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8화

순수하지 않은 의도


이서도 제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분명 그가 그렇게 말했다.

‘그 자리도 내주실 수 있냐’고.

방금 전까지 보였던 겸손한 기색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속에 싸늘한 칼날이라도 품고 있는 양 서슬 퍼런 태도로 말이다.

예리한 눈은 그의 마음에 숨긴 무기를 비추는 것 같았다.

“내 자리? 내 자리라고 했어요?”

평소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건 이재영이었는데.

하지만 진짜 트러블 메이커가 앞에 있으니 재영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이서는 재영 대신 그의 말을 지적했다.

“최 원 대표님. 표현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최 원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랬나요? 단지 이재영 대표님처럼 훌륭한 회사를 운영하고 싶다는 말이었는데.”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을 던져놓고 이제 와서 또 아무렇지 않은 척.

사람을 들었다 놨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자꾸 저희를 압도하려고 드는 그의 태도에 이서의 경계심이 한층 더 커졌다.

“지나치게 솔직하시네요? 뭐, 이게 요즘 미국 스타일인가?”

반면 재영은 저를 부러워하는 그의 말에 싱긋 웃음 지었다.

아무렴. 제 아무리 잘난 놈이라고 한들 저를 부러워하지 않을 리가.

“근데 이게 원한다고 되는 자리는 아닙니다. 타고나길 잘 타고 나야죠.”

이서는 그새 거들먹거리는 재영이 창피했다.

이 와중에 저런 소리가 나올까.

하기야. 지나칠 정도로 솔직한 부분에서 이재영이 빠질 리가.

대표님의 낯부끄러운 말을 얼른 수습하려 이서가 입을 열었다.

“최 원 대표님.”

막상 부르긴 불렀는데,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선뜩했다.

그날 밤의 기억이 덮치듯 떠오른 탓이었다.

다시는 만나선 안 되는 남잔데.

하필 중요한 열쇠를 가진 사람이 이 남자라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모든 게 너무 맞아떨어졌고.

그렇다고 그가 일부러 제게 접근했다고 하기엔…….

대체 왜?

이렇다 할 이유가 없었다.

두바이 호텔 앞에서 만났을 땐, 이미 두바이 뱅크는 그에게 마음을 돌린 후였으니까.

그럼 제게 뭘 얻으려고 접근한 것일까?

“네, 정 비서님.”

그가 또 진득하게 이서를 바라보았다.

최 원 알레르기라도 생긴 걸까?

그 눈길에도 피부가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가빠지는 것 같았다.

이서는 평소의 페이스를 찾고 준비한 말을 하려 애썼다.

“이 업계에서 일한 시간이 길다고 할 순 없지만, 한 가지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최 원은 자세를 반듯이 한 채로 이서의 말에 집중했다.

정이서가 제게 무얼 약속할 수 있는지 무척 흥미롭다는 듯.

“천재 해커, 개발자……. 이런 인재일수록 서포트해 줄 수 있는 기업이 꼭 필요합니다.”

그녀의 말에 그가 즉각 반응했다.

“아, 회사 운영은 전문 기업인들에게 맡겨라?”

“서로 잘할 수 있는 걸 하자는 뜻입니다. 물론 대표님께서 회사 운영도 훌륭히 해내시겠지만, 거기에 투입될 에너지까지 정보 보안에 힘쓰실 수 있도록 더 좋은 환경을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재한 그룹에서 나를 서포트해 준다라.”

그가 천천히 곱씹는 말에 손에 땀이 고였다.

“물론 현재 함께 하는 동료 분도 재한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썩 내키지 않으시면 재한에서 LIMS를 지원하는 방법도 검토해 보겠습니다.”

재한 같은 큰 기업일수록 인재 영입은 중요한 경쟁력이었다.

게다가 LIMS를 흡수함으로써 두바이 뱅크까지 되찾아올 수 있으니 대가가 얼마든 밑지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그를 회유하고 설득하고자 이 산을 올라온 것이지만.

사실 이곳에 올라올 때와 달리 지금 이서는 그가 ‘NO’라고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최 원이 ‘그 남자’인 걸 알았는데 어떻게 괜찮을 수 있을까.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는 이서의 말을 듣고 웃음을 흘렸다.

