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을 사랑하라
9화
가족 같은
비쩍 마른 종아리 위에 이서의 손이 올라갔다.
“엄마, 미안. 오늘도 내가 너무 늦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어두운 병실 안에서 이서는 침대 모퉁이에 앉아 조용히 잠든 엄마를 바라보았다.
양 팔에 시퍼렇게 남은 주사바늘이 이서의 마음을 콕콕 쑤셨다.
하지만 엄마는 이서가 마음속으로 울고 있는지도 모르고 푹 잠들어 있었다.
“올해도 얼마 안 남았네. 내년엔 울 엄마 건강해졌으면 좋겠다. 그럼 나도 바로 일 그만두고 엄마랑 놀러 다닐 텐데.”
상상만 해도 행복한 일이었지만, 이서는 쓴웃음을 지었다.
희망의 끝 맛이 얼마나 씁쓸한지 십오 년 간 느끼고 있었으니까.
병원을 제 집처럼 드나든 지도 십오 년이었다.
초등학생 때 찾아온 비극은 아직도 이서의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아마 내년이 찾아오고, 다시 내후년이 찾아와도.
그녀는 이곳에 머무르며 똑같은 희망을 품겠지.
……엄마가 제 곁을 떠나지 않는 한.
이서는 또 울컥 눈물이 흐를 것 같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엄마, 내일은 엄마 일어나 있을 때 올게.”
물론 장담할 수 없는 약속이었지만.
조용히 병실에서 나온 이서를 맞이한 건 친구인 김현주였다.
이 대학병원의 간호사인 현주는 이서와 초등학생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오랫동안 가까이 지냈기에 현주는 가끔 이서보다 이서의 마음을 잘 알아주었다.
“정이서!”
현주는 이서와 팔짱을 꼈다.
“나랑 잠깐 차 한 잔 하고 가.”
“이 새벽에?”
“30분만. 나 쉬는 시간이란 말이야.”
보통 늦은 시간에 오면 빨리 가서 자라고 재촉하는 현주인데.
오늘 그녀를 잡는 걸 보면 따로 할 말이 있는 게 분명했다.
이서는 덜컥 겁부터 났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현주를 따랐다.
현주는 벽에 기대어 있던 이서에게 차 한 잔을 건넸다.
“그래서 두바이는 잘 다녀왔어?”
두바이란 말에 이서가 움찔했다.
이제 두바이란 말만 들으면 그 남자의 얼굴이 자연히 떠올랐다.
“가서 석유 부자 한 명 잡으라니까. 또 일만 하고 왔지?”
석유 부자가 아니라 빌런한테 잡힌 것 같은데.
이서는 차마 말하지 못하고 민망한 듯 웃었다.
“석유 부자를 아무나 만나니. 그리고 내가 그럴 정신이 어딨어.”
“좀 놀라는 소리지! 네 청춘 다 갉아 일해 봤자 알아주는 사람 아무도 없다. 너도 놀 땐 놀아야지. 맨날 밤낮없이 일만 하고. 잠은 제대로 자?”
“그냥, 뭐…….”
피곤 가득한 얼굴이 대신 대답해 주는 것 같아 현주가 한숨을 쉬었다.
“휴, 그러다 네 건강도 망쳐. 너랑 아저씨가 이렇게 몸 바쳐 일하는데 재한에서 약속한 신약은 언제 준대?”
신약이란 말에 이서는 뜨거운 차를 벌컥 들이켰다.
뜨거운 온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곪아버린 속에선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신약 개발해 준다고 한 지가 벌써 몇 년째야. 우리 초등학생 때부터 들은 말이다.”
이서는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아빠가 회장님 옆에 있으니까. 아빠가 잘 챙기고 있을 거야. 그리고 임상도 하고 있다고 했고.”
“이제 재촉이라도 해 봐.”
계속 구두코만 보고 있던 이서가 현주를 바라보았다.
“왜? 엄마 많이 안 좋아?”
“……너도 알다시피 다발성 경화증이란 게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재발하면 속도가 엄청 빨라져. 이제 아줌마도 많이 지치셨고.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는데.”
이서는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제가 이재영 옆에서 동동거릴 때, 엄마는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거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또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손 잡아줄 가족이 곁에 없어서 눈물지었을 거다.
엄마의 얼굴을 상상하자 이서의 마음은 지옥에 떨어진 것 같았다.
“내가 옆에 있지만 그래도.”
현주는 뒷말을 차마 꺼내지 못했다.
엄마의 곁에 있고 싶은 건 이서라는 걸 충분히 잘 알았기에.
“고맙다, 현주야. 그래도 네가 있어서 내 마음이 놓여.”
“어째 얼굴이 더 안 좋아졌어. 끼니 좀 잘 챙기고 잠도 잘 자고.”
“난 내가 잘 챙기고 있어.”
“아주 내가 날 잡아서 이재영 그놈을 혼쭐내던가 해야지. 아휴, 속상해. 진짜.”
이서는 현주를 위로하듯 어깨를 쓱쓱 문질렀다.
“내 걱정 마. 현주야. 너 걱정 안 시키게 잘 할게.”
하지만 현주에겐 그 말마저 슬프게 들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이서가 평범한 사람들처럼만 살 수 있길 바랐다.
재한에 저당 잡힌 정 비서가 아닌 정이서로서 말이다.
“내년엔 네 옆을 지켜줄 든든한 사람도 만났으면 좋겠어.”
이서는 현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저 대신 제 행복을 바라주는 현주가 고마웠다.
