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74)

나의 적을 사랑하라

4화

천재를 이기는 방법


“오늘도 보네요.”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감흥이 없던 이서가 움찔했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서의 심장이 곤두박질쳤다.

“어? 어제…….”

그래서일까?

어려운 자리에서도 막힘없이 나오던 말이 버벅거렸다.

정장을 입었던 어제와 달리 오늘 그는 편안한 복장이었다.

소매를 걷은 화이트 와이셔츠, 팔목에 찬 은빛 팔찌가 눈에 띄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훑었는데.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이서의 마음을 고자질하는 것 같았다.

그는 그녀에게 웃음기 없이 물었다.

“혼자 마셔요?”

“아……. 네.”

“그럼 옆에 앉아도 돼요?”

마침 바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서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불편한 마음에 거절하고 싶었지만, 어제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냉정하긴 쉽지 않았다.

“네, 근데 제법 마셔서 이 잔만 비우고 들어가 보려고요.”

이서는 이 자릴 빨리 피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때문인지 불편한 마음이 컸다.

그런 이서와 달리 남자는 원래 제 자리인 양 그녀의 옆자리에 자연스레 앉았다.

“아무도 모르는 도시에서 술친구 구한 것 같아 기뻤는데. 한 잔만 한다니 서운한데요.”

그리고 이서에게 건네는 말 또한 편하기 그지없었다.

이서는 제가 너무 불편함을 보인 것 같아 민망했다.

“어제 도움도 받았는데…… 이번 잔은 제가 살게요.”

그 말에 남자는 한쪽 눈썹을 찡긋거리며 메뉴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이서에게 다른 제안을 했다.

“술 대신 시간은 어때요?”

“네? 시간이요?”

“한 시간만 같이 있어요.”

“제가 같이 시간 보내기에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데요.”

이서의 말에 남자는 대답 대신 바텐더에게 술을 주문했다.

이 정도 경계심을 보였으면 기분이 나빠서라도 물러설 법한데.

“같이 있자고 한 건 나니까 내가 재미있게 해 줘야죠.”

오히려 이런 대답을 내놓으니 이서도 더는 별말 하지 못했다.

그래, 한 시간.

한 시간 같이 보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금방이라도 엉덩이를 뗄 것 같았던 이서가 다시 편히 자리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해가 질수록 화려하게 물드는 도시의 풍경에 푹 빠진 듯 보였지만.

사실 이서의 눈엔 창밖의 풍경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팔꿈치.

자꾸만 그의 옷깃에 닿는 팔꿈치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다.

무더운 두바이의 날씨에 맞게 이서는 민소매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맨살이 그의 와이셔츠에 닿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이 남자의 셔츠에만 닿았을 뿐인데 어째서 자꾸 오묘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이서는 칵테일 한 모금으로 간지러운 긴장감을 지우려 했다.

“크리스마슨데 가까운 사람들이랑 있지 못해서 아쉽겠어요.”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분위기에 그가 먼저 물꼬를 텄다.

이서는 그 말에 주위 사람들을 살폈다.

가족과 연인, 친구들과 보내는 크리스마스…….

그의 말처럼 모두가 훈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이서는 가까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조차 가물가물했다.

늘 재한 가의 그림자로 살아와야 했으니까.

이번엔 씁쓸한 마음을 삼키려 술을 들이켰다.

“제가 쉬고 있으면 주위 사람들도 어색해 해요.”

“본인도 어색한 것 같은데. 지금 핸드폰도 못 놓고 있잖아요.”

이서는 그제야 제가 핸드폰을 꽉 쥐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아, 이것도 습관이 돼서.”

그녀는 핸드백 안에 핸드폰을 넣어 버렸다.

“손에 없으면 불안한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잠깐은 괜찮아요.”

고작 한 시간 보내는 건데.

혹여나 제가 시간을 확인하는 걸로 보이진 않았겠지?

긴장감에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할 정신도 없었다.

이서는 또 말없이 술잔만 비워댔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관찰했다.

줄곧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말 한 마디, 찰나의 한숨이 내포하는 건 많았다.

또 여러 감정이 오고가는 듯 빠르게 비워 가는 술잔도.

처음 만난 여자의 속사정을 헤아리는 취미는 없었지만 오늘 그의 눈에는 오직 이 여자만 담겼다.

“달콤한 술이 제일 위험할 텐데.”

이서가 그를 바라보았다.

이미 술을 꽤 마신 탓에 그녀의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취한 줄도 모르게 취해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 말을 하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이서의 얼굴이 이미 느슨해져 있었으니까.

또 경계심이 가득했던 얼굴에 감도는 웃음기와 뚫어지게 그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도.

“이 눈이요.”

그녀는 과감하게 그의 눈을 가리켰다.

“낯익어요.”

“내 눈이요?”

“이 눈만 낯이 익어요. 우리 분명 초면인데.”

“그럼 초면이 아닌가.”

“전 한 번 본 사람은 잘 잊지 않아요. 분명 초면인데 왜 낯익지.”