“정말 나랑 같이 일하고 싶어요?”

“……물론입니다.”

“정 비서님이 그렇게 말해주시니 듣기 좋네요.”

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긍정인가?

그가 뜸 들이는 동안 이서는 초조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그녀는 그의 자그마한 행동 하나하나에도 움찔거렸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를 너무 과분하게 평가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는 손가락 사이로 이재영의 명함을 굴렸다.

“그래도 오늘 제안,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제안을 생각해 본다고 하자 이서는 살짝 마음이 놓였다.

이서는 그가 끝내 이 제안을 반려해주길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재한을 위해서라면 이 남자를 영입해야 하는 게 맞겠지만.

낯 뜨거운 기억을 공유하는 남자와 매일 같이 회사에서 만나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세요. 대표님.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네, 그러겠습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듯 재영이 먼저 일어났다.

“우린 더 늦기 전에 내려가야 할 거 같은데. 워낙 깊은 산속으로 부르셔서.”

“그렇네요. 제가 운전이라도 해 드리,”

“아닙니다. 저흰 알아서 잘 내려갈 수 있습니다.”

최 원의 호의를 이서가 냉큼 거절했다.

재영을 따라 밖으로 나가던 때, 뒤에서 그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몇 걸음 더 앞서 있는 재영의 귀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가워요, 정이서 씨.”

그 은밀한 속삭임에 이서가 토끼눈을 뜬 채로 그를 쏘아봤다.

“우리는 따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나도 이서 씨 연락 기다릴게요.”

연락은 무슨!

이서는 더 못 들은 척하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서는 얼른 차에 올랐다.

백미러로 보이는 그의 얼굴이 싫어 도망치듯 산속에서 나왔다.

* * *

“재한 시큐리티…… CEO 이재영.”

긴 흑발을 늘어뜨린 여자가 이재영의 명함을 이리저리 살폈다.

굵은 뿔테 안경 뒤, 쌍꺼풀 없는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녀의 이름은 유미주, 최 원과 함께 LIMS를 만든 그의 유일한 동료였다.

또, 아주 오랜 시간 최 원을 지켜본 사람이기도 했고.

그녀는 특유의 보이시한 목소리로 재영을 비웃었다.

“팀장한테 말로만 들었지, 이렇게 허세가 심할지 몰랐네요. 우리 보고 재한 시큐리티에 입사를 하라고?”

컴퓨터를 보던 최 원은 미주의 말을 듣고 물었다.

“넌 어떻게 생각해?”

“뭘 어떻게 생각해요? 재한에 입사하는 거요? 저 그러려고 한국 온 거 아니에요.”

미주는 질색을 했다.

그에 최 원은 모니터를 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우리를 흡수하면 재한에선 두바이 뱅크를 되찾아오는 건 물론, 인재 두 명을 얻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봐도 재한만 좋은 일을 우리가 왜 해요?”

미주는 재한을 배 불릴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말했다.

“어떻게든 돈으로 해결하려고. 여긴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한 곳인데.”

“맞아, 재한이 물을 다 흐리고 있지.”

이재영의 재한 시큐리티는 몸집 큰 하마처럼 우선 좋아 보이는 건 죄다 입에 넣고 있었다.

그들은 시장 물을 흐릴 뿐만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기형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등신 같은 새끼가 대표랍시고 앉아 있으니. 내실은 전혀 없는 기업이 된 거겠지.

그저 최 원의 눈엔 살짝만 툭 쳐도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 같았다.

아마도 곧, 자신이 밟아 없애버릴 모래성.

최 원은 잠시 모니터에서 시선을 뗀 뒤, 창가를 바라보았다.

검고 깊은 그의 눈 안에 파란 불빛이 담겼다.

‘재한’으로 보이는 파란 불빛이.

한참 창가를 바라보던 그가 재미난 게 떠오른 듯 입꼬리를 올렸다.

“어쨌든 이재영에게 제안을 받았으니 우리도 대답을 줘야겠지?”