* * *
[대한민국 대표 시큐리티 기업, 재한 시큐리티의 보안 프로그램 ‘모자이크’에서 치명적인 취약점이 발견됐습니다. 어제 모 사이트에 자신을 익명의 해커라고 밝힌 이용자가 ‘모자이크’의 취약점을 밝혔습니다. 현재 이 AI 보안 관제 프로그램 ‘모자이크’를 사용하고 있는 기업만 수백 군데에 이르러 그 피해는…….]
아침부터 기자는 재한 시큐리티 건물 앞에 서서 보도를 했다.
그 뉴스에 집안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이재영은 땀을 삐질 흘리며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 뒤에 서 있던 이서 역시 재영처럼 한껏 긴장한 채였다.
“정 실장.”
조용한 와중에 먼저 입을 뗀 건 이곳의 주인, 이주협 회장이었다.
“네, 회장님.”
“재한 그룹에서 시큐리티에 얼마나 투자했지?”
“재한 그룹 보안을 재한 시큐리티에 맡기는 내부 거래 방법으로 전년도 대비 40%나 증가했습니다.”
재영이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죄송해요. 제가 더 단속하겠습니다.”
물론 재영을 따르는 이서의 무릎도 자동으로 굽혀졌다.
정 실장은 자신의 딸의 무릎이 굽혀지는 걸 보고도 무표정했다.
딸보다 제가 몸담고 있는 기업의 명운이 더 중요한 사람처럼.
반면 이주협 회장의 손이 재영의 어깨 위에 올라갔다.
그는 안쓰럽다는 듯 재영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업가라면 위기와는 늘 친구처럼 지내야지. 하지만 만회하지 못한다면…….”
재영의 어깨에 닿은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만회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아들이라고 한들 재영에게도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었다.
재영이 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아버지, 제가 꼭 만회해 보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제가 꼭…….”
“IT 사업은 우리 그룹의 미래다. 네가 그곳에서 입지를 확실히 해야 무리 없이 내 자리를 승계 받을 수 있어.”
“네, 아버지. 제가 책임지고 이 일 수습하겠습니다.”
이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떠는 이재영을 흘끔 바라보았다.
남들이 보기엔 우스울 법했지만, 저건 이재영의 생존 방식이었다.
먼저 강아지처럼 배를 까고 복종하는 것.
“큰일 할 놈이 이런 일로 무릎 꿇으면 안 되지. 일어나거라.”
“아버지.”
“어서.”
그 모습은 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주인과 애완견 같았다.
그것도 귀염성 있고 애교 많은 소형견 말이다.
“출근도 해야 하니 어서 가 봐.”
그 말에 이재영은 못 이긴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영의 그림자인 이서 역시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아버지 신경 안 쓰시도록 빨리 수습하겠습니다.”
이재영은 이 말을 끝으로 빠르게 뒤꽁무니를 뺐다.
그런 재영과 발맞춰 이서도 움직여야 했지만.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그 자리에서 머뭇댔다.
그런 모습에 이 회장과 정 실장이 이서를 바라보았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니? 이서야.”
회장은 재영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서에게도 부드럽게 물었다.
반면 이 회장의 수족이자 이서의 아버지인 정재곤은 엄하게 꾸짖었다.
“정 비서, 지금 회사가 비상 아닌가? 어서 이 대표님이랑,”
“정 실장, 이서도 내 딸 같은 앤데. 나한테 따로 할 말이 있다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지.”
이 회장의 나긋한 목소리에도 이서는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서는 제 입술을 짓씹으며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병원에 있는 엄마가 떠올라 더 이상 머뭇거릴 수 없었다.
“회장님, 다른 게 아니라…… 재한 제약에서 신약 개발에 얼마나 차도가 있는지…… 묻고 싶어서.”
이 회장의 눈빛이 차가워지자 정 실장이 먼저 호통을 쳤다.
“정이서! 그런 건 따로 나한테 물어도,”
그럼에도 이서는 물러서지 않았다.
“회장님, 엄마가 더 오래 못 버틸 것 같습니다. 또 회장님께서 약속하신 시간이 이미 많이 지났는데,”
“야! 정이서!”
이번엔 2층에 있던 손 여사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계단에서 내려왔다.
“어디서 회장님한테 독촉을 하니! 이게 오냐오냐 해줬더니 분수도 모르고!”
손 여사는 눈을 부릅뜨며 이서를 노려봤다.
이 정도 했으면 꼬리를 내리고 깨갱할 때도 됐는데.
오히려 눈빛을 반짝이는 이서를 보고 이 회장이 손사래를 쳤다.
“부모 문젠데 궁금할 수도 있지. 이서 너무 몰아세우지 마.”
“그래도 은혜도 모르고,”
“이서랑 정 실장은 우리를 위해 일 안 했나? 우리 가족처럼 일해 준 사람한테 은혜라니. 오히려 우리가 보답해야지.”
이 회장의 만류에 손 여사의 눈빛도 그제야 살짝 너그러워졌다.
“이서야.”
“네, 회장님.”
“나도 하루빨리 우리 정 실장 가족이 온전히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내가 재촉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응?”
이번엔 마지막이겠지, 이번에야말로 엄마가 건강해질 수 있겠지.
그 생각으로 버틴 게 벌써 15년 째였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입을 떼려 했지만 이번엔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그만 하라는 표시였다.
“이서를 내 딸이라고 생각해왔어. 내가 꼭 우리 이서 소원 이뤄 주마. 응?”
“……감사합니다, 회장님.”
이서는 짧게 묵례를 하고 뒤돌아섰다.
정말 딸 같이 생각했다면 그토록 피 마르는 시간을 견디게 뒀을까.
정말 저희가 가족 같았으면 엄마가 지금까지 아팠을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이서를 더 쿡쿡 찔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