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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10/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10화

네가 오기 전엔 꼼짝도 안 할 건데?


“도대체 당신들이 하는 일이 뭐예요?”

대표의 악다구니에 기술팀 사람들은 똥 씹은 얼굴을 했다.

이재영이 유일하게 큰소리 칠 때는 직원들을 갈굴 때 뿐.

평소엔 인기척조차 없이 다니다 이럴 때만 큰소리를 내는 대표를 어느 누가 신임할까?

“모자이크에 들인 돈이 얼만데! 이런 취약점이 나오냐고요!”

반면 왕유진 본부장은 앞에서 요란을 떠는 이재영을 원숭이 보듯 했다.

“말로는 맨날 모자이크만 한 게 없다면서. 실체는 구멍 술술 뚫린 넝마만도 못하고.”

재영의 비아냥거림에 왕 본부장은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약점 하나 없는 완벽한 사람이십니까?”

“뭐, 뭐라고요? 지금 모자이크 이야기하면서 내 약점이 왜 나와요?!”

“약점 없는 인간이 없듯 약점 없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건 불가능합니다. 자신의 단점을 알고 빨리 고치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인 것처럼 취약점에 대한 패치를 빨리 만드는 게 유능한 팀이겠죠.”

뭐, 뭐라는 거야.

재영은 왕 본부장의 말에 입만 우물거렸다.

“어제 익명의 해커가 밝힌 취약점은 분명 치명적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어젯밤부터 저희 팀에서 빠르게 조치를 취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그 패치라는 건 언제 나오는데요? 당장 고객사들 민원이 빗발쳐요.”

“일주일이면 됩니다.”

“이, 일주일?! 조금만 오류가 나도 난리를 치는 인간들한테 일주일 기다리라고 왕 본부장이 말해 보든가!”

앞머리를 쓱 쓸어 올린 왕 본부장은 매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러게. 제가 그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갑작스러운 인원 감축, 분명 이런 비상 상황에서 큰 타격을 줄 거라고요.”

그러게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멋대로 칼을 휘두르지 말았어야지.

재영이 아무리 바보라고 한들 왕 본부장의 말에 담긴 의미를 모를 수 없었다.

분명 인원 감축을 할 때 왕 본부장과 기술팀에선 완강히 반대를 했었다.

이런 비상상황을 해결하는데 분명 큰 타격을 줄 거라고 경고하며 말이다.

이제와 다른 소리를 하기엔 재영도 양심이라는 게 있었다.

재영은 짜증이 났지만, 더 할 말이 없어 인상을 팍 쓰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기술팀 직원들 사이에 전운과 가까운 침묵이 감돌았다.

대표실로 돌아온 재영은 씩씩거리며 제자리에 앉았다.

“지들이 제대로 안 해 놓고 나한테 책임을 돌려?”

이서 역시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이재영을 따라 기술팀과의 미팅에 참석하지 못했는데.

미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또 왕 본부장과 한바탕 하고 온 거겠지.

이서는 재영의 앞에 서서 스케줄 브리핑을 했다.

“대표님, 오후 컨퍼런스에 쓸 격려사 촬영이 있습니다. 대본은 여기 준비 됐고요. 의상은 몇 벌 준비를 해 뒀는데,”

“됐어, 안 해.”

“네?”

“안 한다고. 해커한테 그런 취약점까지 발견됐는데 내가 창피해서 어떻게 얼굴을 내밀어?”

재영은 단호한 얼굴을 해 보였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몇 달 전부터 잡혀 있던 스케줄입니다.”

“나 말고 잘나신 왕 본부장님한테 하시라고 해.”

“대표님, 재한 시큐리티의 대표는 이재영 대표님이시잖아요.”

탁! 화가 난 재영이 탁자를 주먹으로 세게 쳤다.

“나를 대표로 인정하긴 하긴 한 대? 사고는 본인들이 쳐놓고 왜 나한테 지랄이야? 됐어. 내가 나서 봤자 사람들 손가락질이나 받지. 왕 본부장한테 하라고 해.”

재영은 더 들어볼 필요도 없다는 듯 코트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서는 대표실을 떠나려는 재영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기술팀에서도 그럴 의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누구보다 재영을 잘 아는 사람이 이서였다.

어쩌면 재영을 낳고 키운 손 여사보다 더 잘 알지도 몰랐다.

조금만 무시를 받으면 극도로 예민해지는 이 습성.

이번 일로 기술팀을 눌러 보려 했지만 도리어 제가 얻어맞았으니 도망가고 싶을 테다.

“대표님, 지금까지 잘 버텨오셨잖아요. 이번 일도 충분히 이겨내실 수 있을 겁니다.”

이서는 듣기 좋은 말만 꼽아 최대한 부드럽게 타일렀다.

하지만 재영은 그녀의 손에서 거칠게 제 팔을 뺐다.

“나한테 더 말하지 마. 아무리 사정해도 안 할 거니까.”

쾅! 대표실 문이 닫히자 이서는 현기증을 느끼곤 잠시 주춤했다.

이서는 한숨을 푹 쉬고 고개를 떨궜다.

“……좋겠다.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갈 수 있어서.”

모든 부담을 다 벗어 던지고 도망칠 수 있는 것도 특권일 테다.

이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소파에 앉았다.

하지만 숨을 돌리는 것조차 이서에겐 허락되지 않는듯 핸드폰은 쉼 없이 울렸다.

“숨 막히네, 진짜.”