“당연히 안 된다고 해야죠, 돈만 밝히는 재한 같은 데에선 모셔가도 안 간다고. 우리 실력에 재한 가기엔 너무 아깝다고 말해요.”

“그래, 그러자. 근데 말로 하면 재미없으니까…….”

상시 무표정하던 최 원이 순간 악동처럼 한쪽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웃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우리 식으로 환영 인사를 해야지.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라고.”

그 말에 미주는 신이 나 몸을 들썩거렸다.

“뭐든 좋아요, 안 그래도 한국 와서 할 게 없어서 몸이 근질근질 거렸는데.”

미주는 손가락을 풀곤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검은 뿔테 안경 위로 알아보기 힘든 문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하지만 미주의 눈엔 그것들이 재미난 소설처럼 보였다.

기승전결을 맞춰 놓은 하나의 소설로 말이다.

한참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미주는 실망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수억 원을 들여 만든 프로그램이라고 떠들더니. 너무 허술한 거 아니에요? 내 돈도 아닌데 아깝네.”

“그래?”

“고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팀장이 마음만 먹으면 5분 만에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

해커 최 원의 실력을 잘 아는 미주는 정확하게 진단을 내렸다.

최 원이라면, 퇴근한 재한의 직원들을 다시 회사로 불러들일 수 있을 거다.

미주는 안경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어떻게…… 팀장, 한 번 들어갈까요?”

최 원은 흥분한 미주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블랙 해커야? 나쁜 짓을 하게.”

“뭐야? 우리 식으로 인사한다는 게 그런 뜻 아니었어요?”

보안 프로그램을 해킹할 생각에 들떠 있었는데, 최 원은 나쁜 짓은 어림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말했다.

“우린 엄연히 해커들에게서 사람들의 소중한 정보를 지켜내는 시큐리티 회사잖아.”

언제부터 그런 사명감으로 일했다고? 미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 원의 태도는 한결 같았다.

“이제 예전에 하던 일들은 청산하고, 공공에게 유익한 일을 해야지.”

“그럼 뭐, 가서 고쳐주기라도 해요? 너희 취약점 많으니 조심하라고?”

미주가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그거야말로 재한에게 좋은 일 하며 그들에게 굽실거리는 거 아닌가?

재한이라면 치를 떠는 양반이 왜 저렇게 상냥해졌대?

미주는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그녀의 불만을 눈치챈 건지 최 원은 신박한 제안을 했다.

“그러지 말고 알려주자. 프로그램 취약점이 한두 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걸 우리가 왜,”

“재한에 말고.”

“……네?”

“재한에 알려주지 말고 사람들한테 알려주자고. 너희가 돈 내고 쓰는 보안 프로그램이 사실 문고리 풀린 대문이랑 다를 게 없다고 말이야.”

최 원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미주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건 괜찮네.”

그와 동시에 미주는 타자기를 요란하게 쳤다.

말만 공공의 이익을 운운했지 부정한 일임은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미주는 시큐리티 회사의 직원답지 않게 나쁜 일을 하는데 더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누가 보면 해킹을 해 부정한 이익을 취하는 블랙 해커처럼 보일 정도로.

최 원은 그런 미주를 보며 과연 저희들이 끝까지 시큐리티 회사라는 정체성을 잘 지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종국엔 개 버릇 남 못 주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하지만 뭐, 그들의 목적은 결국 다른 곳에 있으니 상관없으려나?

열심히 타자를 치는 미주를 뒤로한 채, 최 원은 창가에 섰다.

하얀 그의 얼굴이 검은 창 위에 어른거렸다.

그러다 무슨 일인지 낮에 본 그 얼굴이 떠올랐다.

저와 더는 엮이기 싫다는 듯 경계심이 가득하던 얼굴이 선명했다.

그런데 어쩌지. 네가 싫어도 난 궁금해졌는데.

“정이서, 네가.”

최 원이라면 그녀를 만날 구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아무리 그녀가 피한다고 해도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하는 한, 계속.

그렇게 계속 마주치고 마주치다 보면 그녀도 어쩔 방도가 없겠지.

그가 입을 비틀며 웃었다.

단순히 이성적인 관심이라기엔, 그의 의도는 확실히 순수하지 못한 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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