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6화

긴밀히 만나고 싶습니다.


귀국하자마자 회의가 줄지었다.

여독과 더불어 과음의 여파가 여전했지만 숨 돌릴 시간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서의 얼굴엔 오히려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녀는 비행 내내 준비했던 브리핑을 차분하게 진행했다.

기술팀과의 회의 분위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두바이 뱅크를 꼭 잡아야 한다고 밤낮 없이 직원들을 박박 긁을 땐 언제고.

정작 두바이까지 날아간 대표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게다가 지금은 다른 나라 이야기를 듣듯 태연하게 앉아 있다니.

얼굴에 철면피를 깐 뻔뻔한 대표에게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한편 왕유진 기술본부장은 차분했다.

재한 시큐리티가 재한 제약에 인수되기 전엔 벤처기업인 플랜 시큐리티였다.

그녀는 그곳의 초기 개발자이자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멤버.

이곳의 중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존재였다.

“UAE 환경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할 거라는 이야기는 전했고요?”

“예. 저희 개발팀에서 환경에 맞는 보안 솔루션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것이라고 했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서는 두바이 뱅크에서 들은 그대로를 전했다.

‘모자이크’를 뛰어넘는 보안 솔루션을 가지고 있다는 미지의 인물에 대해서.

“최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쪽에서 ‘천재’라고 표현하는 걸 보면 평범한 인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말에 기술팀이 술렁거렸다.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실력자들이 모인 곳이 재한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만든 보안 프로그램보다 더 뛰어난 걸 개발했다고?

“최 원? 전 듣도 보도 못한 이름인데요? 저희가 국내외 날고 기는 해커들이나 개발자들 파악도 못하고 있겠어요?”

개발 팀장인 김수훈이 불쑥 끼어들었다.

“너희는 예상가는 사람 있어?”

스무 명이 넘는 팀원들 역시 영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최 원’이라는 이름을 쓰며 이 정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가 도대체 누구일까?

누군가는 당장 검색에 들어갔지만 역시 잡히는 정보는 없었다.

술렁이던 사람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왕 본부장이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요주의 인물 하나가 나타난 것 같은데.”

본부장은 조용한 목소리로 회의실을 단번에 휘어잡았다.

“천재 한 명이 기업 하나를 뒤집는 건 일도 아닙니다. 두바이 뱅크도 껌뻑 넘어갈 정도면 그자의 기량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수도 있어요.”

IT 업계에 몸을 담은 건 겨우 3년 째였지만, 이서 또한 이 시장의 생태 정도는 알고 있었다.

왕 본부장 말처럼 괴물 한 명은 예측불허한 일을 해낸다.

“우선 그자를 최대한 빨리 팔로우 해봅시다. 이미 알던 사람이 이름만 바꿔서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뉴 페이스가 나타난 건지.”

모두의 얼굴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한 사람, 이재영만 빼고.

긴긴 회의가 끝나자 드디어 재영이 입을 열었다.

“점심 뭐 먹을까?”

회의 시간 내내 소리가 없어 있는지조차 깜빡할 정도였다.

이서는 제 손목시계를 확인한 뒤 대답했다.

“대표님께서 원하시는 곳 있으면 예약해 두겠습니다. 전 오늘 대표님과 같이 식사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이재영이 팔짱을 끼고 수상쩍은 눈으로 이서를 흘겼다.

“왜? 또 혼자서 어디 가려고?”

정신없이 자료를 정리하던 이서의 손이 멈췄다.

재영은 두바이에서 하룻밤 증발됐다는 이유로 계속 이서를 의심하는 중이었다.

“한 시간 후에 서비스 사업부 회의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표님 대신이요.”

그 말에 재영은 짧게 헛기침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네, 계속 최 원을 추적해야 하니 바쁠 것 같습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오늘 점심은 이 상무랑 해야겠다. 외국 나갔다 왔다고 또 한식이 당기네.”