이서는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 버리곤 손 안에 얼굴을 묻었다.

당장 소리라도 꿱 지르고 싶었지만 이서는 소리 없이 숨만 골랐다.

하지만 얼마 못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이재영이 두고 간 책임은 결국 전부 다 이서의 몫이었다.

* * *

오늘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이미 정신이 쏙 빠져 있는 상태였건만.

거기에 스케줄을 두고 도망가 버린 이재영 대신 왕유진 본부장에게 부탁하느라 손이 발이 될 정도로 빌었던 거 같다.

이서는 초주검이 된 얼굴로 멍하니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었다.

“엄마 깨어 있을 때 간다고 약속했는데…….”

하지만 시간은 벌써 늦은 열한 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긴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쏟아지자 온종일 참았던 눈물이 울컥 터졌다.

“진짜…… 거지 같은.”

힘들다.

요즘은 특히 더.

제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고 버티면 이 터널도 금방 끝날 줄 알았는데.

제가 갇힌 곳은 터널이 아니라 깊은 땅굴인 듯하다.

어쩌면 평생토록 이재영의 그늘 아래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제 이름을 잃고 살다가 끝내 신약이 개발된다고 해도.

엄마가 그때까지 버티지 못하면 어떡하지?

엄마를 위해 재한에서 일한다고 하지만, 정작 재한 때문에 엄마를 외롭게 떠나보내야 한다면……?

그 생각만 하면 두려움에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았다.

진퇴양난의 시간 속에서 이서는 답을 찾지 못하고 메말라 가고 있었다.

그때 빵! 경적 소리가 이서를 깨웠다.

버스가 도착한 줄 알고 고개를 든 이서의 앞엔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서 있었다.

낯선 차의 창이 내려가더니.

“정이서 씨?”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정이서 씨. 괜찮아요?”

“…….”

최 원. 그 남자였다.

안 그래도 고달픈 제 삶에 나타난 정체 모를 인간.

“타요.”

이서는 제 눈가에 묻은 물기를 지우곤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가세요.”

“그러지 말고 타요.”

“가세요.”

최 원은 뒤로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이서는 그제야 차 뒤로 늘어진 버스 행렬을 발견했다.

“다들 기다리잖아요, 빨리 출발하세요.”

“정이서 씨가 타기 전엔 꼼짝도 안 할 건데.”

빠방, 빵!

버스들의 경적 소리에 조급해지는 건 이서 뿐.

그는 이 난리에도 표정 한 번 흔들리지 않았다.

이서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올랐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음 지으며 말했다.

“안전벨트 매고요.”

이서는 못마땅한 듯 그를 보며 안전벨트를 당겼다.

“빨리 출발이나 해요.”

그는 이서가 안전벨트까지 매는 걸 보고 그제야 차를 움직였다.

붉어진 눈가. 그늘진 얼굴.

그는 이서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단숨에 캐치했다.

이럴 땐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고민했는데.

이서가 먼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서 세워 주세요.”

“집까지 데려다 줄게요. 주소 말해 봐요.”

“괜찮으니 앞에 세워주세요. ……집까지 알려줬다가 또 제가 무슨 꼴을 볼 줄 알고요.”

이서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에 최 원의 한쪽 눈썹이 쭉 올라갔다.

“무슨 꼴이라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뻔뻔한 말에 이서가 찌릿 그를 째려봤다.

이서는 높아진 목소리로 그에게 따져 물었다.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죠? 제가 이재영 대표의 비서라는 걸.”

그와 사격장에서 만난 후, 계속 그 생각뿐이었다.

최 원이 두바이에서 만난 남자인 걸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하지만 남자는 처음부터 제가 누군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한편 최 원은 거리낄 게 없다는 듯 뻔뻔하게 대답했다.

“알고는 있었죠, 정이서 씨가 재한의 비서라는 걸.”

거 봐, 전부 다 알고 있었대도.

이서는 화를 꾹 누른 채 핸드백을 꽉 쥐었다.

최 원에게 화가 나기도 했지만,

부주의하게 모르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최 원은 분노가 가득한 이서의 얼굴을 보곤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서가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진짜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이번엔 그가 이서에게 되물었다.

“왜요? 정이서 씨가 재한 비서면 제가 사적으로 만나지도 못 해요?”

“당연하죠.”

“왜죠?”

이서는 답답하다는 듯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최 원 대표님은 LIMS 대표잖아요. 거기다 이번에 재한이 공들인 사업까지 가져간 분이면서. 그런 분이랑 제가 그런…… 시간을 보냈다는 걸 회사에서 알면 제가 괜한 오해를…….”

얼떨결에 그와 시간을 보낸 것 뿐, 회사에 피해를 줄 어떤 일도 하지 않았는데.

하지만 그와 두바이에서 따로 만난 걸 들켰더라면, 제가 아무리 설명해봤자 재한에선 믿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두바이 뱅크를 어이없이 뺏긴 게 제 탓이 됐을 지도.

또, 저는 아니라지만 이 남자의 의도는 모르지.

이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빈정댔다.

“거기다 최 대표님이 저한테 접근한 진짜 의도가 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에 최 원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의도적으로 정이서 씨한테 다가갔단 말이에요?”

“그거야 모르죠, 최 대표님의 의도가 뭔지는.”

그는 황당하다는 듯 웃다가 말했다.

“내 의도라. 난 정이서 씨한테 한 눈에 반해서 다가간 것뿐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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