그가 짧게 웃음을 흘리며 술잔을 비웠다. 마치 하려던 말을 대신해 웃는 것처럼.

하지만 이서는 그런 세세한 변화까지 눈치챌 정신이 아니었다.

이미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그녀였다.

평소라면 입 밖에 꺼내기는커녕 자신조차 무시했을 감정들.

그것들이 술과 함께 부풀었는지 이서의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원해서 비서가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잘하고 싶었는데. 하는 것마다 엉망진창이에요.”

이서는 저를 나무랐던 이재영을 떠올렸다.

또 이재영의 모든 문제들을 제 잘못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원래 크리스마스도 되게 좋아했는데. 가족들이랑 단란하게 식사한 게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요. 그런 즐거움까지 잊어가면서 일해도……. 보람이 없는데. 진짜.”

평소 이서는 감정에 큰 동요가 없는 편이지만 오늘은 나사가 풀린 듯 제 속을 과감히 드러냈다.

“왜 다 내 탓이래. 난 아무런 잘못도 없어요. 이건 다 책임감 없고 노는 데만 관심 있는 이재영 때문이지.”

막상 이재영 욕을 내뱉고 나니 이서는 마음이 뜨끔했다.

속으로 욕한 건 셀 수 없지만 한번도 남 앞에서 대표님 욕을 한 적은 없었는데.

하지만 남자는 아무런 동요 없이 이서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그래,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였다.

게다가 이미 취한 탓에 머리는 뱅뱅 돌았고 감정은 정도를 모르고 날뛰었다.

“원상복구 할 거예요. 난 내 능력을 꼭 인정받아야 하거든요? 그래야 엄마…….”

이서가 입을 삐죽였다.

엄마 이야기를 하면 코끝이 매워졌다. 이서는 눈물이라도 흘릴까 봐 빠르게 말을 돌렸다.

“그러니까 최 원!”

대뜸 튀어나온 이름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서는 두 손을 꽉 쥔 채로 제 각오를 다졌다.

“최 원을 잡아야지.”

“누구요?”

그녀는 가늘어진 눈매로 그를 빤히 바라보다 귓가에 속닥거렸다.

“……엄청 무서운 놈이요.”

“왜요? 뭘 했다고.”

“그야…… 우리 AI도 이긴 천재니까?”

그 말을 듣던 남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잡아서!”

“어떻게 할 건데요?”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은 안 해 봤는데.

빙글빙글 도는 머릿속엔 다소 과격한 방법들만 떠올랐다.

“궁금해요?”

“그야 대단한 방법이어야 할 테니까.”

“대단한 방법?”

“천재라면서요. 천재를 잡으려면 범인들은 감히 생각도 못할 방법이 있어야죠.”

생각도 못한 방법? 그런 게 제 머리에서 나올 리가.

“아님 그 좋은 머리 굴릴 틈도 없이 당황스럽게 만들던가.”

당황스럽게? 그건 그나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당황스럽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하던 그녀가 불쑥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순간 손을 뻗어 두 손으로 그의 옷깃을 휘어잡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에 그 역시 어쩔 도리가 없어 보였다.

“그럼 이렇게 멱살을 잡구……?”

이서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힘껏 당겨 왔다.

하도 거칠게 당긴 바람에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을 거리에 놓였다.

술김에 벌인 일이었지만. 당황한 건 오히려 이서였다.

남자는 오히려 재미있는지 이서를 부추겼다.

“그리고?”

그가 다음 스텝에 대해 물었다.

“잡구서는…….”

“어떻게 할 건데?”

“……그러니까.”

이서가 주저하자 남자가 웃음기 하나 없이 속삭였다.

“망설이는 순간 질 텐데?”

이서는 순간 그의 차가운 눈빛이 저를 관통하는 것 같았다.

“내가 알려줄까? 이기는 법.”

은밀하고 위험한 속삭임.

더는 이 말에 말려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서는 그에게 홀린 듯 꿈쩍도 하지 못했다.

“그런 놈을 상대할 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이서의 허리를 감쌌다.

그는 이서의 허리를 당겨 제 가슴 위에 가까이 붙였다.

“모든 걸 걸고 덤벼야지.”

두 손이 달달 떨렸다. 그럴수록 이서는 그의 옷깃을 더욱 꽉 잡았다.

“……난 가진 게 없는데.”

“없어? 없으면 뭐라도 찾아 봐.”

“그렇지만,”

“내가 만들어 줘?”

이서의 허리를 잡고 있던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서 또한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취한 와중에 생각이란 게 있었을 리가.

당장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이서가 그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한 시도 쉬지 않고 흐르던 그녀의 시간이 급정지한 것 같았다.

그 충격이 그녀의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닿았지만.

그럼에도 이 순간을 오래 멈추고 싶었다.

아무런 걱정 없이 날것의 감정에만 집중할 수 있는 이 순간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그만큼 달콤한 키스였다.


0