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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7/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7화

네 모든 걸 뺏고 싶은데?


흔한 새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사격장.

총소리까지 잦아들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조용한 가운데 이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 남자가 여기서 왜…….

두바이에 있어야 할 남자가 왜 여기서 나온 거지?

여긴 한국이고, 크리스마스가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이서는 굳은 채로 남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아직 꿈에서 덜 깬 건가?

그래,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일이 벌어질 수는…….

“정이서 비서님.”

하지만 꿈이 아니라는 듯 그가 정확히 이서의 이름을 불렀다.

“네? ……왜 여기 계시는.”

그녀는 고장이라도 난 듯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그야 여기서 만나기로 했으니까요.”

“그럼 최 원…… 대표님?”

떨리는 목소리에 그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대답했다.

“네, 제가 최 원입니다.”

이서와 달리 놀라기는커녕 편히 웃음 짓는 남자.

이서는 평온한 남자의 반응에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 챘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 봐요.”

이 남자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두바이에서 만났을 때부터.

정이서가 재한 시큐리티의 비서라는 걸!

이서의 뒤통수가 얼얼했다.

“어렵게 오셨는데 본의 아니게 놀라게 만들었네요.”

그는 창백하게 질린 이서를 보며 천천히 총기를 정리했다.

그때 뒤에 있던 이재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본의 아니게? 본의 아니게 라고?”

흙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이재영의 꼴이 퍽 비참했다.

재영은 그의 손에서 총이 사라지자 그제야 벌떡 일어났다.

“어떻게 사람한테 총을!”

그 말에도 최 원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만한 웃음을 숨김없이 보였다.

“게다가 나한테. 내가 누군지 모르나 본데! 내가 조금만 다쳐도 난리가 나는 사람이야!”

“이재영 대표님이시잖습니까?”

“……아, 알고 있네? 아는데 나한테 총을? 그러면 안 되지!”

아까의 충격 때문인지 재영은 말을 버벅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최 원은 여유로운 얼굴로 두 사람을 보고 섰다.

근육으로 반듯이 지어진 몸은 꼭 전장에 있는 군인의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미안하다는 뜻을 밝혔다.

“첫 만남에 실례를 범했네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 뒤에 살벌한 말이 이어졌다.

“전쟁터에선 뒤에서 나타난 사람은 무조건 적으로 인지합니다. 설령 아군이더라도 우선 쏴야 목숨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재영은 붉어진 얼굴로 그에게 삿대질을 했다.

“여기가 전쟁터라도 됩니까? 게다가 내가 당신 적도 아닌데!”

“꼭 탄환이 날아다녀야 전쟁터는 아니죠. 적은 언제 어디에나 있습니다.”

최 원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조심하세요. 원래 무기 없이 나타나는 적이 위험한 법입니다.”

그의 조언에 재영의 표정이 구겨졌다.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놓고 총까지 들이댔으면서 되도 않는 소릴.

마음 같아선 당장에라도 이 거지 같은 산에서 내려가고 싶었다.

“곧 눈이 내릴 것 같은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하지만 넘어진 것도 쪽팔린데 도망치기까지 하면 체면이 남아나질 않을 거 같았고.

또 정이서가 여기서 물러서지 않을 거란 걸 재영은 잘 알고 있었다.

재영이 원망스럽다는 듯 이서를 흘겼다.

“저런 사이코를 우리 회사에 데려와야겠냐?”

로봇 같은 정이서도 놀란 걸까?

어쩐 일인지 얼굴에 핏기가 쫙 빠져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저를 앞장 세워 당장에 따라 들어갔을 텐데.

이상하게 오늘은 한 자리에 서서 꿈쩍도 않았다.

“왜? 너도 무서워?”

이재영이 어깨를 쿡 찌르자 이서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네? 아…… 그게.”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얼굴에 이재영은 잘 걸렸다는 듯 당장 이서를 꼬셨다.

“지금이라도 내려가? 뭐, 네가 괜찮으면 난 상관없는데.”

하지만 이서는 재영의 수작을 알고서 바로 그의 옷소매를 잡아챘다.

“대표님.”

“알았어, 가면 되잖아. 가면. 그냥 명함만 주고 나올 거야. 내가 저 사이코한테 구차하게 들러붙을 것까진 없잖아.”

여전히 창백한 얼굴을 한 이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영은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 그를 따라 걸어갔다.

대표라 해서 폼 나는 일만 할 거라 생각했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볼품없어 지는지, 원!

최 원이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사격장에 있는 응접실이었다.

응접실 벽에는 다양한 총기가 걸려 있었고, 곳곳에 박제품들이 놓여 있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이서와 재영 앞에 찻잔이 놓였다.

“그래서 재한에서 저를 ‘긴밀히’ 만나고 싶으셨다고요?”

그가 ‘긴밀히’에 힘을 줘 말하자 이서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연락을 받고 얼마나 우스웠을까?

어쩐지 흔쾌히 만나자고 하더라니.

아연실색한 제 얼굴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었을 것이다.

뻔뻔한 그의 얼굴에 찻물이라도 뿌리고 싶었으나, 이서는 이성을 부여잡고 준비한 말을 꺼냈다.

“최 원 대표님. 이번에 두바이 뱅크와 계약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차를 한 입 들이킨 그의 입이 보기 좋게 호를 그렸다.