“그럼 자주 가시는 한정식집으로 예약해 두겠습니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너도 끼니 챙겨.”

챙겨 주는 척하면서 약을 올리는 게 영 같잖았다.

이서는 딱딱한 미소로 대답하며 이재영을 더 응대하지 않았다.

늦은 열 시. 이재영은 일찌감치 퇴근해 대표실은 조용했다.

이서는 그때가 되어서야 대표실 앞에 있는 제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었던 이서는 낮에 사 둔 도시락을 꺼냈다.

차게 식은 도시락을 먹으며 남은 잔업을 처리하고 있던 때.

메일이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이서는 부랴부랴 메일을 확인했다.

“……그의 명함이야. 몰래 찍어서 보내는 거니까 비밀 지키도록. 또 약속했던 골프 클럽 예약도 꼭 지키길.”

영어로 온 메일을 읽던 이서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퍼졌다.

일 년 동안 이서와 소통했던 두바이 뱅크 임원의 비서였다.

골프가 취미인 대표님을 모시는 비서들의 고충은 뻔했다.

내년 서울금융포럼에 참석할 때도 클럽 예약은 무조건이겠지.

돈보다 스피드가 생명인 이곳에서 외국인 비서가 예약에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서는 클럽 예약을 해주는 대신 그에게 최 원의 정보를 넘기라고 했다.

긴가민가하며 물어본 건데 예상보다 더 반응이 빨랐다.

그녀는 도시락도 한쪽으로 미뤄 두고 메일에 첨부된 이미지를 확인했다.

블랙 명함엔 하얀색으로 ‘LIMS’라 써져 있었다.

그 밑으론 ‘CEO 최 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메일 주소만 적혀있을 뿐. 전화번호나 주소는 따로 없었다.

“LIMS? 이게 회사명인가?”

이서는 바로 LIMS를 검색했다.

역시나 잡히는 정보는 전무했다.

“……메일로만 소통해야 하나.”

이서는 한참 고민하다가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한 줄 한 줄 적는데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분명 재한과의 접촉을 마뜩치 않아할 테니 더욱 조심스러웠다.

“최 원 대표님과 긴밀한 만남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부디 긍정적으로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서는 제 번호까지 적은 후에야 겨우 전송 버튼을 눌렀다.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메일을 쓰는데 기를 다 쏟았는지 머리가 핑 돌았다.

이서는 돌처럼 딱딱한 밥을 먹는 것도 그만둔 채 의자에 몸을 푹 기댔다.

“……읽고 답장도 안 하면 어떡하지. 아니, 읽지도 않으면.”

이것도 안 통하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내야 할 텐데.

하지만 흔적 하나 없는 남자를 무슨 수로 잡냔 말이다.

이서의 고민이 깊어질 때쯤, 핸드폰이 길게 몸을 떨었다.

이서는 팔을 쭉 뻗어 핸드폰을 확인했다. 발신자는 모르는 번호였다.

별 기대 없이 전화를 받은 이서의 눈이 커졌다.

-안녕하세요. 정이서 비서님. 보내주신 메일 확인하고 연락드립니다.

수화기 뒤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

뭐지?

……어딘가 익숙한데?

-LIMS 대표, 최 원입니다.

이서가 바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메일 보낸 지 1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정이서 비서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서를 깨웠다.

“네, 대표님!”

-연락 받고 무척 반가웠습니다.

게다가 이렇게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줄은 더 예상 못했다.

이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위를 서성이며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지금 한국이신가요?”

-내일 저녁에 입국합니다.

“저희가 최 원 대표님을 긴밀히 만나 뵙고 싶습니다. 대표님 편하신 시간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찾아뵙겠습니다.”

수화기 뒤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초조한 이서와 달리 그는 여유가 가득했다.

-저도 빨리 만나 뵙고 싶네요, 정이서 비서님.

그는 무슨 자신감으로 이렇게 여유로운 걸까?

