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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11/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11화

원하면 호텔 잡아줄까요?


“난 정이서 씨한테 한 눈에 반해서 다가간 것뿐인데요.”

이서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방금 전 분노로 달아올랐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뜨거운 열기가 몸 깊숙한 곳부터 뜨겁게 번지는 느낌.

퉁명스럽게 나갔던 말들이 목구멍에 턱 걸린 듯 목까지 메였다.

이서는 순간 그의 말에 동요한 걸 들킬까 봐 재빨리 창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날도 그랬다.

절 뚫어질 듯 바라보던 눈빛과 시선.

그리고 갑작스럽게 이어졌던 키스와 스킨십까지.

정말이지 제게 한 눈에 반한 사람처럼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하지만 그건 아무것도 몰랐던 때라서 같이 휩쓸렸을 뿐.

지금은 그가 어떤 사람인 줄 다 아는데.

이제와 저런 말에 홀딱 넘어가 버릴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최 원은 무거운 침묵을 깨고 다시 물었다.

“안 믿는 거예요?”

“그런 말을 믿을 리가 없죠.”

“음. 그날 내가 뭐 물어봤어요? 정이서 씨를 통해 재한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하던가요?”

그 말에 이서는 발끈했다.

“그날 제 옆자리에 앉으셔서 시간 되냐고…….”

울컥 소리치던 이서의 말이 잦아들었다.

이서가 입을 우물거리자 그가 대신 말을 이었다.

“맞아요. 내가 그날 정이서 씨한테 물은 건, 시간 되냐는 말뿐인데.”

그의 말이 맞다.

바에 앉아 있는 제게 다가와 그가 건넨 말은.

‘술 대신 시간은 어때요?’

그 뒤로도 그는 재한 시큐리티에 관한 건 물론 제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

“예민한 질문은 안 했는데.”

“…….”

“최 원이란 내 이름도 정이서 씨가 먼저 말한 거고요.”

최 원의 눈에 붉게 물드는 이서의 귓바퀴가 보였다.

아무래도 민망한 건지 그쪽으론 고개도 돌리지 못했다.

그게 또 귀여워 최 원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믿어줘요.”

“…….”

“난 좋아하는 사람한텐 거짓말 안 해요.”

최 원은 한쪽에 차를 세우고 진지하게 제 마음을 고백했다.

“호텔 앞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그때부터 생각했어요. 저 여자랑 다시 만나보고 싶다고.”

그 감미로운 말에 이번엔 이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는 이서의 눈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제 믿어 줄래요?”

“…….”

글쎄. 그의 말이 틀린 건 없지만 그렇다고 이 남자를 믿을 수 있나?

이서는 아직도 최 원에 대한 경계심을 풀 수가 없었다.

아니, 믿어야 할 이유는 또 뭐야?

어차피 저와는 다시 엮일 일 없는 남자일 텐데.

그 의도가 어떻든 이서는 이 남자와 다신 엮이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 저희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어주시면 좋겠습니다.”

“…….”

“또 저도 깨끗하게 잊어주시면 좋겠고요.”

제 뜻을 정확히 밝힌 이서는 차에서 내려 뒤도 안 돌아보고 걸어갔다.

최 원은 차창 밖으로 보이는 그녀의 실루엣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두고 간 말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잊어달라고? 글쎄.”

아쉽게도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애초에 그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또, 정이서가 절 밀어낼수록 없던 오기까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면 너랑 더 엮이고 싶은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말하며 특유의 비릿한 웃음을 보였다.

“믿긴 뭘 믿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좋다구나 하고 다시 만날 줄 알고?”

이서는 구둣발로 도보 위를 빠르게 걸으며 중얼거렸다.

“사람을 얼마나 바보로 아는 거야.”

이서는 그를 욕하면서도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했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 남자와 다시 마주할 것 같아서.

감당하기 힘든 떨림.