“네, 운이 좋았네요.”

운이 좋아? 운으로만 설명하기엔 이 모든 일들이 석연치 않았다.

“물론 재한과 두바이 뱅크 사이에 일이 진행 중이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두바이 뱅크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이는 사업이었으니 업계에선 공연한 사실이었다.

이미 재한으로 좁혀졌다는 걸 알았어도 시큐리티 회사라면 한번쯤 기획서를 들이밀었을 테다.

“저희 LIMS는 고작 설립한 지 2년이 지난 신생 회사입니다. 살아남으려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어야죠. 간절한 건 맞았지만 사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은 저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멋모르고 덤볐는데 운 좋게 재한을 꺾은 것이다?

정말 단순히 운이 좋아 두바이 뱅크가 이들의 손을 잡아준 걸까?

아무리 그의 능력을 믿었다고 한들 고작 2년 된 회사에다?

“듣기론 저희 보안 관제 프로그램보다 더 우수한 프로그램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시던데.”

“운 좋게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직 손 봐야 할 곳이 많아요.”

계속 우연인 척 포장하기 좋은 운을 들먹거리네.

그는 겸손한 말을 하면서도 정작 중요한 사실은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또 하나.

겸손한 말과 달리 그의 태도는 교만한 데가 있었다.

그에게서 보이는 괴리가 계속해서 찝찝하게 남았다.

“최 원 대표님.”

이서의 부름에 최 원은 기대에 찬 눈으로 이서를 바라보았다.

순간, 어둠 속에서 이서를 탐닉했던 눈빛이 겹쳐 보여서. 이서의 가슴이 다시 오그라들었다.

“……아무리 신생 회사라 해도 저희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LIMS라는 회사도, 대표님도 저희에겐 낯설었습니다.”

그 말에 최 원이 삐딱한 자세를 보였다.

“그런가요?”

“네?”

“난 정 비서님 낯이 익은데.”

그가 선을 넘으려고 하자 이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서는 재영의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저었다.

“제 얼굴이 워낙 흔한가 봅니다.”

“흔한 얼굴 아닌 것 같은데요? 어디서든 정이서 비서님 얼굴만 보일 정도로…… 너무 아름다우신데.”

그 말은 재영이 듣기에도 이상했는지 귀를 쫑긋거렸다.

빈말이라고 하기엔 정이서를 보는 놈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근데 정이서는 또 왜 저래?

보통 저런 말에는 반응이 없던 애가 왜…….

무서운 거라도 본 건가? 못 들을 말이라도 들은 거야?

거기다 안면과 손가락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워낙 로봇 같은 인간이라지만 이제 고장이라도 난 걸까?

그도 아님 설마 남자 공포증?

쯧, 저래서 무슨 결혼을 한다고.

두바이에서 증발을 했을 땐, 남자나 잡았나 싶었는데.

역시 괜한 염려였다.

저런 빈말에도 당황할 정돈데 무슨 남자를.

이재영은 이서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정 비서는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대화 나누는 거 싫어합니다.”

십오 년 째 동고동락하고 있는 저와 농담 따먹기조차 안하는데.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이런 말을 듣는 게 버겁겠지.

“아, 그래요?”

그런데 무슨 일인지 최 원의 얼굴엔 미소가 번졌다.

재영은 저놈도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인간들 사이에서 저는 뭘 하고 있는 건지.

빨리 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에 재영은 대답을 독촉했다.

“그래서 원래 어디에 계셨다고요?”

“미국에서 왔습니다.”

“국내외에서 날고 기는 해커나 개발자라면, 우리 개발자들이 모를 리가 없다고 하던데요.”

“뜻 맞는 친구와 만든 작은 회사입니다. 저희끼리 개발만 했지, 지금까지 외부 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으니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뭐야? 고작 동아리 모임이나 하는 놈들 때문에 다들 벌벌 떤 거야?

천재다 뭐다 해서 기대를 했건만.

재영은 최 원의 말에 김이 팍 샜다.

더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그에게 명함을 건넸다.

“컴퓨터랑 씨름하는 것과 회사 운영은 완전히 다른 일 아닙니까? 게다가 최 원 씨 말대로 운이 언제까지 따라줄 지도 모르니까.”

재영이 건넨 명함을 보고 최 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한 시큐리티 CEO 이재영’

금박 명함이 같잖았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웃어 보였다.

“절 재한으로 스카웃하신다는 말씀입니까?”

“그만한 거 만들었으면 어느 정도 능력은 있다는 거니까. 대표인 내가 최 원 씨 만나러 여기까지 왔으니 대우는 걱정 말고요.”

“재한 시큐리티의 대표님께서 하는 말이니 기대가 되는데요.”

“그럼요. IT 업계를 통틀어 봐도 이만한 덴 없을 겁니다.”

최 원이 명함을 내려놓고선 이재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연신 웃어 보이던 전과는 다르게 그의 눈빛이 식어 있었다.

“그럼 그 자리도 내주실 수 있나?”

게다가 점잖기 그지없었던 말투 역시 싹둑 짧아져 있었다.

당황한 재영이 대답을 하기 전에 최 원이 쐐기를 박았다.

“대표님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 저도 누리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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