 굴렀다.

“자기야말로 중요한 게 뭔지 좀 생각하지? 패치 해결 안 하면 회장님한테 또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이서는 속에 쌓아둔 화를 혼자 털어냈다.

“내가 매번 알아서 해결해 주니까 뭐든 뚝딱 해결되는 줄 아나 봐. 어떻게 이렇게 위기감이 하나도 없어!”

이서는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쌌다.

이렇게 꾹 잡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머리가 날아갈 것 같았다.

“하, 이걸 또 어떻게 해야 해.”

이렇게 화를 내봤자 결국 또 전부 다 이서의 몫이었다.

당장 회사 바깥에선 불만이 빗발쳤고, 내부에서도 대표실에선 뭐하냐는 말이 하나둘 튀어나왔다.

이서만 보면 다들 ‘이재영 대표님은 어떻게 하신대요?’라고 물으면서 말이다.

그때마다 ‘저희 대표님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라고 말은 못하고.그저 대표님도 대책 마련에 바쁘시다는 거짓말만 떠들어댔다.

이제 이서는 제 핸드폰이 울리기만 해도 경기가 날 지경이었다.

사람들은 대책을 내놓으라며 이서를 달달 볶았다.

이재영이 아무런 관심도 없는데, 제가 무슨 수로?!

찬바람에 겨우 격양된 감정을 식히고 있는데.

그때 또 손에 쥔 핸드폰이 울렸다.

이번엔 또 누구일지 겁이 날 지경이었다.

“뭐야?”

액정 위에 뜬 이름을 보고 이서가 미간을 구겼다.

‘LIMS 최 원 대표’

분명 날 잊어달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루도 못 가 다시 이렇게 전화를 한다고?!

그녀는 고민 없이 바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다시 최 원이 전화를 걸었다.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다들 제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 거야?

다들 제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냐고.

거칠게 종료 버튼을 누른 이서는 그의 번호를 차단하려 잠금을 풀었다.

그때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반가운 소식 핑계 삼아 전화했는데 여지조차 안 주네요.]

“반가운 소식은 무슨…….”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보냈다.

‘모자이크 취약점 패치, 내가 완성했는데. 이래도 내 전화 안 받을 거예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