이재영 옆에서 지내며 어지간한 일에는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와는 한 공간에 같이 있는 것조차 버거웠다.

물론 하룻밤을 보낸 남자이기에 감정을 완전히 식히기도 힘들었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그에게선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온 신경이 바짝 설 정도로 위험한 신호가.

“만나는 건 무슨. 내가 다시 마주치나 봐.”

이서는 다른 길로 빠지고 나서야 한시름 놓았다.

온몸에 긴장이 쭉 풀리자 피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왔다.

하지만 이서가 한 숨 돌릴 시간도 주지 않고 핸드폰이 울렸다.

‘이재영 대표님’

발신자를 보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이제야 연락이 와?

당장 전화를 꺼버리고 싶은 충동에 종료 버튼을 누를까도 했지만.

이서는 또 어쩔 수 없이 그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여보세요?”

-하하하! 아! 받았네. 어디야?

이재영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술을 마시고 있는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나 여기 청담동인데.

이재영이 제 좌표를 알려주는 이유는 딱 하나.

대리운전을 하러 오라는 뜻이었다.

이서는 이를 꽉 깨물고 대답했다.

“저 퇴근했습니다, 대표님. 박 기사님한테 연락 드릴게요.”

-네가 와! 박 기사 부르면 아버지도 아시잖아.

제가 한 짓이 이 회장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다는 걸 알긴 아나보지?

-30분 내로 와.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

이제 화가 나는 걸 초월해 기가 막히고 웃길 따름이었다.

“그래, 이래야 이재영이지.”

애초에 이런 이재영에게 맞춰 주는 게 제 일이고.

이제 와 새삼스럽게 화를 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청담동에 있는 클럽.

이서는 클럽에 있는 타워 주차장으로 먼저 향했다.

차부터 찾고 앞에서 그를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차키를 찾으러 온 이서에게 주차장 관리자가 말했다.

“차키가 차주 분한테 있는 것 같은데요.”

이재영이 차키를 맡기지 않아 당장 차를 뺄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들어가긴 싫은데.”

클럽은 정말이지 딱 질색이었다.

클럽에서 좋은 기억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재영은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이서는 시끌벅적한 클럽 안을 가로질러 재영이 있을 법한 룸 앞에 도착했다.

이서는 웨이터에게 물어 재영이 있는 룸으로 안내 받았다.

잠시 들어가 이재영만 데리고 나올 생각이었는데.

“재영 오빠!”

문을 열자마자 앙칼진 여자 목소리가 재영의 이름을 불렀다.

“푸하하! 재영 오빠 진짜 웃기다!”

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관도 아니었다.

술에 얼큰하게 취한 남자와 여자가 서로 짝을 맞춰 놀고 있었다.

그중 웬 여자 옆에 앉아 희희낙락거리는 재영도 있었다.

이재영 옆에 앉은 여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렸다.

그러면서도 재영의 팔을 만지거나 어깨를 팔로 안으며 진한 스킨십을 해보였다.

그 꼴을 보며 이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회사 일은 내팽개치고 여기서 여자들이랑 술이나 마시고 있었던 거야?

저는 온종일 이재영 대신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 덕에 울고 있는 모습까지 그 남자에게 딱 걸려 망신까지 당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여기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이재영을 보니 속이 뒤집힐 수밖에.

그때, 문 앞에 서 있는 이서를 발견한 누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누구야? 누군데 함부로 들어오는 거야?!”

남자는 불쾌한 듯 이서에게 삿대질까지 해가며 버럭 소리쳤다.

그에 이서를 발견한 재영이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제 옆에 꼭 붙어 있던 여자까지 가차 없이 떼어 내고선 말이다.

“어어, 내 비서. 내가 불렀어. 나 간다.”

“재영 오빠, 한참 놀고 있는데 간다고? 가지 마!”

딱 붙는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재영의 허리춤을 잡으며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재영은 가차 없이 뿌리치고 이서 쪽으로 휘청거리며 걸어왔다.