그의 여유가 수상했다.

-그럼 장소와 시간 보내드리죠. 우리 그때 만나는 걸로 해요.

궁금했다.

최 원, 그가 어떤 사람인지.

이서는 하루 빨리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 * *

궂은 날씨였다.

곧 눈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하늘은 어두컴컴했다.

거기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숲으로 들어오자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배가 됐다.

“여기가 확실해? 아무래도 네비 잘못 찍은 거 같다니까? 누가 산에서 비즈니스를 해?”

뒤에 앉아 있던 재영은 겁에 질려 이서를 닦달했다.

하지만 이서는 꿈쩍도 않고 계속 산길을 올라갔다.

“여기 맞습니다. 저도 몇 번이나 확인했는걸요?”

“제정신 박힌 놈 맞아? 누가 재한 시큐리티 대표를 산 속으로 불러?”

그리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굉음. 분명 총소리였다.

“됐어. 차 돌려. 이렇게까지 해서 만나고 싶지 않아.”

“대표님, 조금만 올라가 봐요. 여기까지 온 게 아깝잖아요.”

“안 아까워! 애초에 미친놈 만나서 뭘 하냐? 말이 통하는, 아악!”

탕! 타당! 산속을 뒤흔드는 총소리에 이재영이 귀를 틀어막았다.

“재수 없게 사냥총에 죽는다고 생각해 봐! 그게 바로 개죽음이지!”

재영의 찡얼거림에도 이서는 꿋꿋이 산을 올랐다.

상종 못할 돌아이라도 상관없었다. 예측 불가 미친놈이라도 괜찮았다.

그의 얼굴이라도 확인하고 가는 게 이서가 할 일이었다.

구불거리는 산길을 한참 올라가자 사격장이 나타났다.

‘사격장’이라는 글자가 보이자 재영은 그제야 차에서 내렸다.

“……괜히 쫄았네.”

하늘로 붕 뜬 클레이가 공중에서 일발에 박살이 났다.

이서는 그 광경을 보다 사격 중인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하여간 아무것도 없는 놈들이 꼭 저렇게 허세를 떨더라.”

한시름 놓은 재영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저렇게 과시하는 데 미친놈치고 제대로 갖춘 놈을 못 봤다고.”

그런가? 전화에서 느꼈던 여유도 그의 괜한 과시일 뿐일까?

“빨리 이야기 끝내고 가자고. 여기 더 있다간 고막 나가겠어.”

재영은 그대로 앞으로 걸어갔다.

“대표님, 저 사람 총 가지고 있는데 함부로 다가가면 안 돼요.”

이서의 경고도 무시한 재영은 어느새 남자의 뒤에 가까이 다가가 있었다.

“이봐요!”

타당! 총소리는 재영의 목소리를 너무도 쉽게 묻어 버렸다.

거기다 사격용 귀마개까지 끼고 있으니 그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그에 짜증이 났는지 재영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재영의 손이 그의 몸에 닿기도 전.

“으, 으악!”

남자는 몸을 돌려 이재영을 정조준 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구가 눈앞에 놓이자 재영은 아연실색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뒷걸음질 치다 땅바닥에 벌러덩 넘어지고 말았다.

그 꼴을 보고도 그는 총을 거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서는 구두를 신은 채 단숨에 흙길을 달렸다.

“이봐요!”

그리곤 곧장 두 팔을 벌려 재영을 보호하고 섰다.

엽총을 든 남자의 선글라스에 놀란 이서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

“사, 사람한테 총을…….”

떨리는 이서의 목소리에 그는 그제야 총을 내렸다.

총에 가려져 있던 하관이 드러나자 이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깎은 듯 각진 턱하며 하얀 피부.

거기다 붉은 저 입술…….

이서의 머릿속에 더는 떠올라선 안 될 그림이 떠오를 무렵.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

아무래도 방금 전 총알이 머리를 관통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을 꿈꾸고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생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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