갈지자의 걸음걸이만 보더라도 얼마나 만취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재영은 이서에게 저를 부축해 달라는 듯 양 손을 뻗었다.

“아으, 나 좀 잡아…….”

하지만 이서는 인상을 굳힌 채 몸을 조용히 뒤로 뺐다.

만취한 이재영 부축이나 해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까.

자연스레 손을 뻗었던 재영은 이서가 저를 피하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취해서 잔뜩 풀린 눈으로 이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재영이 이서에게 한 마디 하려는 순간.

뒤에서 방금 재영과 같이 놀았던 여자가 조르르 달려왔다.

“오빠, 그럼 나도 같이 가. 응? 나도 데려다 줘.”

여자는 재영과 팔짱을 낀 채로 애처롭게 말했다.

재영은 팔을 빼려 했지만 여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씨, 놔아. 집은 알아서 가라, 좀.”

“오빠. 나 혼자 가기 무섭단 말이야.”

재영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여간, 제가 이재영이란 걸 알면 여자들은 꼭 이런다니까.

꼭 저와 뭐라도 해보려고…….

가당치도 않는 욕심을 부리는 여자들을 보면 짜증부터 났다.

재영은 자연스레 이서를 바라보았다.

눈을 반짝이는 다른 여자들과 달리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그럼 얜 뭐지? 얜 여자가 아닌가?

다른 여자들은 저와 어떻게 해보려고 안달이 났는데.

24시간 365일 저와 붙어 있으면서도 이렇게 쌩하기만 해.

아무래도 매일 붙어 있다 보니 제 옆에 있는 놈이 얼마나 잘난 남자인지 모르는 듯 싶었다.

그럼 이번 기회에 보여줘야지.

다른 여자들은 저한테 얼마나 안달이 났는지.

익숙함에 속아 정이서가 얼마나 큰 실수를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말했다.

“나랑 같이 가고 싶어?”

“응!”

“그래, 그럼 타고 가.”

재영의 말에 이서는 한숨을 삼켰다.

이서가 조용히 드러낸 불편함을 본 재영이 비아냥댔다.

“왜? 정이서. 태워주기 싫어?”

재영은 그 말을 하면서 여자의 허리를 꽉 움켜 안았다.

대체 지금 뭐하자는 거지?

아무리 취했다지만 평소 안 하던 짓까지 하는 건 둘째 치고,

기세등등한 얼굴로 저를 보는 게 영 짜증이 났다.

마치 저와 기 싸움을 하는 듯한 태도가.

이서가 아무 말도 않자 여자가 주책맞게 웃으며 말했다.

“재영 오빠, 완전 상남자! 우리 집 말고 다른 곳 가도 되는데……. 그나저나 계속 멀뚱히 서서 뭐해요. 어서 차나 빼지.”

이서는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재영과 그 옆에서 갖은 교태를 부리고 있는 여자를 번갈아보았다.

그리고 재영에게 물었다.

“대표님. 이분이랑 같이 가실 호텔 예약해 드릴까요?”

이서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오자 재영의 미간이 줄어들었다.

“뭐? 호텔?”

지금 이 애랑 나랑 호텔에 집어넣겠다는 말을 하는 거야?

호텔에서, 성인 남녀가 무슨 일을 하는 줄 알면서?!

나랑 이 여자를 호텔에 집어넣겠다고?

재영은 순간 벌컥 화가 나 여자의 허리에서 손을 뗐다.

“아씨, 넌 무슨 소리를…….”

“그게 아니시라면 조용히 댁에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분하게 말하는 정이서와 달리 재영은 입술까지 달달 떨렸다.

“더 늦으면 회장님이 찾으실 테니까요.”

이서는 그 말만 남기고 먼저 룸을 나섰다.

재영은 ‘호텔’이란 말에 얻어맞은 듯 그 자리에 굳어 버렸고.

쟤 지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떻게 절 다른 여자와 호텔에 집어넣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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